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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두(1949년생) 씨는 강원도 거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라고 선원 생활을 시작한 곳도 거진이었다. 서씨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가정이었지만, 서씨가 9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 가난해진 살림에 결국 서씨마저 배를 타야 했다고 한다.

마침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운행하는 배를 소개받아 오징어를 잡으러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 셋을 책임져야 하기에는 매우 어린 나이의 서씨였으나 그렇게 배를 타야 할 수밖에 없었다.
 
18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겨울에 명태를 잡으러 나갔어요. 그전까지는 오징어를 잡았는데 겨울에 명태잡이가 힘은 들어도 돈을 훨씬 더 벌 수 있거든요. 그 배가 바로 납북되었던 금성호였어요. 금성호를 타고 처음 바다로 나간 날이 바로 1966년 11월 11일이에요. 죽어도 그날은 잊지 못해요.

서씨가 탔던 금성호는 1966년 11월 11일 새벽어둠을 뚫고 거진항을 출발해 동해로 나갔다. 바다에 나가 낚시를 바다에 던지려고 할 때 멀리 한국 해군 함정이 불빛을 번쩍이며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고 한다. 작업하기 전 보였던 한국 해군 함정 때문에 금성호 선원들은 월선이나 납북 걱정 없이 편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실제 당시 납치 기사를 보도했던 <조선일보> 1967년 11월 12일 자에 의하면 금성호가 납치되었던 장소는 휴전선 남방 2km 지점이다.

한국 해군 함정 보고 안심했는데...
  
서씨가 승선했던 금성호가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는 내용의 기사. 1967년 11월 12일 자 조선일보.
 서씨가 승선했던 금성호가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는 내용의 기사. 1967년 11월 12일 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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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함정이 지나갔으니 당연히 대한민국 해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그렇게 낚시를 드리우는데 한 시간 정도도 안 걸린 것 같아요. 처음 낚싯줄을 드리운 곳으로 돌아가 낚시를 건지려고 하니까 멀리서 쾌속정 한 대가 다가오더라고요. 동이 막 트려고 할 때였고, 마침 날씨가 좋아서 바다가 멀리까지 보였어요. 순간 북한 배다 싶어서 그물을 놓고 바로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그래봐야 금성호 속도가 5노트 정도 밖에 안 나가다 보니 바로 잡혔죠.

총구를 들이밀며 금성호에 접근한 북한 쾌속정은 밧줄을 던져 금성호를 엮게 한 뒤 곧장 엔진을 끄게 하고는 끌고 올라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끌려간 장소는 장전항을 지난 작은 어촌 마을 남애리였다고 한다. 당시 남애리에서는 북한 어선들이 바다에서 잡아 온 도루묵을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납북된 선원은 옆집에 살던 박승천을 비롯해 6명이었다고 한다.

남애리에 도착한 금성호 선원들은 소독 등을 마치고 창고 같은 건물에서 2~3일 정도 지낸 뒤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야간이 되자 커튼으로 창문이 가려진 버스를 타고 금강산 온정리 호텔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5일간 머물다 다시 원산으로 이동해 그곳 호텔에서 3일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야간 기차를 이용해 평양으로 이동해 대동강 옆 평양여관이라는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평양여관이) 6층 건물인가 그랬어요. 거기서 나올 때까지 계속 머물며 지냈어요. 그곳에서는 주로 북한이 자랑할 만한 곳, 좋다는 곳을 데리고 다니며 견학시키더라고요. 저놈들 자랑할 거리를 데리고 다니며 관광시켜주는 거죠.

특이하게 꼭 밤에 잘 때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와 옆구리를 살짝 찔러서 한 사람씩 데리고 나가서 조사하더라고요. 조사하는 동안에 그놈들 하는 말이 '북한에 남으면 공부도 시켜주고 잘 먹고 잘산다'고 꾀이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선원들 중 나이 많은 어른들이 저더러 죽어도 집에 간다고 하라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래서 다른 마음 안 먹고 꼭 내려오겠다고 다잡고 생활했죠. 그렇게 3개월을 지낸 거죠.

막연하던 억류 생활이 3개월가량 지속되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귀환 결정이 내려졌다. 귀환하던 날은 평소와 달랐다. 저녁 시간이 되자 선원들을 모두 버스에 태우더니 평양역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열차에 태워 원산으로 데려갔다. 새벽에 원산역을 빠져나오니 '원산여자전문대학'이라는 건물이 보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와 환영식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서씨 일행은 귀환한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북한 주민들이 납북 선원들을 환영해 주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저 견학 일정 중 하나겠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이 처음 서씨 일행이 잡혀 왔던 남애리 항구였다고 한다. 그곳에는 말끔히 수리된 금성호가 정박해 있었고, 금성호 안에는 가마니에 올려놓은 마른 명태들과 쌀, 술, 담배 등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금성호를 타고 나온 것은 1967년 3월 초순이었다고 한다. 한국 해역에서 만나 한국 경비정의 안내로 거진항에 입항한 선원 일행은 차량을 이용해 고성경찰서 2층 정보과 사무실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귀환한 다른 선박 선원들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경찰서 안에서 잘 때 창문에 성에가 생길 정도로 날씨가 추웠던 것으로 기억나요. 그곳에서 20~30명 정도 선원이 있었는데 대부분 명태잡이 배 선원들이었어요. 정보과 사무실이 넓었는데 그곳 바닥에 그냥 앉혀놓더라고요. 이불도 없이 그냥 맨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얼어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어요. 그런 상태에서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3~4일 조사받은 것 같아요.

고성경찰서에서 그렇게 며칠간 조사를 받고 나서 검찰청 조사를 받기 위해 속초검찰청으로 간 서씨는 검사실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검사실에 들어가니 검사 책상 앞에 명패가 있었는데 한글로 '김관옥'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검사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너무 무서워서. 다만 검사실에서 근무한다는 수사관이 나를 조사했어요. 나를 검사 책상 앞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혀 놓더니 처음에 몇 가지를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내가 본 대로 거짓 하나 없이 대답을 했죠.

그랬더니 그 수사관이 거짓말 한다면서 1미터가 넘는 사각 각목을 가져오더니 양쪽 어깨를 내리치더라고요. 아마도 내가 맞으면 덜 맞으려고 수사관을 껴안을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맞으니까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 후에 상체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더라고요. 등짝이 피가 다 터질 정도로 때리더라고요. 맞다가 결국 기절해버렸어요.

구타는 서씨가 기절한 뒤에야 끝났다고 한다. 서씨가 정신을 차려 보니 폭행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검사실 여직원(20대 중반가량)이 정신 차리라며 물을 떠다 주었다고 한다. 구타 후에는 별다른 조사가 없었다. 서씨가 정신을 차리자 여직원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검찰청 2층 계단을 내려오던 서씨는 통증과 어지러움 때문에 계단에서 넘어져 구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중에 검찰 조사가 끝나고 검찰청 계단을 내려오다가 쓰려졌어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옷이 젖은 느낌이 나서 옷을 여미려고 벨트를 푸는데 핏덩어리가 티셔츠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더라고요. 등짝이 전부 다 터져서 피가 범벅이 되었더라고요.

등의 상처 때문에 돌아오는 버스 의자에 등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아들의 상처를 본 어머니가 놀라시던 그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서씨의 기억에 남아있는 재판은 춘천에서 한 재판이라고 했다. 재판 전날 금성호 선원들 모두 함께 버스를 타고 춘천에 올라가 하룻밤 잔 뒤 다음 날 재판정에 출석했다고 한다. 검찰에서 당한 구타 때문에 법정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고 한다. 판사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저 마지막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사의 말만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재판 끝나고 지서에서 6개월 방위병 생활을 했어요. 납북귀환 어부들은 현역병으로 군에 보내지 않았거든요. 제대하고 나서는 결혼한 뒤 고향에서 살기가 어려워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부산에 처외삼촌이 수산진흥원인가의 청장으로 있었어요. 그분 소개로 다대포 목재주식회사에 들어가 목재 싣는 배를 타기로 했어요.

그런데 신원조회에 문제가 생겨 출항이 안 되더라고요. 결국 취업이 되지 않아 거제도에서 멸치잡이 배를 탔어요. 그곳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며 살았어요. 그러다 살기가 너무 어려워 다시 고향으로 올라갔어요. 운전을 배워서 거진에서 택시회사에 들어갔어요. 열심히 운전해서 돈을 착실하게 모아 작은 배를 하나 샀어요. 아내하고 둘이서 그 배를 타고 조개잡이를 하러 다녔어요.

그런데 애들이 커가면서 그렇게 벌어서는 애들 교육을 못 시키겠더라고요. 고향에서 경찰 감시도 심하고 해서 고향을 떠나기로 했어요. 그렇게 떠나 온 곳이 경기도 용인이었어요. 처음 와서는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양돈 축사 잡부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한 10년 했어요. 10년 동안 쉬는 날도 없이 축사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죠. 집에도 못 가고 축사에서 먹고 자면서 돈을 모아 집도 사고 애들 교육도 시켰어요. 그러다가 에버랜드 골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도 한 10년 일을 했어요. 지금은 그곳에서도 퇴직해서 공사장 막일을 해요.
 
경기도 용인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서씨.
 경기도 용인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서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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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과 손자들에게 미안

그는 납북귀환 어부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사회적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경찰의 일상적 감시는 기본이고, 서씨를 찾아오는 지인들까지도 조사를 받게 되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아픈 곳 하나 없는 아들이 현역병이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판정받은 것 역시 서씨 자신의 전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6년까지 지속되던 보안 관찰로 인해 여권, 비자마저 발급되지 않아 해외에 나갈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용인경찰서 대공과 사람들이 이따금씩 찾아오더라고요. 나하고 싸움을 몇 번 했어요. 왜냐하면 남의 집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 하는데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반말 찍찍하길래 나하고도 싸움을 몇 번 했어요. 그렇게 2006년도까지 찾아오더라고요.

정말 싫더라고요, 누가 찾아온다고 하면 겁부터 나는 거예요. 친구들도 안 만나고 술자리도 안 나가게 돼요. 말실수할까 봐. 지금도 자동차 관련으로 경찰서 교통과에 갈 일이라도 생기면 손이 막 떨려요. 경찰들이 차량번호 물어보면 차번호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려요.

서씨는 억울한 자신의 과거가 제대로 규명되길 바라지만 진실 규명이 된다고 해서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 있거나 원상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한편으로 별 기대가 없다고 한다. 다만 서씨로 인해 피해 받을지 모를 자식과 손자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이 배워서 사회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물을 먹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니 너무 속상합니다. 저를 처벌하고 때렸던 법관이나 검사를 보면 죽이고 싶을 정도예요. 일개 국민을 이렇게 짓밟는 것이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렇다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더욱 절망적입니다. 제발 지금이라도 제 과거가 올바로 잡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태그:#납북귀환어부, #원곡,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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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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