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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섬을 떠나 저는 베트남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노이는 6년 만의 방문이고, 베트남 전체로 따지면 5년 만의 방문입니다. 베트남과는 이상하게도 자주 인연이 닿는 모양입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베트남어도 기초적인 수준으로 더듬더듬 했었으니까요.

오랜만에 방문한 하노이의 밤은 더욱 밝아져 있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세계적인 사건이 하늘길을 가로막고 있는 동안에도, 이곳에서는 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해 왔을 것입니다.

하노이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기차를 타고 하이퐁으로 향했습니다. 시가지 인근에 있는 롱비엔 역에서 기차를 타면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종점인 하이퐁에 도착합니다. 철도는 노선 폭이 1000mm 밖에 되지 않는 협궤에 구불구불 이어진 기찻길은 때로 시가지 한복판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합니다. 기차 한 대가 운행하면 맞은편에서는 운행할 수 없는 단선 철도입니다.

하이퐁이란 이름의 의미
 
하노이-하이퐁 간 철도
 하노이-하이퐁 간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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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퐁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외항입니다. 호치민과 하노이에 이어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죠. 하노이에 이어 두 번째로 직할시로 지정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하이퐁'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독특합니다. 지금은 베트남어가 모두 라틴 문자를 차용한 '쯔 꾸옥 응우(Chữ Quốc Ngữ)'라는 문자로 표기되지만,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베트남도 원래는 한자 문화권입니다. 당장 '쯔 꾸옥 응우'라는 말도 '자국어(字國語)'라는 한자를 베트남 발음으로 읽은 것뿐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비엣남'은 '월남(越南)'의 베트남식 발음이고, '호치민'의 한자 이름은 '호지명(胡志明)'이라고 씁니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한자 병기가 거의 드물어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하노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원래는 '하내(河內)'라는 한자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방문한 '하이퐁'은 한자로 '해방(海防)'이라고 씁니다.

'해방(海防)'이란 말 그대로 바다를 방어한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해방(海防)'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근대 역사에서 '해방(海防)'이란 아주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하이퐁 거리
 하이퐁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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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1870년대 해군을 강화해 동남쪽의 바다를 방어할 것인지, 육군을 강화해 서북쪽의 초원지대를 방어할 것인지를 두고 큰 논쟁이 일었습니다. 동남쪽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세력과 일본이 침략을 가속화하고 있었고, 서북쪽에서는 야쿱 벡의 난을 비롯한 각종 반란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서 해군을 강화하자는 측을 '해방(海防)'론, 육군을 강화하자는 쪽을 '새방(塞防)'론이라고 부릅니다. 해방론의 선두주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홍장이었고, 새방론의 선두주자가 좌종당이었습니다. 이것을 '해방-새방 논쟁'이라 부르고, 이를 배경으로 성장한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해방'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본은 이른 시기부터 러시아의 남하를 마주하며 바다를 통한 서구 열강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1792년부터 막부의 가장 높은 관료인 로주(老中)들 가운데 '해방괘(海防掛)'라는 직책을 만들어 바다를 방어하는 일을 전담하는 관료를 두었습니다.

임시직이었던 해방괘 로주는 1845년부터 상설화되었고, 로주 뿐 아니라 막부의 핵심 직책인 메츠케(目付) 등에도 해방괘 자리가 설치됩니다. 에도막부 후기 개혁정책을 추진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 등이 모두 이 해방괘 로주 출신입니다.

물론 병인양요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등 서양과의 충돌을 맞이했던 조선에서도 해방(海防)에 관한 논의는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박규수 등이 대원군에게 해방에 힘쓸 것을 상소하기도 했지만, 크게 힘을 쓰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이퐁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레 쩐 장군 동상
 하이퐁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레 쩐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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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적인 맥락 위에서, 아예 도시의 이름 자체가 '해방'인 하이퐁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습니다. 하이퐁은 과거부터 하노이의 외항으로 기능했던 도시이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큰 도시가 된 것은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다를 방비해 외국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해방'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역사일 수도 있겠죠. 프랑스 식민 시절 각종 근대문물이 수입되는 항구로서 하이퐁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근대 역사의 격랑과 함께 하이퐁도 요동치는 시절을 겪게 됩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 프랑스 본토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는 일본군이 진주하기 시작했고, 1945년 전쟁 말엽에는 아예 프랑스를 쫓아내고 일본이 직접 베트남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곧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북쪽으로는 중화민국군이, 남쪽으로는 영국군이 들어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지만 둘 모두 베트남을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로 군대를 파견해 식민군을 재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빠르게 독립선언을 하고 새로운 국가 수립에 나섰습니다.

북부에서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성립되어 선거를 치르고 헌법을 만들었고, 1946년에는 프랑스도 베트남 주둔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리 쉽게 이 땅을 내줄 생각은 없었죠.

프랑스는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남부 식민지에 "코친차이나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사실상의 식민지를 계속해서 영유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1946년 11월 23일, 베트남 민주공화국과의 협정을 파기하고 북베트남을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베트남 독립전쟁 당시 저항군이 사용한 피스톨
 베트남 독립전쟁 당시 저항군이 사용한 피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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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프랑스가 북베트남을 공략하기 위해 처음으로 포격한 도시가 바로 하이퐁이었습니다. 수도인 하노이의 외항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였던 것이죠. 민간인 6천여 명이 사망하는 사태 끝에 프랑스는 북베트남에 상륙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이라는 아시아 약소국과 프랑스라는 한때 세계적 제국 사이의 전쟁은 물론 프랑스의 우세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계속하면서 프랑스에 상당한 피로감을 안겼죠. 특히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에 승리한 공산당이 베트남군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혼전으로 흘러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뿐 아니라 다른 식민지에 대해서도 유사한 정책을 이어갔기 때문에, 베트남 독립 전쟁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제네바 회담을 통해 휴전이 결의됩니다.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북부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남부는 프랑스가 만든 베트남국이 다스리기로 했죠. 이 두 나라가 1956년 7월 전에 총선거를 통해 통일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쪽 베트남국의 총리를 맡고 있던 응오 딘 지엠이 이 협상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분단은 고착화되고 말았습니다.
 
하이퐁
 하이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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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퐁, 극복의 선봉에 선 도시

'해방(海防)'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이퐁은 한때 프랑스를 통해 근대 문물을 수입하는 항구였고, 그 프랑스의 침략마저 가장 선봉에서 맞은 항구였습니다. 지금은 항구와 산업시설을 끼고 있는, 아름답게 조경된 공원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하는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이렇게 분단된 뒤 베트남은 다시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베트남은 결국 통일된 국민국가를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한 민족이 반드시 한 국가를 꾸려야 한다는 국민국가의 이념에 찬동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애초에 민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통일이 능사도 아니고, 독립이 능사도 아니죠. 베트남 독립을 지도한 호치민 역시 스스로 말했습니다. "혁명을 한 뒤에도 민중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고요.
 
하이퐁 공원
 하이퐁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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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의 부와 자유를 한 계급과 인종에 종속시키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부와 자유의 확산을 저지하는 식민주의를 베트남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낸 셈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이라는 조국 자체는 그 극복의 상징입니다. '해방(海防)'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하이퐁은 그 극복과 수난의 선봉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국민국가의 성립에, 이 평화로운 항구도시에, 조금은 찬사를 보내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조국이 다시 부와 자유를 한 계급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피부색이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것에 둔감해진 것은 아닌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지금 세대 베트남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베트남, #하노이, #하이퐁, #베트남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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