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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얼마 전 퇴임한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다. 선생님은 한국철학회장을 역임하고,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란 제목으로 48회 강연, 복원된 숭례문의 상량문을 쓴 원로 동양철학자다.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듯한, 재미있고 유익한 강의 덕에 교수 재임 시절 성태용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틈나는 대로 제자들에게 밥을 자주 사주셨고, "최고의 명강은 휴강" 등 일명 '아재개그'의 달인이었다.

(왼쪽부터)필자의 친구, 필자, 성태용 선생님. 이날 저녁으로 보리밥을 먹으며 임창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2차로 선생님의 단골 노래방에 갔다. 중후한 음색을 지닌 선생님이 부른, 배호의 노래는 절창이었다.
 (왼쪽부터)필자의 친구, 필자, 성태용 선생님. 이날 저녁으로 보리밥을 먹으며 임창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2차로 선생님의 단골 노래방에 갔다. 중후한 음색을 지닌 선생님이 부른, 배호의 노래는 절창이었다.
ⓒ 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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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선생님을 만나자고 한 건 오랜만에 뵙고 근황을 여쭙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선생님의 은사인 청명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임창순 선생은 현대 한학과 민주화운동에서 주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선생 스스로 저서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걸 겉치레로 여긴 탓에, 선생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이 적다. 이에 우리는 오늘날 임창순 선생에 대한 제자의 회고를 남기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성태용 선생님은 임창순 선생의 지곡서당 1기 제자로, 현재 임창순 선생의 호를 딴 청명문화재단의 이사를 맡고 있다. 우리는 선생님으로부터 당신 스승인 임창순 선생(아래 존칭 생략)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악력, 연보 같은 딱딱한 소개보다는,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되도록 '야사'를 주문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4.19혁명부터 인혁당까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임창순 선생님. 뒤에 지곡서당 현판이 보인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임창순 선생님. 뒤에 지곡서당 현판이 보인다.
ⓒ 청명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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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충북 옥천에 태어난 임창순은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했고, 달필이었던 덕에 인쇄소에서 글씨를 써서 인쇄 복사하는 일을 했다. 심지어 무당을 따라다니며 굿판 고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서당에서 공부를 했을 뿐, 학교 졸업장 하나 없었던 임창순은 해방 후, 독학으로 교원 시험에 합격해 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게 됐다. 이후 한학자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됐다. 그런데 임창순이 부임한 지 몇 년 안 돼 나라에 일대 사건이 터지게 된다.

바로 4.19혁명이다. 부정선거와 김주열 열사 사망 등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점차 터져나오던 무렵, 4월 18일 정권 비호세력인 반공청년단에 의해 고려대 학생들이 피습당했다. 이에 대학생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임창순이 재직 중인 성균관대 학생들만 해도 무려 3,000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난사했고 시위대의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했다. 19일, 일명 '피의 화요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유혈진압에도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고, 드디어 25일 임창순을 비롯한 교수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국 27개 대학의 300여 명의 교수가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국회까지 행진했다.

이때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단 행진의 플래카드를 쓴 이가 임창순이었다. 결국 26일 이승만은 하야했다. 이후 혁명 정국에서도 임창순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참여해 남북평화통일 운동을 하는 등 사회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하지만 해방정국도 잠시, 1년 뒤 5.16쿠테타가 일어나 임창순은 용공분자로 찍혀 교수직을 물러나게 됐다.

4.19혁명 당시, 교수단 시위 현수막 글씨를 쓰고 있는 임창순 선생.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4.19혁명 당시, 교수단 시위 현수막 글씨를 쓰고 있는 임창순 선생.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 4.19혁명기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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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임창순은 지곡서당을 세워 임종 때까지 평생 후학양성에 힘썼다. 앞서, 임창순은 인민혁멱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줄곧 정부 요시찰대상으로 지목돼 정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임창순 문하에는 한학과 사회에 관심이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사학자 강만길 교수를 비롯해 한학계의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단지 학문에만 머물지 않는 사회참여적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임창순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해 청명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사후에도 재단을 통해 민족문화 증진과 통일,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재단은 오늘날에도 태동고전연구소를 통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또 '임창순상'을 제정해 신영복 교수, 이이화 선생, 한승헌 변호사 등에 상금과 상을 수여해오고 있다.

한글전용을 주장한 1914년생 한학자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임창순 선생님의 글씨. 임창순 선생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글귀의 앞문장만 해석하면, "養士六百年成均傳統 何其久也, 선비를 길러온 육백년 성균의 전통이 제법 길구나"가 될 것 같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임창순 선생님의 글씨. 임창순 선생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글귀의 앞문장만 해석하면, "養士六百年成均傳統 何其久也, 선비를 길러온 육백년 성균의 전통이 제법 길구나"가 될 것 같다.
ⓒ 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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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순의 특이한 점은 한학자임에도 유교 구습에 철저히 반대했다는 것이다. 가령 2016년에도 학교 교과서를 한글 전용으로 해야 하는지, 한자 혼용을 해야 하는지 설왕설래가 많았다. 어느 정도 한문에 조예가 있다 싶은 사람들은 대체로 한자 혼용을 주장했다.

그런데 임창순은 광개토대왕비문 해석, 단양적성비 판독을 맡을 정도로 한학과 금석문의 당대 대가였음에도, 일찍부터 한글전용을 주장했다. 임창순은 제자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되 "너희들이 한문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운 한자어, 한문 문장을 우리말로 바꾸는 데 힘쓰기 위해서다"고 당부했다.

또 지금으로서는 놀랄 일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임창순은 제자들과 서슴없이 '맞담배'를 했다. '기호품인데 뭐 상관있느냐'는 것이었다. 절을 받는 것도 거부했다. 지금도 보수적인 집에서는 자식이나 제자가 부모, 스승에게 큰절을 올린다.

한번은 스승이 으레 저러는 것이겠거니 하고 한 제자가 큰절을 했다가, 임창순에게 호되게 혼났다는 일화가 있다. 이외에도 유교적 구습, 허례, 양반 놀음 등을 임창순은 경멸했다. 이는 그가 한학자이기 이전에 1914년생 나이를 생각해도 매우 앞서나간 것이었다.

또 학자들은 자신의 저서와 사상을 남기고 싶기 마련인데, 임창순은 저서를 내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묶어 싣는 것을 매우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리고 당시에는 유학자들이 유학 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여기고 하대해 다른 동양철학과 교류가 적었는데, 특이하게도 임창순은 거의 동년배인 성철스님 초상화의 발문을 썼다. 

청명문화재단 사무실 입구. 원래 청명문화재단 산하의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는 한림대의 후원을 받아 남양주에서 후학을 양성햇으나, 한림대의 지원이 끊긴 현재는,  종로오피스텔의 작은 사무실을 청명재단과 함께 쓰고 있다.
 청명문화재단 사무실 입구. 원래 청명문화재단 산하의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는 한림대의 후원을 받아 남양주에서 후학을 양성햇으나, 한림대의 지원이 끊긴 현재는, 종로오피스텔의 작은 사무실을 청명재단과 함께 쓰고 있다.
ⓒ 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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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성태용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학창시절 학생운동 경력 탓에 정부 요시찰 리스트에 올라갔던 성태용 선생님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교수임용에 합격하고도 요시찰 리스트에 있었던 탓에 교수 임용이 안 될 뻔했다.

다행히 기존에 교류하던 사회 명사들의 신원보증을 받은 덕에 건국대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그간의 고초를 잘 아는 스승 임창순은 제자의 임용을 매우 기뻐했다. 그럼에도 "교수 자리를 무슨 목숨처럼 연연하지 마라"고 한 마디 덧붙였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으레 하는 조언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4.19 당시 학생들의 희생을 목도하고는 교수직을 버리고, 어쩌면 목숨까지도 담보한 채 거리에 나왔던 스승의 말이었기에 제자에게는 더욱 와 닿는 금언이었을 것이다.

'노동자 한학자' 임창순

바둑을 두는 임창순 선생. 임창순 선생은, '임전무퇴의 자세'로 스승과 내기바둑에 임하는 제자 성태용을 아꼈다.
 바둑을 두는 임창순 선생. 임창순 선생은, '임전무퇴의 자세'로 스승과 내기바둑에 임하는 제자 성태용을 아꼈다.
ⓒ 청명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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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선생님은 우스갯소리로 스승 임창순을 일컬어 '빨갱이 노인네'라고 했다. 비판적이고 삐딱한 사람, 시대에 앞서간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뜻의 반골이라는 나름 '애정어린 표현'이다.

그렇다면 임창순은 어떻게 한학자임에도 이렇듯 깨어있는 사고를 지닐 수 있었을까. 그 연결고리가 궁금했다. 임창순에게 진보적인 사상을 준 스승이나 영향을 주었다고 할만한 분이 있느냐는 물음에 성태용 선생님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나는 원주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장일순 선생과 그의 제자 이현주 목사의 대화 한 토막이 떠올랐다. 한번은 이 목사가 장일순 선생에게 물었다. "예수, 노자 같은 성인들은 누구한테 배웠을까요?" 장일순 선생이 답했다.

"나도 한때 그게 궁금했는데, 딱히 그분들의 스승이라 할 만한 분은 없더라고. 내 생각엔 자연이 아닐까? 자연을 보고 배우신 게 아닐까 싶네."

이를 빗대어 나도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면, 다른 한학자들이 어느 정도 자산을 갖춘 양반집에 태어나 귀하게 자란 반면, 임창순은 젊어서 현장 노동자로 전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경험이 아마 임창순의 진보적인 한학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을 것 같다.

현장 노동자로 최하층의 열악한 생활을 몸소 겪으면서, 그 앞에 양반의 허례허식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또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단지 책 속의 학문이 아니라 학문에 기반한 실천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은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임창순 선생에게 '노동자 한학자'라는 자칫 발칙한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태그:#청명 임창순, #청명문화재단,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지곡서당, #성태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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