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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자인 저에게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상상 이상으로 비싼 숙박비였습니다. 싱가포르 입국 며칠 전 숙소를 예약하면서 깜짝 놀랐더랬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동남아시아에 들어온 두 저는 보통 하루 10USD가 되지 않는 도미토리에 머물렀습니다. 하루 20USD를 넘는 숙소는 특별한 날에만 가능했죠. 그런데 가장 싼 숙소를 아무리 뒤져도 30USD 아래로 내려가질 않더군요.

어쩔 수 없이 7만 원 가까운 비용으로 이틀 밤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죠. 첫날은 싱가포르에 입국을 해야 했고, 마지막 날은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싱가포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겨우 하루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래플스 상륙 기념지
 래플스 상륙 기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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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역사가 짧은 도시는 아닙니다. 기원후 2세기경부터 무역항으로 기록되고 있고, 7세기 무렵부터 '테마섹(Temasek)'이라는 이름의 어촌으로 언급됩니다. 13세기에는 '싱가포르'라는 이름이 붙었죠. 14세기 이곳에 자리잡았던 파라메슈와라가 말레이 반도로 건너가 믈라카 술탄국을 건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싱가포르가 중요한 도시로 성장한 것은 19세기에 접어든 후의 일입니다.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상륙한 것이죠. 싱가포르 도심 중앙에는 여전히 래플스의 상륙 기념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가 상륙했을 때 작은 어촌이었을 이 섬에는 이제 마천루가 가득하고, 그 도심을 배경으로 고심에 찬 래플스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사실 굳이 래플스 상륙 기념지에 가지 않더라도, 그의 흔적은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래플스 병원, 래플스 호텔까지 싱가포르 여기저기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의 전시에서는 아예 래플스의 상륙 이후부터를 역사로 간주하고, 그 이전의 문명은 매우 소략하게만 다루고 있었습니다. 식민지를 건설한 외국인의 이름을 건국의 아버지로 기억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이질적인 풍경이기도 하죠.
 
래플스 호텔
 래플스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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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곧 영국의 해협 식민지에 포함됩니다. 영국은 전략적으로 싱가포르를 개발했죠. 원래 인구 1천 명에 불과했던 이 섬은 1860년대 8만 명이 거주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중국계와 인도계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인구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성장은 거듭되었고, 1880년 세계 증기선 운송량의 80%는 싱가포르를 거쳐 갔습니다. 영국은 싱가포르를 "동방의 지브롤터"라 불렀습니다. 지브롤터 만큼이나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영국이 이렇게 중요한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를 상실한 것은 2차대전기의 일입니다. 1941년 말부터 일본이 말레이시아 침공을 시작했죠. 별다른 방어책을 준비해두지 않았던 영국의 식민지들은 손쉽게 일본에게 넘어갔습니다.

1942년 1월, 일본은 침공 55일 만에 말레이 반도를 장악하고 싱가포르 공격을 시작합니다. 2월 15일 영국령 싱가포르는 일본에 항복합니다. 일본은 싱가포르에 '쇼난도(昭南島)'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미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을 거친 일본군은 '쇼난도'에서도 학살과 강제동원을 지속했습니다.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일본 점령 시대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일본 점령 시대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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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영국은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영국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자치를 준비합니다. 서서히 자치권을 확대해 나가던 싱가포르는 1958년 영국 의회의 싱가포르법 통과로 완전한 독립국가가 됩니다.

그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등장한 지도자가 리콴유였습니다. 그의 인민행동당(PAP)이 압승을 거뒀죠. 원래 영국 치하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림유혹(Lim Yew Hock)은 국가보안법을 동원해 노조 지도자와 공산주의자를 대거 체포한 우파적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학생조직과 노동조직을 결합해낸 것이 인민행동당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리콴유나 인민행동당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죠. 의회 51석 중 43석을 차지한 인민행동당은 리콴유를 수상으로 선출합니다. 서방에서는 싱가포르가 곧 공산화될 것이라 예측했고, 일부 기업은 싱가포르 지점을 폐쇄하거나 쿠알라룸푸르로 이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중국이 공산화된 상황에서, 화교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싱가포르가 공산화될 것이라는 예측은 힘을 얻어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결말은 달랐죠. 당과 국가를 장악한 리콴유는 이제까지 인민행동당의 노선과는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외국의 적극적인 투자를 받아들였고,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노조를 강제로 통폐합하고, 기업을 위해 세금 구조를 재편했죠. 당내 좌파 세력은 이를 비판하며 탈당해 한때 상당한 세력을 유지했지만, 리콴유는 이들에게 국가권력을 동원한 탄압으로 맞섰습니다.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말레이 연방 가입을 촉구하는 리콴유의 연설문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말레이 연방 가입을 촉구하는 리콴유의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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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기도 합니다. 말레이시아 자체가 영국 지배 시절부터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 식민지와 여러 술탄국이 합의해 만든 연방제 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하지만 이 연방 가입은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일이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연방 가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진행했지만, 가입 찬반이 아닌 가입 조건을 두고 실시한 투표였습니다. 국민들은 연방 가입에 대한 직접적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었죠.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내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집권여당 UMNO가 싱가포르 주 선거에 참여하며 약속은 파기되었죠. 결국 연방정부와 싱가포르 사이에는 단일시장 여부와 재정 지원을 둘러싸고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격화된 갈등은 1965년 싱가포르의 연방 축출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싱가포르는 강요된 독립을 맞았습니다.

그 덕에 싱가포르의 통제적이고 독재적인 정책은 더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1990년 리콴유는 수상에서 물러나고 고척통이 2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콴유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취임해, 사실상 상왕으로 군림했습니다. 리콴유의 아들인 리셴룽은 30세에 국군참모차장, 32세에 국무장관을 역임합니다. 그리고 2004년, 52세의 나이로 3대 총리의 자리에 오르죠. 선임장관의 자리는 고척통이 이어받았지만, 리콴유는 다시 '장관 고문(Minister Mentor)'라는 자리에 앉아 권력을 이어갔습니다.
 
주차 단속을 알리는 표지판
 주차 단속을 알리는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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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누가 뭐래도 단연 선진국입니다. 1인당 GDP로는 세계 10위 안에 결코 빠지지 않는 국가죠. 배후지 없는 모래섬, 자력으로는 식량도 식수도 공급할 수 없었던 땅. 그런 땅이 이제는 세계적인 항구가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제조업과 정유 산업으로, 나중에는 금융업과 첨단 기술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국토는 좁고 인구는 적지만,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어느 국가보다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인프라는 촘촘하고 편리합니다. 물가가 비싸다고 불평했지만, 그건 제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 있다가 왔기 때문이겠죠. 사실 한국과는 큰 차이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싱가포르와 한국이, 리콴유와 김대중이, 여전히 아시아의 미래 체제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경쟁에서는 싱가포르가, 리콴유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두 배 이상 높은 국가가 되었으니까요. 서울보다 조금 큰 모래섬이 세계를 좌우하는 금융의 허브가 되었으니까요. 이것이 래플스와 식민주의의, 리콴유와 국가자본주의의 힘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회의사당과 마천루
 싱가포르 국회의사당과 마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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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싱가포르의 현대사를 바라보며, 저는 그런 서글픈 결론을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유와 권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러나 끝내 철저히 무시되었던 사람들을 저는 기억하고 싶습니다. 실패해 이름조차 남지 않은 그 사람들의 얼굴을 만나고 싶습니다.

현실은 리콴유의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시아 각지에는 많은 이들이 새로운 리콴유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몇이라도 댈 수 있습니다. 아마 역사에는 그 사람들의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몇몇은 실패한 독재자로, 몇몇은 리콴유처럼 성공한 독재자로 남겠죠.

하지만 여전히, 아시아 대륙에는 민주와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하다고. 누구도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앞서 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름은 아마 영영 기록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번화한 대로에서 한참을 들어와야 있는 낮은 건물 2층의 제 숙소에는 오늘도 중국식 억양이 많이 섞인 영어로 손님을 맞는 숙소의 주인 아주머니가 투숙객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시크교 신자인지 터번을 둘러 쓰고 있는 아저씨는 무거운 배낭을 멘 외국인에게 성심껏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골목의 여전한 풍경은, 이방인인 저에게도 안심이 되는 모습입니다.

저는 래플스와 리콴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승리에 함께 기뻐하고, 그들의 실패에 위로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고, 더 평화로운 세상을 그렇게 기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리콴유의 아래에도, 김대중의 뒤에도 그 사람들이 있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고자 합니다.

마천루가 늘어선 싱가포르의 거리 위에서도, 부유하고 발전된 이 도시를 걸으면서도, 저는 리콴유와 김대중 사이에 결론을 내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그 결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 함께 있음을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을 기억하고 이 사람들과 연대하며, 언젠가 이 사람들이 만들어낼 김대중과 더 진보한 세상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지금을 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학을 공부하는 제가, 오늘도 다시 서쪽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싱가포르, #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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