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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어촌계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김창옥씨
 거진 어촌계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김창옥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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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옥씨의 고향은 강원도 옥계 금진2리라는 곳이다. 비단결 같은 바닷빛을 가졌다 해서 '금진(錦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로부인이 등장하는 향가 <헌화가>의 길로 유명한 그 마을도 50~60년대에는 먹고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다. 김씨 역시 금진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중퇴한 뒤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미처 마치지도 못하고 주문진으로 나와 한 1년 살다가 다시 여기 거진으로 이사 왔죠. 거진으로 와서 아버지는 명태잡이 배를 탔는데, 저는 아버지가 명태잡이 할 때 같이 바닷가에 나가서 그물 손질하는 일을 하면서 가사 일을 도와야 했어요.

우리 형제가 6남매인데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자식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형제가 다 그렇게 일을 해야 했어요. 지금은 맨 위에 형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그 밑에 넷째는 집안이 어려우니 약을 먹고 죽어버렸어요."

김창옥씨가 처음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오징어 배부터였다고 한다. 김씨 나이 18살이었다. 처음 탔던 오징어 배는 주로 연안에서 작업하던 소형 선박이었다. 저녁에 출항해 밤새 밝은 등불이 켜진 배에서 오징어를 잡다가 다음 날 새벽이 되면 다시 거진항으로 돌아오는 작업이었다.

밤새 작업한 뒤 집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이고 오후가 되면 다시 도시락을 준비해 오징어 배를 타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오징어 배 조업을 하던 김씨는 1967년 겨울에 처음으로 명태잡이 배였던 순광호를 탔다고 한다.
 
"순광호를 탄 건 납북될 때 처음 탄 거에요. 순광호를 처음 타고 조업해서 나가 바로 납북된 것이죠. 그때가 67년도 11월 3일 납북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26일 돌아왔어요. 두 달가량 있었던 것 같아요."

1967년 12월 27일 자 <경향신문> 기사는 "지난 11월 3일 동해어로저지선 근해에서 북괴에 납북됐던 어선 11척과 선원 65명이 26일 하오 1시경 휴전선을 넘어와 53일간의 억류 끝에 자유를 되찾았다. 이날 돌아온 거진항 소속 금창호 등 어선 11척은 휴전선 근해에서 우리 해군 83함 708정과 63함으로부터 간단한 검색을 받고 26일 하오 11시쯤 거진항에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여러 척이 같이 잡혔어요"

당시 순광호는 선장 장득실을 비롯해 8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김씨는 납북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순광호는 명태잡이 배로 연안에서 주로 작업했는데, 작업할 때 조금 북쪽으로 올라간 상황이었나 봐요. 그때 같이 작업하던 배들이 꽤 많았는데 그물 작업하던 배는 안 잡혀가고 낚시질로 고기를 잡던 배만 잡혔어요. 순광호 말고도 여러 척이 같이 잡혔어요.

'까질이'라는 이북 쾌속정이 쏜살같이 오더니 선장만 놔놓고 우리는 배 칸 안에다가 다 밀어 넣더라고요. 그리고는 곧장 우리 배를 끌고 이북으로 가더라고요. 순광호가 목선 동력선인데 속도가 5노트 정도밖에 안 나가는 느린 배예요.

'까질이'가 다가와서는 총을 들고 위협하더라고요. 그때가 막 해가 뜨고 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우리 배 시동을 끄게 하더니 끌고 올라가더라고요. 그때 선원들이 한 8명 정도 타고 있었어요. 들어가 보니까 큰 힝구가 아니라 작은 어촌 마을 같은 곳의 항구로 가더라고요."

북한군은 어두워질 때까지 항구에서 머물게 한 뒤, 캄캄한 어둠을 이용해 선원들을 배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미리 대기해 있던 트럭에 선원들을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명을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침을 먹었는데 나중에 원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함께 납치되었던 선박의 선원 모두가 함께 이동했다고 한다.

식사가 끝나자 선원 모두를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한참을 데려갔는데, 도착한 곳은 바로 평양이었다. 선원들이 도착한 곳은 휴양지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 건물에 선박별로 나뉘어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이 제공하는 누빈 옷으로 갈아입게 하더니, 선원들이 입고 왔던 옷은 모두 북한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했다.
 
"평양에 간 뒤로는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어요. 김일성 생가라는 곳도 데려가고, 농촌 같은데 데리고 가서 협동농장 같은 곳을 보여주더라고요. 많이는 다니지도 않고 그렇게 몇 군데만 다녔어요. 휴양소 내에 여관 같은 곳에 있으면서 북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강의 같은 것도 들어야 했는데 아주 지루했어요. 그런데 선원들이 개별적으로 따로 불려가서 교육을 받거나 한 것은 없었어요."

김씨가 납북되어 북한에서 억류 생활을 한 지 두 달가량 되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선원들을 차에 태웠다고 한다. 선원들을 태운 차량이 도착한 곳은 납북되어 처음 도착한 작은 어촌마을의 항구였다.

그곳에서 환영회가 열리고 환영회가 끝나자 선원들 모두 각자 타고 온 선박에 승선하게 한 뒤 남한으로 귀환되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김씨는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기쁨에 당시 어떻게 남한으로 내려왔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한국 해경의 안내를 받으며 거진항으로 돌아왔다. 거진항으로 돌아온 김씨 일행은 항구를 가득 채운 가족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선원들 모두는 곧장 준비되어 있던 차량에 탑승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말 한번 나눠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라도 사과받고 싶다
 
지난 1월 진실화해위원회로 부터 받은 조사개시결정문.
 지난 1월 진실화해위원회로 부터 받은 조사개시결정문.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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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들은 간성에 위치한 고성경찰서 1층에 수용되어 첫날부터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경찰들의 주요 질문은 '북한에서 머물며 받았던 특별교육의 여부, 특수지령 수수 여부' 등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나 지령을 받은 사실이 없는 김씨로서는 그러한 혐의에 대해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가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더욱 거칠게 조사했다고 한다.
 
"지령을 안 받았다고 하니까 경찰들이 거짓말 같다 하면서 때리더라고요. 경찰들이 욕도 하고 구타를 하더라고요. 바로 이야기 안 한다고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구요.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거짓말하냐고 욕을 막 해요. 우리 선원들은 한 5일 조사를 받았고, 선장 기관장은 속초 같은 데 가서 조사를 더 받았어요. 속초에 가서 검사한테까지 조사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나마 선원들은 재판받고 금방 풀려났는데 선장은 더 오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씨는 당시 경찰, 검찰의 조사과정과 재판과정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워낙 무섭고 공포스러운 경험이었고, 50년이 넘은 일을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 수사기관의 조사가 끝나고 재판을 거쳐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집에 왔지만, 다른 납북귀환어부들과 마찬가지로 형사들의 감시가 시작되었다.

형사들은 수시로 집과 이웃들에게 접근하여 김씨의 행적을 집요하게 물었다. 혹시나 북에서 받은 지령을 수행하는 것은 아닌가, 간첩행위를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에서 지속된 감시였다. 그러한 감시는 군 복무 시절에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군에서 휴식 시간에 사병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씨는 북에 다녀온 경험을 말했다. 북에 대한 실상을 이야기하며 북은 살 곳이 못 된다는 취지로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사단 보안대에서 김씨를 연행해 며칠간 감금한 채 강압 조사를 했다고 한다. 북한 이야기를 한 경위를 추궁당하며 북한의 지령에 의해 말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며칠간의 조사가 끝난 뒤 김씨는 복무하던 부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후방사단의 교육대로 재배치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의심은 김씨의 감시에서 그치지 않고 그와 접촉하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조사로까지 이어졌다.
 
"주변에는 항상 경찰이 있었어요. 아내가 결혼 전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했는데, 그 집 주인이 거진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하루는 거진 지서에서 놀러 온 사람들 전부를 잡아가서 조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냥 제가 살고 있는 집에 놀러 왔다는 이유에요. 조사해도 아무런 혐의가 없으니까 하루 꼬박 조사받고 풀려났어요. 그렇게 감시가 심했다고요."

그의 피해는 감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이전, 여행의 제한까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동갑계라고 있었어요. 마을에서 같은 나이 친구들끼리 만든 계였는데, 거기서 태국 관광을 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저만 여권이 안 나오는 거예요. 저는 당연히 내가 납북귀환어부라서 안 나온다고 생각하고 말았죠. 그런데 친구 중 하나가 국정원에 전화해서 항의를 했어요. 그랬더니 며칠 있다가 여권이 나왔다고 찾아가라 하더라고요. 그게 2010년 정도였으니까 아주 최근까지 그런 제한을 받고 산 거죠."

김씨에 대한 감시는 2000년 들어서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작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였고, 최근 김씨의 납북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는 '조사개시결정'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늦었지만 이제라도 납북귀환 후 정부로부터 받은 인권침해와 공안당국으로부터 받은 차별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태그:#납북귀환어부, #원곡,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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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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