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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우리나라 수도권에는 총 9개의 전철 노선이 있다. 8개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1개는 다르다. 어딜까. 1호선이다. 1호선만 좌측통행을 하고 나머지는 우측으로 운행한다. 왜 그럴까. 1호선은 국가철도의 연장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철이 좌측통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가 한반도에 철로를 깔 때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자동차와 기차는 물론이고 사람의 보행도 좌측으로 통행하게 설계되어 있다.
  
수도권에는 총 9개의 전철 노선이 움직인다.
▲ 수도권 광역전철 노선도 수도권에는 총 9개의 전철 노선이 움직인다.
ⓒ 서울교통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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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좌측통행을 할까.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구미의 선진문물을 배우려고 백여 명의 사절단을 꾸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12개 나라를 순방했다. 2년여에 걸친 긴 순례를 마친 사절단은 귀국 후 일본에 적용할 수 있는 제도를 고민했고, 국가 운영체계(입헌군주제)는 독일 모델을, 도로 운영방식은 영국 모델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이 좌측통행을 하는 이유는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차는 로마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다. 당시에도 대다수 병사는 오른손잡이였고, 왼쪽으로 움직여야 오른손에 창을 들고 싸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왜 좌측통행을 하지 않는 걸까. 나폴레옹(Napoléon) 때문이다.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무릎을 꿇은 후, 무엇이든 영국의 풍습과 반대로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역사는 우리 곁에 살아 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모두 과거의 산물이다. 지나온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바로 볼 수 있고, 그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많은 이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하지만 영화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향이 있고, 이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와 지식이 주입되기 쉽다.

명성황후를 인자한 국모(國母)로 미화하거나 근대 일본 사무라이들을 형편없는 악인(惡人)으로 형상화하는 게 대표적이다. 구한말, 중전 민씨(閔氏)와 그 일파들이 매관매직과 사치 향락을 일삼으며 어떻게 국정을 농단했는지는 많은 사료가 증거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하급 무사 출신들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유학을 배운 지식인 집단으로 봐야 한다. 이들이 일본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
 
1995년에 초연된 창작 뮤지컬이다.
▲ 뮤지컬 명성황후 25주년 기념공연 포스터 1995년에 초연된 창작 뮤지컬이다.
ⓒ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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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모두 악(惡)이고 우리는 무조건 선(善)이라는 일차원적 접근법으로는 지나온 역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선악의 틀에 역사를 가두면 진실이 사라진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씨줄과 날줄이 서로 얽혀 그물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역사 생태계 안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사건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날 것 그대로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기초 위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입각한 관점과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한국과 일본의 근대 역사를 설명하는 틀은 크게 두 줄기가 존재한다. 하나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점령해 식민지로 만든 후, 조선인들을 착취 억압하고 이 땅의 자원을 약탈해갔다는 것(수탈론)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개발 정책으로 인해 나라 경제가 성장했고 의료 기술이 도입돼 사망률이 감소하는 등 산업발전과 근대화를 촉진했다는 해석(근대화론)이 그것이다.

역사 연구자가 아닌 사람이 이 주제를 논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다. 분명한 것은 일제가 우리의 자주권을 빼앗고, 우리 것을 수탈하고,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어느 만큼의 성장과 퇴보가 이루어졌는가, 라는 주제는 본질이 아니다. 무력으로 한반도를 침략해 자기들 멋대로 이 땅을 식민화(植民化)한 행위는 어떤 명분과 이론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행위일 따름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부합하는 통계자료나 연구논문이 발표되면 일본 보수신문들이 보란 듯이 지지 논평을 내놓는다.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 '조선은 스스로 자멸했을 뿐,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면,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수탈론과 근대화론 사이, 친일과 항일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이 벌인 침략을 정당화하고 역사를 왜곡한다.
  
지난 1월 31일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1923년)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국회에서 열렸다.
▲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식 포스터 지난 1월 31일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1923년)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국회에서 열렸다.
ⓒ 시민모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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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원적인 감상주의에 빠져 역사를 단순화해선 안 되지만, 일제에 의해 이 땅의 역사가 어떻게 비틀리고 더럽혀졌는가를 망각해선 안 된다. 일본인에게 메이지 시대가 자랑스러운 것처럼, 우리에게도 빛나는 독립투쟁의 역사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대척점에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이 서 있고, 요시다 쇼인의 대척점에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서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름 없는 영웅들의 발자취를 기억해야 한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젊은 무사들은 칼 대신 책을 잡았지만, 식민지 시대 조선의 의사(義士)들은 책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저들은 제국주의 이념에 빠져 아시아를 침략하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조선의 젊은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독립 만세를 외쳤고,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이것이 야만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간 선열들의 역사이고 시대정신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상처는 참혹하다. 1938년∼45년 기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징용자는 5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한국동북아논총, 2015). 실제로 몇 명이 끌려갔고 또 몇 명이 살아서 돌아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조선인 수가 8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2020년)한 바 있다. 
 
Memorial Hall of the Victims in Nanjing Massacre by Japanese Invaders.(19371213.com.cn) 중국 장쑤성 난징시에 있으며, 300000은 당시 희생된 난징시민 수를 나타낸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입구에 새겨진 숫자 Memorial Hall of the Victims in Nanjing Massacre by Japanese Invaders.(19371213.com.cn) 중국 장쑤성 난징시에 있으며, 300000은 당시 희생된 난징시민 수를 나타낸다.
ⓒ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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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일본으로 인해 고통받은 아시아인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군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만 2500만 명이 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중국 사람들이 치를 떠는 난징대학살 사건(1937년)으로 희생당한 사람만 최소 12만 명∼최대 35만 명에 이른다.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학살(1945년)로 12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전범국가의 국민 또한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었다. 2차 세계대전 중 국외에서 사망한 일본인은 군인, 민간인을 포함해 총 240만 명에 이른다.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최소 15만 명∼최대 25만 명이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수치와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일본은 이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얻었을까.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최근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전범 기업의 불법행위 책임을 모두 떠안고 나중에라도 변상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한국 정부가 결정하면 반성과 사과를 검토할 수 있다'(교도통신/2023.1.28.)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일본 정부는 전쟁 책임에 대한 배상이나 사과를 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극우 세력이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한, 앞으로도 이 입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애국열사들이 목숨을 던져 싸워온 독립투쟁의 역사를 물건 흥정하듯 돈 몇 푼에 팔아넘기려는 자들이 이 땅에 기생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웃 나라를 적으로 돌릴 것인가, 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선현들의 영정에 침을 뱉는 자들이 있다. 다른 이념과 사상을 좇았다는 이유로 독립의 영웅들을 폄하하고 어둠 속에 가두어두려는 자들이 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해방 이후, 일제의 편에 서서 부역했던 자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역사의 심판대에서 단죄(斷罪)되었나. 그들이 축재(蓄財)한 재산은 몰수되었는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곤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에 친일파의 후예들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나. 일제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잔재들은 청산되었는가. 다시금 진지하게 이 질문들을 던져봐야 한다.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한국과 일본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설문조사(2020. 8월)에 따르면, 일본 시민 중 한국에 대해 호감을 표시한 응답자 비율은 10.8%에 불과했고, 그렇지 않다고 답한 응답자는 56.7%였다.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에 대해서도 '그렇다(11.1%)'보다 '그렇지 않다(51.4%)'로 답한 시민이 훨씬 많았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비호감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떨까. 한국 시민 중 일본에 대해 호감을 표시한 응답자 비율은 15.0%였고, 그렇지 않다고 답한 응답자는 64.2%였다. 일본인에 대한 호감도에 대해서는 '그렇다'가 17.5%, '그렇지 않다'가 48.6%였다. 우리 역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부정적인 관념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나라와 시민들 사이에 거대한 불신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깊은 골을 메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자는 말한다. 지난 과거는 잊자고, 언제까지 서로 적대하며 살아갈 거냐고, 이제 발전적인 미래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때라고. 맞는 말이다.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해가야 한다. 하지만 꼬인 매듭을 푸는 출발점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덮고, 감추고, 잊는 걸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그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두 나라는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간토(關東)대학살이 벌어진 지 100주기가 되는 해다. 1923년 일본 간토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치안 당국과 언론의 유언비어(조선인 폭동설) 유포와 방관으로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끔찍하게 학살됐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당시에도 사건을 숨기는 데 급급했고, 지금까지도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보수우익들은 반한(反韓)정서를 지렛대 삼아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독도 망언, 역사 교과서 왜곡, 위안부 부정, 강제동원 배상 떠넘기기 등 도발 행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런 태도에 대해 미온적이고 수동적인 대처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해방 이후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루지 못한 후과(後果)를 치르는 중이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할지 모른다.
 
구글지도 편집 (후쿠오카, 야마구치, 가고시마, 사가 등 총 5개 현을 방문했다)
▲ 근대 일본의 뿌리를 찾아서 : 탐방지 구글지도 편집 (후쿠오카, 야마구치, 가고시마, 사가 등 총 5개 현을 방문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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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하기, 가고시마, 가라쓰, 이마리, 구마모토, 시모노세키를 돌며 근대 일본의 뿌리를 살펴보려 했던 탐방길은 뜻깊은 시간이었다. 유적지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들과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마주하며 '일본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정갈한 음식은 입맛을 돋게 했으며, 거리는 깨끗했다. 국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을 숭배하는 모순된 이중성이 어디서 발원하는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인에게 일본다움이 있다면, 한국인에겐 고난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높은 기상,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정신이 깃들어있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갈 일이다. 언제든 이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멋진 온천과 맛난 음식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환한 미소로 입꼬리를 올리고,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치며 멋진 기념사진을 찍어보시길 바란다. 
 
극중, 데라우치 조선 총독과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기 위해 모인 독립군 셋이 의열단장 김원봉의 제안에 따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 영화 "암살(2015)"의 한 장면 극중, 데라우치 조선 총독과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기 위해 모인 독립군 셋이 의열단장 김원봉의 제안에 따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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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일본 근대의 뿌리를 찾아서, #시민모임 독립, #난징대학살, #간토대학살,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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