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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조국의 모습은 참담했다.

특히 한때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의 변신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3.1혁명 이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민족분열책을 펴자, 이에 편승하여 민족개량주의가 대두하고,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자치운동을 제기했다.

<2.8독립선언>을 기초했던 이광수가 1924년 1월 <동아일보> 사설에서 '자치운동'을 제기하고, 김성수·송진우·최린 등이 자치운동을 위한 정치결사체로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하려다 배후에 총독의 정치고문인 아베 미쓰이메가 개입되어 있음이 폭로되었다.

4월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되어 전국적인 청년조직으로 회원이 3만 7천명에 달하고, 11월에는 역시 사회주의계열인 북풍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925년 4월 책임비서 김재봉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얼마 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의 청년전위조직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일본처럼 조선도 사회주의 사상이 급류를 타고 있었다. 총독부는 5월 7일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단속·처벌에 나섰다. 자치운동만이 일제의 보호 아래 활개치는 형국이었다. 

23세가 된 서민호는 조국에서 설 땅을 찾지 못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 1925년 3월 태평양횡단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긴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유학생들과 많은 교포들이 환영해주었다. 얼마 후에 안 일이지만 교포사회는 안창호의 국민회와 흥사단, 이승만의 구미위원회와 동지회가 갈라져 새로 들어온 유학생이나 교포들을 자기네 단체에 가입시키려는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두 단체에서는 서로가 우리에게 "안내를 하겠다" "무엇을 알선해 주겠다"고 나섰으나 진정한 동포애로서 순수한 친절이 아니었고 자기네들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으므로 강직한 내 성격에는 첫눈에 거슬리는 점이 많았다.

내 조국 한반도는 일본의 검은 손아귀에 잡혀서 헤어날 가망은 조금도 보이질 않은 암담한 판국에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함께 걱정하기에 앞서 벌써 대립된 사심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은 훗날의 어지러운 우리 정치사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계속적으로 두 단체는 팽팽히 맞서서 격심한 대립을 보였고 심지어 3.1절 기념행사마저도 별도로 거행하여 왔으니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 해도 젊은 지식층의 양심이 이렇다면서도 한심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었으며 먼 훗날의 조국의 모습까지 걱정이 되었던 내 생각은 결국 헛된 의구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석 4)

1925년 3월 23일 상하이 임시정부가 여러가지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했다. 임시정부의 탄핵사유인 <이승만의 범과사실> 6개항 중 4항은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주에 앉아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리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하지 않아서 재정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달했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주석 5)라고 적시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축출된 이승만은 미국의 교포들에게 더욱 기대게 되고, 따라서 한인사회는 분열과 갈등의 대립상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서민호는 이같은 갈등상을 지켜보면서 이들 단체에는 관심없이 우선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고자 조용하고 여건이 잘 갖춰져 있다는 켄터키주의 벨리아대학 부속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벨리아대학은 모든 학교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돈 없는 학생들이 일해서 학비를 마련할 수 있는 조건이 좋았다. 

이 학교는 수업의 반은 일을 해야 하는 규칙이 있었으므로 나는 빗자루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에 2~5시간을 종사해서 학비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동양사람은 체구는 작지만 힘이 세고 책임감이 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으나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사소한 희비애락이 많았다. 나는 대학 부속고등학교 야구팀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하는 한편 사격연습을 했는데 매일 수백발의 권총과 장총을 쏘곤 했다. 

사격을 배울 때는 앞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몸을 담으려면 호신용으로 필요할 때가 있을  것 이라는 것도 예감했다. 이곳에서는 동경서처럼 증오에 찬 반항의식이 폭발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하고 알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주석 6)

켄터키주는 남방이어서 인종차별이 심했다. 흑인뿐만 아니라 동양인에 대한 차별도 못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1년간 어학공부를 마치고 1926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 정치역사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와 학비에 보태었다. 

1927년 12월 콜럼비아대학원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1월부터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정치사회학을 전공했다. 덴마크의 협동조합 제도와 사회제도를 연구하여 장차 한국도 농업국가로서 이 나라처럼 발전시켜보겠다는 꿈이었다. 

이 무렵 교포사회는 이승만과 안창호가 주도하는 두 단체의 대립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서민호와 가까운 친지·선배들인 장덕수·김도연·김양수·윤흥섭·이동제·윤치영·최정진·이정근·이철원 등이 (더러는 이미 동지회에 가입) 먼저 동지회에 참여해서 흥사단을 통합시켜 교포들을 단합시키자는 데 뜻을 모았다. (주석 7)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동지회의 멤버가 되었다. 뒷날 광복된 조국의 정계에서 대치하게 되는, 악연의 시작이다. 

정파 의식이 강하지 않았던 그는 동지회에 가입한 목적이 흥사단 계열과 통합하여 교포사회의 결속을 도모하고, 그 역량을 키워 조국독립운동에 기여하자는 데 뜻이 있었다. 그래서 유지들과 뉴욕 동포들의 지원으로 <3.1신보>를 발행하고, 국민회와 통합을 서둘렀다.

그 첫 단계로 1927년도 3.1절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고자 유학생 황창하와 교섭위원으로 선정되어 뉴욕으로 상대측 대표를 찾아갔다. 하지만 상대는 '이승만 파'라고 내치고, 어떤 인사는 손찌검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모를 당하고도 설득 끝에 협상이 이루어졌다.

3.1절 기념행사는 뉴욕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서재필을 비롯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 헐버트, 재미 동포 다수가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대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하고 교포들이 매월 1달러씩 국민세를 내서 <3.1신보>발간 및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지원키로 하였다. 성공적인 집회였다. 서민호는 모처럼 성취감에 젖었다. 그는 <3.1신보>의 사회면을 담당하여 기사와 논설을 썼다. 


주석
4> 앞의 글 (8).
5> 정두옥, <재미한인독립운동실기>, (필사본, 하와이대학 한국연구소 소장), 1969, 53쪽.
6> <이 정권과의 투쟁(9)>
7>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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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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