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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세강점기 때 옛 마산시가지.
일세강점기 때 옛 마산시가지. ⓒ 자료사진
 
마산(창원), 부산 출신 15명의 항일투사가 발굴되어 정부에 포상 신청이 되었다.

독립운동사료연구가 추경화씨는 국회도서관과 국가기록원 등의 자료를 검토해 마산 출신 9명과 부산 출신 4명, 기타 2명을 포함해 총 15명에 대한 포상을 국가보훈처에 신청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에 신청된 항일투사는 황의형, 서봉수‧서성수 형제, 나용봉, 김용찬, 정해인, 김민배, 조정규, 김홍규, 정영모, 추교경, 이춘근, 권동수, 박두수, 이응규 선생이다.

황의형(黃義馨, 1883~1946) 선생은 1919년 3월 21~26일 마산3.1운동 때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군중을 지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부산지법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 선고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서봉수(徐鳳洙, 1892~1938) 선생은 1919년 마산 3.1운동 때 투쟁하고 '내서 3.1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선생은 4형제가 모두 동참했으나 2명(서성수)만 기소되어 부산지법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이 언도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서성수(徐聖洙, 1897~1967)은 마산3.1운동 때 지휘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부산지법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나용봉(羅龍鳳, 1895~1952) 선생은 마산 오동동 출신으로, 마산 3.1운동에 동참하여 마산 추산정에서 군중을 지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부산지법 마산지청에서 징역 4월형이 언도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용찬(金容贊, 1901~1955) 선생은 마산 회원동 출신으로, 마산3.1운동에 가담했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또 선생은 1928년 4월 고려 청년회 경남도책으로 활동하고 1932년 2월 볼세비끼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경남적색교원노조사건으로 또 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해인(鄭海仁, 1911~1946) 선생은 진해 계광학교를 졸업하고 제사공장 노조 설립을 주도하고 파업을 선동하다 1935년 일경에 피체되어 500일간 옥고를 치르고 1937년 9월 13일 출옥했다. 선생은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만 36세에 별세했다.

김민배(金民培, 1915~1967) 선생은 1930년 9월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일'과 이후 3일간 박정환‧조원갑‧서도인‧최해도‧이준도 항일투사와 함께 '일제 타도'를 외치고 관련 문건을 진해 일원에 배포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진해 출신인 조정규(趙正奎, 1914~1992) 선생은 1930년 일본 신호시로 건너가 미곡상 점원으로 일하면서 북신상업학교 야간부를 졸업했다. 이후 선생은 북신상업학교 유학생들과 함께 일본왕을 반대하고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미결 2년이 지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김홍규(金洪圭, 1916~1982) 선생은 마산 동성동 출신으로, 마산공업보통을 졸업하고 1930년 사회주의 활동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선생은 1935년 11월 부산 마산 산업별 노조협의회 활동으로 일경에 잡혀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형 받고 실제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부산 출신인 정영모(鄭永謀, 1904~1987) 선생은 부산청년동맹회에서 사회 과학을 연구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려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부산지법에서 징역 1년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추교경(秋敎慶, 1906~1950) 선생은 신흥청년회에서 주관하는 야학교 교사로 7년간 봉사하고 무산노동자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활동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934년 7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춘근(李春根, 1912~1993) 선생은 1933년 성상호, 이금복, 박경윤 등과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여공을 위하여'라는 격문을 배포하고 환대고무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937년 1월 징역 1년 6월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권동수(權東銖, 1914~1945) 선생은 동래고보 재학 중 반제전위동맹을 조직하고 사회과학연구회 회원이 되어 무산청년회 등과 비밀 결사를 만들어 관련 문건을 부산, 마산. 진해에 배포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부산지법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박두수(朴斗洙, 1892~1961) 선생은 1919년 3월 23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노산공원에서 고광세, 손우상, 강금수, 이계철 등과 장날에 학생‧시민들을 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5월 6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태형 90도를 맞고 혼절했다.

이응규(李應奎, 1907~1950) 선생은 1926년 양정학교 졸업하고, 1927년 동경정측영어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계통에 가입하였다. 선생은 1927년 2월 <이론투쟁> 기자와 집필진 활동하고, <봉화> 잡지를 영남 일원에 배포하고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지법에서 징역 4년형이 언도되었다.

추경화씨는 28년간 항일투사 1000여 명을 발굴했고, 이들 가운데 189명이 정부포상을 받도록 했으며, <항일투사열전>을 펴내기도 했다.

#항일투사#추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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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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