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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2살 때였다. 친정 엄마가 집에 놀러와서 아이를 맡기고 잠시 마트에 갔다. 차가 이제 막 마트에 진입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냐. 동글이가 침대에서 떨어졌어. 내가 부엌에 있는데 쿵 소리가 나서 와 보니까 애가 떨어져 있네. 얼른 와."

수화기 너머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들을 돌려 집으로 왔다. 엄마가 된 지 24개월도 안 된 나나, 40년 정도 아이를 키운 친정 엄마나 아이 울음 앞에서 대처 방법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안아서 아이를 달랜 뒤 머리를 만졌는데 큰 혹은 없었다. 팔다리도 부러진 것 같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집 근처 소아과에 갔다.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진 거 같아요. 저도, 친정 엄마도 그 장면을 본 건 아니라서요."
"여길 오시면 어떻게 해요?"
"네?"
"참나... 응급실에 가셔야죠."


의사는 아이를 진찰하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평일 낮이었고 소아과에 먼저 가서 확인을 받고 큰 병원으로 가든가 하는 거 아니었나?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건가? 부랴부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아이가 토하거나 어지러워 하거나 하지 않나요? 그런 증상이 없으면 지켜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유관상 상처나 부상이 없어 보이는 데다 어린 아이들은 뇌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크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어요. CT를 찍는 위험성을 감행하는 것보다 일단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 우리 손자 목은 괜찮나요? 머리보다 목이 꺾이거나 그랬을까 봐. 그러면 척추에 손상 가니까 그게 걱정돼서."
"할머니 괜찮아요. 목이 꺾였으면 아이가 지금 이렇게 있지도 못해요."


그제야 안심하고 집에 돌아왔다.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아이 한 번 들여다 보지 않고 여길 왜 왔냐고 나를 질책 하던 의사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살림의원이 뭔가요?
지역주치의로서 활동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지역주치의로서 활동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 심플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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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질책하는 의사, 환자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의사를 안 만나 본 사람이 있을까? 질병 및 의료에 관한 전문성을 가진 의사 앞에서 비전문가인 환자는 약자다. 의사 말 한 마디에 자신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기에 저절로 비굴해지게 되는 이 불평등한 관계. 이런 관계에서 의사에게 당한 사건이 하나쯤 있는 사람이라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맞아맞아"를 외칠 것이다.

은평구에 있는 국내 최초 여성주의 병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추혜인 원장이 쓴 동네 주치의의 명랑 뭉클 에세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그녀가 진료실에서, 진료실 밖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추 원장은 199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총 4층 건물에 여자 화장실이 하나도 없는 공대 환경에 숨막혀 하다 공대 여성위원회를 찾아갔다. 그 뒤로 편하게 숨을 쉬기 위해 그 방을 들락거렸고, 1997년이 시작되던 1학년 겨울 방학 때 NGO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여성주의와 의료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다, 2012년 건강한 삶의 토대가 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게 됐다. 

현재 살림조합은 3200세대가 넘는 조합원들과 함께 의원, 치과, 건강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통합돌봄센터'도 준비중이며, 추 원장은 마을 공동체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여성주의만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여성주의 없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이런 신념을 토대로 추혜인 원장은 진료실에서 혹은 왕진을 나가서 환자와 보호자를 만난다. 그녀가 쓴 책에는 그동안 내가 병원에서 받지 못 했던 의사의 따뜻한 위로가 있다.

책을 읽고 위로 받다

29살의 한 여성이 추 원장 진료실에 왔다. 몇 년간 지속된 소화불량과 우상복부에 있는 종괴로 고민이라는 이 여성은 상당히 마른 체격이었다. 내시경, 초음파, CT상 정상으로 나오기 때문에 다른 병원에서는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줬다고 한다.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했지만 뚜렷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고 소화불량은 지속됐다. 그녀가 보여준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배를 만진 추 원장은 종괴에 대해 '간'이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지금껏 어느 의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건 진짜 간이에요."
"그래도 만지면 이렇게 아픈 걸요."
"원래 간은 만지면 아픕니다. 간 피막에서는 통증이 느껴지거든요."(책 20쪽)


이후 추원장은 그녀의 CT를 보면서 오목가슴으로 인해 그녀의 횡경막이 내려온 것, 복강이 좁아 간이 왜 그 위치에 있게 됐는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위가 불편하게 된 거고 소화불량 증상이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자신의 통증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던 29세 여성은 이후에도 소화불량을 겪겠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왜 불편한지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추 원장은 그녀를 통해 의사들이 젊은 여성들의 통증 호소에 둔감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젊고 건강한 여성이 '아프다'고 말했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해 보려는 노력보다는 정신과적인 '설명 모델'을 너무 쉽게 가져오려고 한다는 추 원장. 이 에피소드를 읽고 3년 전 편두통 때 일이 생각났다.

3년 전 가을 갑자기 편두통이 찾아왔다. 평소 잠을 못 자거나 했을 때 두통이 있긴 했지만 자주 있는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 이번엔 찌릿찌릿한 게 뭔가 달랐다. 겁이 나서 신경외과에 갔는데 의사는 나를 보자마자 '아직 그럴 나이 아닌데'라는 표정이었다.

집 근처 대학 신경외과 교수까지 지낸 의사는 나이가 지긋했고 이것저것 검사를 해보라고 했다. 병원에서 뇌혈류 검사와 뇌파 검사를 했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신경 안정제를 처방해주면서 다음에 다시 오란 말도 없었다.

그러나 머리는 계속 아팠다. '이거 뭔가 발견을 못하는 거 아냐? 검사는 정상이라지만 이렇게 아픈데?' 불안이 커지고 잠을 잘 수 없게 됐다.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왜 왔냐고 했다. 잠을 못 잔다고 하니 수면제를 처방해줬다. 수면제로도 잠 들 수 없었다. 다시 찾아갔다. 

"이런 사람은 MRI찍어서 정상인 걸 보면 괜찮아져요. 검사하고 오세요."

검사했고 정상이었지만 아팠다. 그러나 의사는 신경안정제만 처방했다. 당시 신경외과 의사는 검사 결과와 나의 나이를 근거로 정상만 진단했을 뿐 나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정상이지만 실재 하는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왕진하는 의원, 우리 동네 돌봄시스템을 지향하는 의원

병원에 내원할 수 없는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추 원장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왕진을 간다. 진료실에서는 물리적 환경이 차단된 채 환자를 만난다. 왕진을 하면 환자가 계단을 얼만큼 오르내리는지부터 경제적 상황까지 가늠할 수 있다. 환자에 대해 좀더 통합적으로 알 수 있게 되고 보호자도 만날 수 있는 왕진은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필요하다.

추 원장이 어느 집에 왕진을 갔을 때 거동할 수 없는 환자에게 급히 약처방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우리나라는 아직 왕진 시 의사가 약 처방을 온라인으로 할 수 없다. 추 원장이 병원에 가서 처방을 하면 약국에 가서 약을 타서 환자에게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보호자는 환자 옆을 떠날 수 없었다. 이때 추원장과 왕진에 같이 간 조합원이 이 일을 맡아서 잘 마무리 되었다. 살림의원은 이렇게 조합원들이 의원에 필요한 일을 도우면서 우리 동네 돌봄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간다.

독거노인, 비혼 세대를 비롯해 1인가구가 늘어나는 요즘 서로 돌볼 수 있는 의료체계가 필요하다. 살림의원은 환자의 이야기만 잘 들어주는 게 아니라 돌봄 통합시스템, 우리 동네 통합 의료체계를 지향한다. 이 가운데 왕진이 있다. 

살림의원은 누구나 올 수 있는 병원을 위해 사회적, 물리적 장벽을 없앴다. 임대료가 비싸지만 조합원이 조금더 기금을 마련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에 의원을 개업하고, 사회적 차별 시선을 없애니 트랜스 젠더가 자주 오는 병원이 됐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더 많아졌으면

진료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환자를 보며 그 사람의 아프고 힘든 시간이 들어온다며 공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가 있는 살림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그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졌다. 부동산 앱을 켜서 괜시리 집값도 알아봤다.

"지공아, 너 은평구 살지. 살림의원 알아?"
"어. 나 거기 조합원이야. 왜?"
"내가 추 원장님 책을 읽었거든. 정말 좋더라. 이사가고 싶다."
"원장님 우리 가족 주치의셔. 진료 시간이 보통 10분이 넘어. 정말 친절하시지."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더 이사가고 싶어졌다. 소아과에 가면 대기 환자가 20명이 넘어도 1시간이면 진료를 볼 수 있다. 1시간에 20명이니까 3분에 한 명 꼴로 진료가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살림의원은 1시간에 6명이니까 약 3배가 차이 난다. 기계적으로 대입해도 살림의원에서는 나의 고통에 3배 더 관심을 기울여 준다. 같은 의료보험료를 내는 데 억울하다.

물론 이사가 해결책은 아니다. 추 원장과 같은 의료인, 살림의원과 같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우리 주변에 많이 생겨야 한다. 우리 몸에서 질병만 떼어서 바라보고 처치만 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고통에 귀 기울여 주는 치료. 더불어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보고 기댈 수 있는 의료. 우리 동네 주치의와 우리 동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의원이 필요한 이유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 동네 주치의의 명랑 뭉클 에세이

추혜인 (지은이), 심플라이프(2020)


태그:#왕진가방속의페민지므, #추혜인, #살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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