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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기자말]
시모노세키(下關)는 야마구치(山口)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다. 일본 본토와 규슈 사이, 일본의 수에즈라고 불리는 간몬(關門) 해협에 있다. 이 좁은 길로 들어서면 규슈섬을 돌아 멀리 우회하지 않고도 본토에 닿을 수 있어서 오래전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1905년)에 부산과 이곳을 연결하는 항로가 개설되면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 이쪽저쪽으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해방되던 해까지 40년간 이 연락선을 탄 승객 수가 3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조선에서 징발한 곡물과 강제 징용된 사람들이 이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유입됐을 것이다. 아시아 대륙 정벌을 도모하던 일제는 한반도를 관통해 만주,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철로를 구상했고 따라서 일본 본토와 부산을 잇는 뱃길을 여는 것이 중요했다. 시모노세키는 동아시아 침략의 입구였던 셈이다.

항구 인근에 가라토(唐戶) 시장이 있다. 갓 잡은 생선으로 만든 싱싱한 초밥을 먹을 수 있어서 한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시장 건너편에 벽과 기둥을 빨간색으로 칠한 궁이 보인다. 아카마(赤間) 신궁이다. 에도시대, 조선의 통신사(通信使) 일행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는 오사카(大阪)로 가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후쿠오카현이다.
▲ 아카마 신궁에서 바라본 간몬(關門)해협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후쿠오카현이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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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마 신궁 옆에 '춘범루(春帆樓)'라는 음식점이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를 불러들여 강화협상을 한 장소다.

승전국 대표 이토 히로부미와 패전국 대표 이홍장(李鴻章)이 이곳에서 복어를 먹으며 전후 처리를 위한 협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복어는 시모노세키의 상징이다. 일본에서 소비되는 복어의 약 팔 할이 여기서 잡힌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패권이 청에서 일로 넘어가는 분기점인 시모노세키조약(1894년)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열린 장소로, 복어요리 전문점이다.
▲ 춘범루 입구 간판 시모노세키 조약이 열린 장소로, 복어요리 전문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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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섬겨온 대륙의 큰 나라가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참히 깨지는 일대 사건을 지켜보며 조선 조정은 '멘붕'에 빠졌을 것이다. 지배층의 탐학과 수탈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선 제 나라 백성들을 외국 군대의 총칼로 진압하려 한 부패한 정부. 세계사적 변화에 조응할 능력도, 백성의 삶을 보살필 생각도 없었던 한심한 왕조는 속절없이 무너지며 마침내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

고종 황제와 메이지 천황은 동갑내기(1852년생)다. 둘 다 어린 나이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지만(고종은 12살, 메이지는 15살이다), 한 사람은 극동 변방의 작은 나라를 제국의 반열에 올린 지도자로, 한 사람은 조국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가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시킨 나약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두 사람이 살았던 때가 야만과 폭력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복어요리 전문점 춘범루 바로 옆에 시모노세키 강화기념관이 있다. 정식 이름이 일청강화기념관(日淸講和記念館)이다. 기념관 입구에 영어와 일어, 한글로 써진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의 독립을 확인했다. 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 말은, 조선 병합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마침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제1조에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일청강화기념관 내에 전시된 시모노세키 협약서  제1조에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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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본의 우익들은 조선의 독립일이 1945년이 아니라 1894년이라고 말한다. 미개한 조선을 청의 지배로부터 해방해 문명국으로 이끈 나라가 일본이고, 그 시발점이 시모노세키조약이라는 주장이다. 불과 11년 후에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자들이 독립을 확인했다니,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강자의 논리, 제국주의의 수사는 이렇듯 교묘한 언어로 포장돼 있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기 30년 전, 이 일대에서 서구열강의 연합 함대와 조슈번(長州藩, 현 야먀구치현) 해군과의 전투가 벌어진다. 해협을 지나던 열강들의 배를 향해 대포를 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가 연합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시모노세키 전쟁(1864년)이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해안포대는 쑥대밭이 되고 싸움은 싱겁게 끝난다.

강화기념관에서 가까운 해안가에 조슈번의 해군이 사용한 포대가 여럿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포들은 모두 망가지고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육중한 대포들이 해협을 향해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160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전쟁의 상흔은 발견할 수 없다. 포탄이 오가던 싸움터는 관광 명소로 바뀌었다. 관광객들이 포대 주변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뒤에 보이는 다리가 간몬(關門)대교다.
▲ 간몬해협 바닷가에 설치된 조슈포대  뒤에 보이는 다리가 간몬(關門)대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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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서양 열강과 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일본은 열강이 보유한 강력한 군사력을 보았고, 이들과 맞서려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은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먼저 무기력한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존왕도막(尊王倒幕) 운동으로 전환된다. 구체제 전복의 봉화가 오른 것이다.

그리고 10년 뒤, 일본은 자신들이 열강에 당했던 방식 그대로 군함을 몰고 조선 땅을 침범한다. 한반도 침략의 서막인 운요호 사건(1875년)이다. 조선 군대와의 교전을 도발하기 위해 강화도에 정박한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조슈번이 만든 배다. 조선의 빈약한 군사력을 눈으로 확인한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강요한다. 부산 외 두 곳(원산, 인천)의 항구를 개방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무관세 무역과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강화도 조약(1876년)이 체결된다.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이 대포를 앞세워 개항을 압박하고 체결한 조약(미일수호통상조약, 1858년)의 복사판이다. 무력을 동원한 강제 개항과 불평등조약 체결이라는 제국주의의 문법을 똑같이 적용한 것이다. 조선의 빗장이 무기력하게 열리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채 20년도 되지 않은, 이 짧은 시기 동안 일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세상을 향한 문을 걸어 잠근 채 안에서 썩어가던 조선 왕조와 달리, 일본은 유신(維新)을 통해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함으로써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시대 전환의 갈림길에서, 구체제의 반발과 저항을 극복하고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빠른 산업화 과정을 통해 근대국가를 수립한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메이지 시대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속내는 복잡하다. 우리보다 나은 게 없어 보이는 섬나라 사람들이 이루어낸 업적을 애써 평가절하하기도 하고 동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의 무능함에 질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본이 제국주의 이념에 빠져 한반도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오랜 기간 우리 민족을 억압, 수탈했으면서도 반성은커녕 역사 왜곡을 자행하는 모습은 한국인의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시모노세키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총리의 정치적 고향이다. 부친인 아베 신타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의회에 진출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세습이 이루어진 정치 가문 출신이다. 일본인들은 정치를 가업(family job)으로 생각한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당을 아들이 이어받는 것처럼, 정치인의 자식이 대를 이어 정치라는 업(業)에 종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생전에 아베는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기시는 1936년부터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에서 산업 행정을 수행한 바 있고, 태평양 전쟁 때는 상공 대신으로 전시물자 동원을 지휘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제 패망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실형을 살았지만, 1957년에 총리대신(수상)으로 부활한 인물이다. '쇼와(昭和)의 요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는 1958년 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된 이래 내리 11선을 한 거물 정치인이다. 세 아들 중 둘째인 아베 신조에게 가업을 물려주기로 하고 어릴 적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정치를 몸에 익히도록 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신념 이면에 극우 사상이 자리하고 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정한론의 원조 요시다 쇼인과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죠슈번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일본에는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거 투표율도 우리와 비교해 현저히 낮다. 일본인들은 정해진 교본(敎本)과 질서를 중시하고 위에서 내린 결정은 따라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지배권력을 상대로 한국의 촛불 항쟁 같은 싸움을 만들지 못한다. 이런 토양은 보수우익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일본의 정치 지형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하는 이유다.

역사에 비약은 없다는 말이 있다. 지나온 역사가 오늘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내일로 이어진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누군가의 말처럼, 가해자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먼저 손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한국과 발전적인 동반자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때, 두 나라의 역사는 비로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좁은 해협 사이로 컨테이너 상자를 가득 실은 배들이 쉼 없이 오간다. 항구를 떠난 배가 세토(瀬戸) 내해로 가면 일본 본토고 동해로 빠지면 한반도다. 두 바다가 이곳에서 만난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는 자매도시다. 코로나로 닫혔던 뱃길이 열리면서 국제여객선이 매일 두 도시를 오간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얽혀있다. 시모노세키는 조선인의 애환과 향수가 깃든, 슬픈 도시다.

태그:#일본 근대의 뿌리를 찾아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시모노세키조약, #조슈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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