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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무실로 상담전화가 온다. "내가 인권침해를 당했어요.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종종 걸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들은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경찰서든, 법원이든 어디를 찾아가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인권침해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면 다행이겠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울먹이는 목소리들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에게도 조력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인권이었기 때문이다. 인권은 억울하고 차별 받는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장애인과 이주민이,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성소수자가, 우리 사회의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모든 이들과 빼앗기고 쫓겨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은 법원, 경찰이 아닌 바로 인권이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인권은 정권의 정치적 행보에 휘둘려왔다.

지난 정권에서 보여준 국가인권기구 독립성의 훼손과 국가가 자행한 온갖 인권침해를 통해 인권의 기준이 정권의 입맛대로였음을 확인했다. 보편적인 인권의 가치들,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인 인권이 한국사회에서는 정치적 노림수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는 듯하다. 바로 인권을 정치적 도구로 삼아버린 자유한국당 때문이다.

당명 이외에 바꾼 것 없는 자유한국당

충남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등 40여개 충남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충남인권조례지키기 공동행동'은 22일 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한국당 소속 충남도의원들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정 종교세력의 표를 얻기 위해 인권조례를 없애려 한다"며 "폐지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충남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등 40여개 충남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충남인권조례지키기 공동행동'은 22일 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한국당 소속 충남도의원들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특정 종교세력의 표를 얻기 위해 인권조례를 없애려 한다"며 "폐지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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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 비리로 불거진 국정농단 사건을 경유하면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위한 촛불을 들었다. 전 정권의 최측근들은 줄줄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 구속되었지만, 비리로 얼룩진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인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은 공범의 누명을 벗기 위해 셀프 쇄신을 감행했다. '반성'한다고 외쳤지만 구체제 인사들이 중책을 맡고, 정작 변화된 것은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것 이외에 없었다. 

자유한국당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택한 길은 새로운 시작과 변화가 아닌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일부 개신교단체와 합심해 인권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대선토론회와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주요 후보들 검증절차에서 자유한국당이 던진 '동성애에 찬성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후보를 검증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존재를 찬반으로 나누는 차별이었고, 성소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자유한국당이 내건 인권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프레임, 사회적 갈등이라는 언어는 차별과 배제 없는 보편적 인권이란 기본적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

자신들의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기 위해 일부 기독교세력과 합심하여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고 그들의 인권을 부정하는 행위는 한국사회의 인권 현실을 후퇴시키고, 정치의 장인 국회를 막말 경연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유한국당의 행보는 지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충청남도 도민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는 인권의 국제규범화에 따라 전국적으로 퍼진 인권도시의 흐름 속에 2012년 당시 자유선진당 소속이던 송덕빈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 의원들이 주도적으로 발의해 제정되었다. 하지만 최근 자유한국당 충청남도 도의회는 "충청남도인권조례로 인해 도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도민 뜻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조례를 폐지"하겠다며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충청남도 도의회 김종필 의원의 대표발의로 25명의 의원(자유한국당 24명, 국민의당 1명)이 폐지 발의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은 '갈등'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댔지만 그 속내는 일부 개신교단체들이 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폐지를 요구한 것이고, 자유한국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안위를 위해 그들과 손을 잡은 것뿐이다.

이 폐지안은 1월 29일 충청남도 도의회 행정자치위 회의를 거쳐, 2월 2일 본회의에서 폐지 여부 결정을 앞두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도민들을 위한 결정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행보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은 정작 충청남도 지역의 도민들이다. 충청남도 인권조례는 도민인권이 존중되는 지역사회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조례가 있었기에 인권센터가 설립되고, 인권위원회가 구성될 수 있었으며, 인권정책기본계획은 물론 인권영향평가, 인권교육도 실시할 수 있었다. '인권조례'가 모든 인권사안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해결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인권조례가 존재하기에 지역사회에서 인권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충청남도 인권조례를 통해 면접과정에서 장애를 증명해야 했던 피해자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할 수 있었고, 시대착오적인 백마강 유람선 안내방송을 개선하고, 역사 유적지 안내를 인권의 관점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낼 수 있었다. 충청남도의 인권조례는 부당한 대우를 당한 도민들의 억울함을 해소해주고, 지역을 인권의 관점으로 개선 할 수 있는 다양한 권고를 내렸다. 그러면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은 누구일까? 도민의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인권조례일까? 아니면 충청남도 도민들의 인권증진을 위한 창구였던 인권조례를 일부 개신교 세력의 입김을 근거로 무너뜨리려는 자유한국당일까? 그 답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인천광역시를 제외한 전국 16개 광역시도에서 인권조례가 만들어졌다. 각 지역에서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밑거름 삼아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인권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자유한국당과 이에 합심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세력들은 충청남도 인권조례안 폐지안 발의,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등 전국 시도의 인권조례를 무력화하기 위해 꿈틀대고 있다. 2018년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가 '인권선언'을 통해 다시는 야만의 시대를 맞이하지 말자고 약속한 지 70년이 된 해이다. 그런 소중한 약속의 해에 자유한국당은 차별과 배제, 소수자 혐오를 앞세워 인권조례를 폐지를 시도하며 야만의 시대로 인권의 시계를 되돌리려 시도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러한 자유한국당의 행보가 국제적 흐름에 위배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충청남도의 도민들과 지역단체들은 자유한국당의 행보에 분노하고 있다. 전국의 인권단체와 활동가들은 충청남도를 주시하고 있다. 인권을 후퇴시키는 부끄러운 역사의 한 줄을 기록할 것인가? 이제라도 멈출 것인가? 충청남도 도의회의 선택을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충남원정대에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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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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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입니다.



태그:#자유한국당, #충청남도, #인권조례, #갈등,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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