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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 1편 '조선왕조실록' 일부는 어쩌다 도쿄대학에서 불탔을까에서 이어집니다. 

이토 히로부미 사례에서 보듯, 일제의 조선 서책 약탈은 한일 강제병합 이전부터 공공연히 이뤄졌다. 1908년 12월 29일 가와이 히도나미(河合弘民)는 일본 헌병을 이끌고 강화도 전등사에 들이닥쳤다. 도끼로 정족산 사고 문을 부순 가와이는 사고에서 21권의 서책을 탈취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고 하나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8년, 조선 4대 사고의 서책이 강압적으로 약탈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고서를 포함해 가와이가 끌어모은 장서는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이 사들여서 '가와이문고'(河合文庫)로 남아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조선 서책 약탈
 
일본 제국 육군 군인 출신 정치가. 1910년 5월 제3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해 한일 강제병합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 총독이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공으로 제18대 내각 총리대신을 지냈다.
▲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본 제국 육군 군인 출신 정치가. 1910년 5월 제3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해 한일 강제병합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 총독이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공으로 제18대 내각 총리대신을 지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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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서적의 일본 유출은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 이홍직 교수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서책 약탈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왜장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조선에서 약탈한 수십 궤짝의 서적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서에게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실로 놀라울 만한 수량에 달하여 조선에서는 임진 이전 간행한 전적(典籍)은 거의 씨를 말릴 지경이 되었다."

일본 안에서도 임진왜란을 '문화전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책 약탈을 위해 '종군문서참모부'(從軍文書參謀部)라는 조직을 따로 운영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학무과장을 지낸 야기 노부오(八木信雄)는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누린 '혜택'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일본이 문화면에서 얻은 가장 큰 이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여러 장수가 조선으로부터 가져온 막대한 서적(韓籍)이며 (중략) 그 외에도 금속활자를 가져온 일과 도공을 데려온 일이다."

1916년 8월 황태자 이은(李垠)과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 공주와 결혼을 추진한 것도 데라우치 마사타케다.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 질서를 '정초'(定礎)한 사람이 데라우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공적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동상은 1926년 10월 1일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 중앙홀에 세워졌다. 1923년 5월 7일 조선총독부는 상량식을 통해 청사 신축에 공헌한 55명의 이름을 새긴 구리 동판을 중앙돔 아래 설치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름은 이 동판에도 새겨졌다.

일본인조차 반발한 강권 통치

1916년 6월 데라우치는 원수로 추대되어 천황의 군사자문기관인 원수부 일원이 되었다. 실전 경험 없이 원수가 된 사람은 운요호 함장으로 강화도 사건을 일으킨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두 명뿐이다.

조선을 철저히 짓밟은 그는 1916년 내각 총리로 조선을 떠났다. 1916년 10월 9일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에서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그가 총리대신이 된 가장 큰 배경은 한일 강제병합의 공로였다. 총리대신이 된 그는 각료 전원을 야마가타 파벌 사람으로 채운 '초연 내각'을 구성했다. 이런 전횡으로 일본 내에서 '비입헌 내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전장으로 바뀌자, 데라우치는 대륙 침략을 위해 중국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18년 8월 시베리아 출병도 이런 구상으로 추진했다. 1차 세계대전과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 국내 쌀값이 급속히 오르자, 일본 안에서 '쌀 소동'이라 불린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350만 명이 32개 현에서 180회 이상 소요를 일으켰다.
 
1908년 시카고 미술 전람회에 출품된 어느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꿈에서 본 신비한 인물상을 모델로 제작했다고 한다. 복을 불러오는 마스코트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1911년 오사카 섬유회사인 칸다야 다무라 상점(神田屋田村商店)이 캐릭터 상품으로 팔면서 대중화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왜 '빌리켄 장군'으로 불렸는지 알 수 있다.
▲ 빌리켄 1908년 시카고 미술 전람회에 출품된 어느 여성 작가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꿈에서 본 신비한 인물상을 모델로 제작했다고 한다. 복을 불러오는 마스코트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1911년 오사카 섬유회사인 칸다야 다무라 상점(神田屋田村商店)이 캐릭터 상품으로 팔면서 대중화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왜 "빌리켄 장군"으로 불렸는지 알 수 있다.
ⓒ W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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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데라우치는 1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폭동을 진압했으나 반정부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데라우치의 통치에 일본인조차 반기를 들었다. 데라우치는 복(福)을 상징하는 빌리켄(billiken)과 닮았다는 이유로 '빌리켄 장군'이라 불렸지만,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복(福)이 아닌 화(禍)를 불러왔다.

건강에 이상이 생긴 데라우치는 1918년 9월 21일, 쌀 소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형태로 내각과 함께 총사퇴했다. 1년 11개월 만에 데라우치 내각은 무너졌다. 조선에서 3.1 만세운동이 터진 지 8개월 후인 1919년 11월 3일, 데라우치는 6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백작 작위는 장남인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内寿一)가 승계했다. 히사이치는 아버지에 이어 육군 원수 지위에 올랐다. 황족이 아닌 사람으로, 2대에 걸쳐 원수가 된 사례는 데라우치 부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무도서관'에서 '도서무관'으로

데라우치 가문은 1922년 오호데라우치문고(櫻圃寺內文庫)라는 도서관을 설립했다. 총리대신에서 물러나 병상에 있던 데라우치는 아들 히사이치를 불러 자신이 수집한 서책과 문화재로 도서관을 세우도록 했다. 데라우치의 고향 야마구치현에 문을 연 이 도서관은 백작 작위를 승계한 큰아들 히사이치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도서관을 채운 것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에서 빼돌린 고서와 문화재였다. 데라우치 가문은 최신 건물로 도서관을 세우고, 북쪽에 부속 건물로 조선관(朝鮮館)을 따로 지었다. 1922년 12월 시점에 데라우치문고 1만5500여 장서 중 조선본은 46종 432책, 조선 옛 서찰과 법첩이 191책(150종)이었다. <오호문고기>에는 데라우치가 도서관을 세운 이유가 남아 있다.

"사풍(士風)의 진작에는 역사보다 좋은 것이 없고, 역사를 수집함에 있어 먼저 우리 제국의 역사를 날줄(經)로 하고,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조선과 중국의 역사를 씨줄(緯)로 삼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오호문고를 창설하는 주된 이유이며, 다른 일반 도서관과 스스로 그 취지를 달리하는 까닭이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때부터 오호데라우치문고가 문을 연 1922년 무렵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세우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표방했다. 무도서관 시대 총독은 다름 아닌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 정책은 도서관 건물은 짓되 책이 없는 '도서무관'(圖書無館) 시대로 이어진다. '무도서관'에서 '도서무관'으로. 일제강점기 일제의 도서관 정책은 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데라우치 가문은 조선에서 약탈한 서책과 문화재로 자신의 고향에 도서관을 세웠다. 총독 재임 시절 조선 책에 대한 압수·분서·약탈까지 생각하면, 데라우치는 우리 도서관 역사상 최악의 '악당'으로 꼽을 만하다. '도서관 인물사'는 도서관에 업적을 남긴 사람만 다뤄야 할까?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람은 '도서관 선구자'와 '도서관 친구' 뿐 아니라 '도서관의 적'과 '도서관의 악당'도 있다.

시민의 노력으로 시작된 데라우치문고의 반환
 
1879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에 이어 일본 제국 육군 원수가 된 히사이치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남방총사령관이었다. 일본 패전 후 히사이치는 도쿄전범재판소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았다. 싱가포르 감옥에서 투옥된 1946년, 히사이치는 병으로 죽었다.
▲ 데라우치 히사이치 1879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에 이어 일본 제국 육군 원수가 된 히사이치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남방총사령관이었다. 일본 패전 후 히사이치는 도쿄전범재판소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았다. 싱가포르 감옥에서 투옥된 1946년, 히사이치는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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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데라우치 히사이치가 죽자 데라우치 가문은 도서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6년 데라우치 가문은 야마구치현과 '오호문고 대차계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오호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현립대학(당시 야마구치여자전문학교) 부속도서관이 되었다.

1941년 문을 연 야마구치현립대학은 당시 도서관이 없어, 학생 상당수가 데라우치문고를 도서관처럼 이용했다고 한다. 1957년 데라우치 가문과 야마구치현은 매매 계약을 통해 도서관 건물과 토지를 야마구치현이 매입하고, 책과 서화는 야마구치현에 기증 처리했다.

1996년 1월 24일 일본에 있던 오호데라우치문고 소장본 중 일부가 우리에게 돌아왔다. 데라우치문고를 운영해온 야마구치현립대학이 전적 1955점(98종 135첩 1축)을 경남대학교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야마구치현립대학이 운영하던 오호데라우치문고가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한 시민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90년 고성 이씨 종친회 이종영씨는 조상인 행촌 이암(李喦) 선생의 친필 글씨가 오호데라우치문고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

조상의 글씨뿐 아니라 조선 서책 상당수가 데라우치문고에 있음을 확인한 이종영씨는 친구이자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 박사에게 사정을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야마구치현립대학이 운영하던 오호데라우치문고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고, 결국 일부 서책의 반환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 돌아온 서책은 경남대학교 박물관 데라우치문고실에 전시·보관되고 있다.

그러면 데라우치 가문이 소장했던 조선 서책은 모두 우리나라에 돌아온 걸까? 데라우치문고에 있던 조선 서책은 야먀구치현립대학, 야마구치현립야마구치도서관, 보쵸쇼부칸(防長尙武館), 일본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데라우치 가문, 경남대학교, 이렇게 여섯 곳에 나뉘어 있다.

'반환'과 '인도' 사이에서
 
경남대학교는 오호데라우치문고 조선 관계 자료 중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야마구치현립대학으로부터 데라우치문고를 반환받는 과정에서 경남대학교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반환이 무산될 뻔하기도 했으나 박재규 총장을 비롯한 여러 실무자의 노력으로 데라우치문고 조선 서책을 돌려받았다.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한마미래관에 자리하고 있다.
▲ 경남대학교 박물관 데라우치문고 전시실 경남대학교는 오호데라우치문고 조선 관계 자료 중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야마구치현립대학으로부터 데라우치문고를 반환받는 과정에서 경남대학교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반환이 무산될 뻔하기도 했으나 박재규 총장을 비롯한 여러 실무자의 노력으로 데라우치문고 조선 서책을 돌려받았다.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한마미래관에 자리하고 있다.
ⓒ 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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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간 도서 가운데 조선왕실 <의궤> 167권과 도서 1038권을 일본 정부로부터 '반환' 받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반환'이 아닌 '인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의 조선 문화재 약탈은 어느 정도였을까?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고려자기가 값비싼 보물이라는 것을 들은 일본인들은 개성 지방의 왕릉을 도굴하고 파괴하였다. 옛 그림이나 불상을 약탈하기 위해 사찰에 들어가 승려를 속여 빼앗았다. 궁궐이나 관청, 누각에 걸려 있는 나무 현판도 거둬들였다." (출처, 허영섭 지음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방방곡곡의 조선 문화재를 일제가 탈탈 털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은 조선의 서책을 얼마나 약탈해 갔을까? 북한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김석형의 지적이다.

"오늘날 조선 문화재의 몇 %가 일본에 넘어가 있겠는가. 거의 전부 아마도 95%는 일본인 소유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서적에 대한 약탈도 식민지 통치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감행되었다. 20세기까지 조국 땅에 남은 서적들을 이 시기에 깡그리 긁어모아 가지고 갔다. 16세기 말 임진조국전쟁(임진왜란) 전에 간행된 서적의 90% 정도는 전쟁 때 약탈해갔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머지 10% 가운데서 또 절반은 식민지 통치 시기에 빼앗아 갔다고 볼 수 있다. 서적의 나라라고 하는 우리나라에 고서가 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 약탈자들 때문이었다." (출처 정규홍 지음 <우리 문화재 수난사 - 일제기 문화재 약탈과 유린>)

또 다른 데라우치문고를 찾아서
 
지금의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한때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박물관 주변 야외 전시장에는 대구 경북 지역에서 발굴했거나 원소재지가 확실치 않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이중 연화 운룡장식 승탑과 사자 주악장식 승탑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 모두 대구에 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저택 지하에 숨겨져 있던 유물이다.
▲ 경북대학교 박물관 지금의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한때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박물관 주변 야외 전시장에는 대구 경북 지역에서 발굴했거나 원소재지가 확실치 않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이중 연화 운룡장식 승탑과 사자 주악장식 승탑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 모두 대구에 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저택 지하에 숨겨져 있던 유물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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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왕'이라 불린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조선에서 수집한 문화재는 '오구라 컬렉션'이라 불린다. 오구라가 일본으로 반출한 1천여 점이 넘는 문화재는 1981년 도쿄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 중 39점은 일본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문화재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오구라 컬렉션을 비롯한 민간인이 약탈 또는 반출한 문화재는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반환받지 못했다.

세상의 도서관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늘 옳지만, 그 장서가 약탈한 책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의 도서관은 다른 나라에서 약탈한 서책과 문화재를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선진'이라는 이름에 감춰진 제국주의 시대 유산은 우리가 '감탄'할 대목이 아니라 '극복'할 대상은 아닐까.

오호데라우치문고가 뒤늦게라도 우리에게 반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일제강점기 약탈당한 고서적과 문화재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6만 8천 점에 달한다는 해외 한국 문화재는 누가 어디에서 소장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많다. 잊지 않고 되찾아야 할 또 다른 '데라우치문고'가 우리에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태그:#데라우치 마사타케, #오호데라우치문고, #일제강점기, #도서관, #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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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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