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는 생각인데 3만원권 지폐가 나오면 좋을 듯싶다. 만 원권에서 오만 원권은 점프의 폭이 너무 크다. 1, 3, 5, 10으로 올라가는 한국인 특유의 감각을 생각해보면, 3만원권 지폐는 필시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가수 이적씨가 올 초 자신의 SNS에 올린 '지폐'라는 글이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이를 입법하겠다는 정치인도 등장했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이다. 하 의원은 설 연휴 직후 3만원권 발행 촉구 결의안을 발의하겠다면서 "한국은 축의금 부조 단위가 1, 3, 5로 커지기 때문에 3만원권이 적합할 것 같다. 1만원 세뱃돈은 좀 작고 5만원은 너무 부담되는 국민들이 대다수 일 것"이라며 발의안의 배경을 설명했다.
현금 사용 않는 사회인데... 3만 원권 발행?
한국의 축의금 문화를 고려하면, 가수 이적씨의 제안대로 3만원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의견이 큰 공감대를 얻었다고 해서 헌법기관이라고 불리는 국회의원이 아무런 고민 없이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생긴다. 더군다나 현금 사용을 지양하는 오늘날에는 더욱더 말이다. 하태경 의원에게 묻고 싶다, "의원님께서는 현금을 얼마나 사용하십니까?"라고.
작년부터 서울 시내에는 '현금 없는 버스'라는 간판을 단 버스들이 운행중이다. '현금 없는 버스'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서울시는 시내버스 회사가 현금수입금 관리 비용으로 연간 약 20억을 지불하는 것으로 추산했는데, 실제 현금을 내는 비율은 작년 5월 기준으로 0.6%에 불과했다고 한다. 현금 내는 탑승객 0.6%를 위해 연간 20억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었다.
현금을 사용하는 빈도는 최근 핀테크 산업이 발전하면서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다. 요즘에는 지갑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현금을 두둑하게 넣고 다녔던 장지갑은 어느새 카드지갑으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카드지갑마저 자취를 감췄다. 핸드폰 하나면 교통, 식당, 마트 등에서 결제는 물론이거니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n분의 1로 나눠 결제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현금을 사용할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로또나, 축의금 정도일 것이다. 이마저도 코로나 시국 중 모바일 청첩장·온라인 계좌 확산으로 인해 현금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2016년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coinless society)' 시범 검토를 발표했다. 동전 제조 비용이 500억을 넘고, 사회 전체가 지불하는 비용이 수천억인 반면 동전 사용은 불편하고 유지 비용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또 한국은행은 작년 '2022년 은행권 유통 수명 추정 결과'를 발표했는데 1만원권 유통 수명은 135개월로 전년 대비 4개월, 5만원권 수명은 181개월로 3개월 늘었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은 지폐 수명이 늘어난 원인으로 '현금 사용 빈도 저하', '온라인 거래 활성화'를 꼽았다.
3만 원권 발행에 대해서도 한국은행은 일단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졌다. 설 연휴 기간 3만 원권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지만, 한국은행이 작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3만 원권에 대한 수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24일 <파이낸셜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국은행 관계자는 "3년마다 국민을 대상으로 화폐 사용 만족도 조사를 한다"면서 지난해 조사에서는 "고액권(10만 원권)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는 의견이 일부 있었지만, 2만 원권이나 3만 원권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지폐 제조엔 막대한 비용 들어... 차라리 노인 세대 도울 기술 만들면 어떨까
현금 사용률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새로운 지폐를 만들자는 하태경 의원의 주장은 다소 시대착오적이다. 정치는 과거의 제도를 고수하기보다 변화하는 미래를 쫓아야 한다. 현금의 미래는 뚜렷하게 '종말'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지폐의 발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폐 발행 비용부터, ATM·자판기 수정 및 대체 비용까지 최소 수백억에서 수천억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현금 없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버스요금 현금 사용률 0.6%', '동전 없는 사회', '지폐 수명 연장'은 우리 사회가 현금 사용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현금 없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
1661년 세계 최초로 현금 지폐를 발행한 스웨덴은 지난 2016년 '현금 없는 사회'를 선언했다. 스웨덴에서는 노숙자 자활을 돕는 <빅이슈> 판매원도 카드 리더기를 들고 다니며, 교회 헌금도 모바일로 낸다. 2016년부터 스웨덴 카페 곳곳에서는 현금을 받지 않는다는 간판이 달렸다. 현금이 사라지자 모바일 기기들의 등장과 함께, 이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세대들의 불편이 증가했다.
우리나라도 키오스크 도입, 은행 폐쇄 등으로 노인세대는 간단한 커피 주문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 연간 동전 발행에는 500억, 지폐 제조에는 900억의 비용이 발생했다고 한다. 차라리 이 비용을 노인세대가 모바일 기기를 좀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을 만드는 데 투자하면 어떨까? 그러면 일자리가 증가하는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현금 없는 사회'는, 지하경제로 흘러가는 검은 돈을 줄일 수도 있다. 현금은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 지하경제에서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반면 모바일 거래는 전부 기록이 남기 때문에, 소위 '현금 없는 사회'는 지하경제 활성화를 막는 장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세뱃돈 부담감 축소라는 소수의 편익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려는 건 대단히 비경제적이라고 본다. 세상은 현금 없는 사회로 더욱 가속화 하고 있다. 지금 정치에 필요한 건 3만 원권 발행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현금 없는 사회를 대비할 것인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성윤씨는 미래당 서울시당 대표입니다. '정치권 세대교체'와 청년의 목소리가 의회에 좀 더 반영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2016년 12월 청년정당 미래당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고, 2017년에는 만 23살의 나이로 1기 공동대표를 맡았습니다. 4차 산업으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기성 정치인의 정치 문법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상상력을 더함으로써 미래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