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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국, 이중화, 윤병호, 최현배, 김양수, 정태진, 정인승, 서민호, 권승욱, 이병기, 김윤경, 이석린, 정열모, 장현식의 모습이 보인다.
▲ 1949년경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인사들 신윤국, 이중화, 윤병호, 최현배, 김양수, 정태진, 정인승, 서민호, 권승욱, 이병기, 김윤경, 이석린, 정열모, 장현식의 모습이 보인다.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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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장소)을 잘못 만난 '이무기'는 승천하지 못한다 했던가.

인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 때(시기)가 추가된다. 암울했던 시기, 척박한 풍토에서 신념을 지키며 정의로운 삶을 살기는 무척 힘겨운 상황이었다.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과 우수한 두뇌, 일본과 미국 유학, 항일독립운동, 이승만과의 인연, 그리고 군사독재자가 탐내는 명성, 이같은 형편이면 권력의 휘하에서 호의호식하고 축재하면서 자식들 해외유학 보내고 자자손손 세습하여 기득권의 양지에 견고한 울타리를 치고도 남을 여건이었다. 실제로 그렇지 못한 자들 중에도 '기득권 양지족'이 수없이 많았다.

그가 정계를 은퇴하고 통일문제 연구에 생애의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있을 적에, 한국은 유신체제라는 폭압 권력이 구축되고,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야당후보 김대중을 도쿄에서 납치하는 등 야만통치가 자행되고 있었다.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태생인 월파 서민호 선생, 사진 하단 우측은 그의 형님이 살았다는 집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태생인 월파 서민호 선생, 사진 하단 우측은 그의 형님이 살았다는 집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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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이래, 꿈꾸고 가꾸었던 민주주의가 뿌리채 짓밟히고 있었다. 은퇴한 노정객이지만, 삶의 가치가 무너지는 듯한 아픈 현실이었다. 1974년 1월 8일 정부는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논의를 금지하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민주인사들이 끌려가고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재판하였다. 1952년 6월 자신이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영남고등군법회의로 이관되어 재판을 받았던, 20여 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고 정치상황은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서민호는 1974년 1월 24일 1시 30분 심장마비로 고려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71세, 당시의 평균수명으로는 짧은 생은 아니지만 여러 차례의 옥살이 기간을 빼면 장수한 것은 아니었다. 타계하기 며칠 전 측근에게 "내 소원은 조국통일을 보고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하였다. 유언이 된 셈이다. 
 
월파 서민호 선생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었다.
▲ 월파 서민호 묘역 월파 서민호 선생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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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 신문의 비중있는 부고 기사다.
"타계한 월파 서민호씨, 정계의 거목 불굴의 투사"란 제목을 달았다. 

최근 항일 독립운동에서 몸을 일으켜 해방 후 정계에 투신했던 거성들이 하나 둘 떨어져가는 가운데 24일 월파 서민호 선생이 또 세상을 떠났다. 이같은 거성들의 잇단 별세는 한 시대의 막이 서서히 내리고 있음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월파선생은 한국정치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불굴의 투사였다. 청년시절에는 항일운동에 투신,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였고 해방 후엔 야당 생활로 일관하면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반골정치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보성중학 3학년 학생이던 그는 시위군중의 앞장에 서서 일본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기마대가 앞길을 가로막자 일경이 타고 있던 말의 뒷다리를 힘껏 차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길을 트고 앞으로 진출한 용맹스런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3.1운동 당시 <반도목탁지>사건으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후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 웨슬리안대 및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일정하의 조국에 돌아온 그는 남서무역회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어학회에 자금을 대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해방과 더불어 전개되기 시작했다. 전남지사를 거쳐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월파는 6.25동란의 부산피난 시절에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자유당정권의 비정을 파헤쳐 폭로하여 정계를 뒤흔들었다. 당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타협을 모르는 반독재투쟁 자세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52년 순천의 평화여관에서 서창선(徐昌善) 육군대위를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 일어나 그는 현역의원의 몸으로 구속됐다. 

"내가 만일 4.19 후 과정 수반 같은 지위에 있었다면 이 박사를 하와이로 망명시키지 않고 일반과 똑같이 법으로 취급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하와이 망명 중인 이 박사가 고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하자 인간적인 동정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월파는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처럼 무섭게 덤벼드는 성미였으나 약자에게는 한없이 물러서는 온후한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4.19로 영어(囹圄)에서 풀려나온 그는 언제나 "내 남은 목숨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하면서 4.19정신을 정치의 신조로 삼아왔다고 한다. 단련된 체력의 소유자로 늘 스틱을 짚고 다니는 그는 제5대 민의원에서 부의장을 지냈고 5.16 후에는 6.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언제나 풍운을 몰고 다닌 정치생애를 마쳤다. 그는 여느 보수정객과는 달리 시대의 흐름에 민감해서 남북교류를 처음 제창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과감히 제시했으며 한일협정 비준파동 때는 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야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와중에서 당적을 자주 옮겨 자민당 최고위원, 민중당 최고위원, 대중당 당수를 역임했다. 그와 친분이 두터운 한 야당정치인은 "월파는 고집이 센데다가 자기중심으로 매사를 이끌어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라 자주 당적을 옮긴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투사였던 월파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에서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67년 야당 단일대통령 후보에 대한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대통령후보를 선선히 사퇴했고 71년 선거 때도 신민당후보 김대중씨를 지지, 자신의 물러날 시기를 찾을 줄 아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작년 1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사재를 털어 '통일연구협회'를 창설, 만년을 통일문제의 연구와 계몽에 몸 바쳤다. 그는 타계하기 며칠 전 측근에게 "소원은 조국통일을 보고 죽는 것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튼 항일운동과 반독재투쟁에 파란많은 한 생애를 바친 풍운의 노정치인이 그의 소망인 조국통일의 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은 월파 한 사람만의 슬픔이나 한 만은 아닐 것이다. (주석 1)


주석
1> <동아일보>, 1974년 1월 25일, 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 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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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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