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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은 꿈과 관련된 영화다. 그 때문에 공간이 왜곡된 비현실적인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런 탓인지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현실판 인셉션'이라는 사진이 떠돈 적이 있다. 급격한 경사의 언덕에 위치한 주택들과 일렬로 주차된 자동차들. 한글 간판이 등장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 장소가 한국임을 알아채기 쉽다. 바로 경기도 성남시다.

성남에는 경사가 심한 언덕이 많다. 언덕 위에 집이 있고 학교가 있다. 성남시민들은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며 매일 걸어 다닌다. 나도 성남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늘 언덕을 마주했다. 거친 경사의 언덕을 통해 등교하는 것은 아침에 유용한 스포츠이기도 하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하다고 하더라도 출근길 버스를 타고 거친 언덕을 오르고 있으면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왜 이런 언덕이 많은 곳에 도시를 건설할 생각을 했을까?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사람들

1968년 6월 12일, <조선일보> 3면에는 '광주에 2백 50만평 대단지'라는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첫 줄에서 '서울시는 시내 무허가건물을 일소하는 획기적 조처로 철거민 50만 명을 정착시키는 대단지를 남서울지역의 인접지인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건설한다'라고 전한다. 이후 실제로 철거민들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현재의 성남시다.

철거민들은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면서 좀 더 나은 주거환경과 좋은 삶의 질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철거민들의 이러한 기대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만다. <동아일보>는 1970년 6월 24일 7면에 '광주 철거민 생활난 극심'이라는 기사를 실어 철거민들의 삶에 대해 알린다.
 
"... 반수에 가까운 많은 영세민들이 그대로 천막을 친 채 우물 식량 위생 등 생활환경의 부재 상태 속에서 아직도 헐벗은 생활을 하고 있다. (중략) 시청에서 28km 떨어진 이단지에 옮겨진 철거민들은 하루벌이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입주단지추첨이 늦어 당장 일터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생활여건조성과 생활보호자 실태파악을 보다 철저히하고 자조근로사업 등을 활발히 진행하는 등 이들의 자활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관계당국의 종합적인 시책이 절실하게 바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어 기사에서는 서울시 당국이 철거 이주민들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시영버스 6대와 경기여객 1대 마이크로버스 4대로는 현지의 교통량을 감당치 못해 큰 불편을 주고 있다'며 당국의 빠른 조치를 촉구했다. 

결국 1971년 8월 10일 열악한 생활환경과 당국의 미진한 생계보장에 폭발한 시민들은 관공서 건물에 불을 지르고 15대의 차량을 파괴하는 등의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들의 행동은 광주대단지 일대를 무법지대로 만들고 말았다. 이주민들의 요구는 '1백원 땅을 1만원에 파는 것을 결사반대'로 대지 무상불하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광주대단지로 넘어온 이주민들에게 서울시가 용지 처분을 서두르면서 투기가 급증하고 땅값이 급등했는데, 선거 이후 서울시가 분양증 전매 금지 및 토지대금 일시상환을 발표하자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 이런 이주민들의 행동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장이 직접 나서서 사태를 해결하게 했고, 결국 주민들의 요구가 모두 수용되어 생활환경의 개선 등에 합의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광주군에서 성남시가 분리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주민들의 승리로 인해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주거 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사 높은 언덕에 세워진 천막집이 번듯한 집으로 바뀌게 된 사연이 바로 이렇다. 하지만 집은 바뀌었어도 언덕은 차마 모두 깎아내지 못했다. '현실판 인셉션' 성남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8.10 성남민권운동 50주년, 지금의 성남은?

이 사건을 최근까지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렀다. '사건'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의 투쟁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아마 이 기사를 통해 해당 사건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최근 성남시 차원에서 이주민들의 투쟁을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가장 주요한 것은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명칭을 '8.10 성남민권운동'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명칭 변경으로 이주민들의 항쟁이 민주화 운동의 일부임을 분명하게 하는 성과가 있었다. 50년이 지나서야 이주민들의 항쟁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 민주화 운동에 있어 벌여진 하나의 '투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8.10 성남민권운동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바로 '이주민들이 벌인' 투쟁이라는 점이다. 집 없이 천막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들. 서울 판잣집에서 광주대단지 천막으로 쫓겨난 이들. 이들이 겪어야 했던 상황은 지금의 성남을 둘러싼 상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 성남시는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어느 동은 동 자체로 통째로 헐리기도 했고 위례 신도시에는 세련된 아파트들이 올라왔다. 도시 사방에서 재개발 조합과 건설회사 현수막이 재개발을 염원하는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성남시민 모두를 위한 일일까? 집을 구할 수 없는 성남시 주거 취약자들에게 이 구호는 어떻게 들릴까? 

50년 전에 일어난 8.10 성남민권운동 당시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1971년 일어난 8.10 성남민권운동이 벌써 50주년을 맞는다. 당대의 철거 이주민 투쟁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거 문제에 있어 다른 형태의 '쫓겨나는 이주민'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성남시가 쫓겨난 철거민들의 항쟁을 기억하면서, 쫓겨나는 이주민을 더 만드는 재개발에 열을 올리는 모순에서 벗어나는 것도 주요한 과제다. '기억'을 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로 했으면 이제는 '행동'해야 한다. 그게 8.10 성남민권운동을 기억하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다.

[참고]
광주대단지사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아일보, 광주 철거민 생활난 극심, 1970.06.24, 7면
조선일보, 광주에 2백 50만평 대단지, 1968.06,12, 3면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정의당 성남시위원회 사무차장, 청년정의당 성남시위원회 위원장입니다.


태그:#성남, #8.10 성남민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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