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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차례상.
 추석 차례상.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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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하다. 아내와 두 아이들의 기침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가을은 선선해진 바람과 드높은 하늘로 우리에게 찾아오지만, 그보다 더 살갑게 혹은 잔혹하게 추석이라는 명절과 함께 다가오기도 한다. 한낮 무더위는 여전하고 에어컨 실외기는 묵묵히 돌아가는데, 또 다시 추석이 온다. 시릴 정도로 눈부신 파란 하늘 위로 추석의 기억 몇몇이 비행운을 그리며 지나간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마흔을 넘긴 중년에게 추석은 세 부분 쯤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취업 전 부모님께 손 벌리고 살던 때와 취업 후, 그리고 결혼 후다. 학생 때의 기억은 중간고사를 목전에 두고 전공서적이 가득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고향으로 향하던 모습이다. 책장을 펼쳐도 눈에 들어올 리 없건만, 부모님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묵묵히 책상 앞을 지켰다.

결혼 후부터는 연휴를 절반으로 나누어 본가와 처가에 다녀온다. 전국일주에 준하는 거리를 이동하고 나면 긴 명절 연휴가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간다. 결혼 후의 추석에 대한 기억은 무엇보다 처가에서의 달콤한 휴식이다.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사위들과 술 한 잔 하기만 손꼽아 기다리시는 장인어른의 환대는 기본이고, '이서방, 피곤할 텐데 들어가 눈 좀 붙이게'라며 어깨를 떠미시는 장모님의 사위사랑까지. 먹고 자고, 일종의 유토피아다.

그 해 추석, 마침내 등록금으로부터 해방됐다

추석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 중에 지금까지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뭐니 해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의 추석이다. 2001년 2월, 남들보다 1년을 더 다녀서 7년 만에 마침내 학교를 졸업했다. 시험으로부터의 해방보다, 부모님께 씌어드린 학사모보다 더 기뻤던 것은 바로 온 가족을 옥죄던 등록금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그 해, 어머니는 야식집 문을 닫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부터 어머니는 식당일을 시작했다. 대여섯 평 남짓한 작은 식당에서 칼국수를 팔았던 기억이 난다. 식당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나는 숙제를 하고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안 되는 집의 전형을 따르듯 칼국수에서 시작해 삼겹살, 치킨에 보신탕을 거쳐 냉면집으로 갈아탔다가 최종적으로 야식집까지, 숱한 업종 변경과 그에 따른 고난이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어머니는 명절상 준비를 아들들에게 일찌감치 전수하셨다. 중학교 때 전 뒤집개의 바통을 이어받은 후로 오늘에 이르면서, 나는 제사상에 올리는 모든 부침개를 장보기부터 완성품까지 해낼 수 있는 능력자가 되었다. 전 부칠 때 기름은 충분히 둘러야 하고, 두부는 자주 뒤집으면 으깨지니 약한 불로 부치다가 두 번만 뒤집는 것이며, 산적꼬치는 무엇보다 색깔의 배열에 신경써야한다는 등의 깨알 같은 노하우를 나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전수받았다.

기름을 두른 형태로 보나 앉은 자세로 보나 하루이틀 전을 부친 솜씨가 아니다
▲ 전 부치는 내 모습 기름을 두른 형태로 보나 앉은 자세로 보나 하루이틀 전을 부친 솜씨가 아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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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명절 전날이면 식당 옆에 붙은 살림집에서는 전을 부치는 냄새가, 식당에서는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 냄새가 동시에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애잔한 풍경은 2001년 설날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어머니가 이십 년 만에 전업주부로 돌아오신 2001년, 그해의 추석을 기억하는 이유다.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야식집을 정리하고 마침내 작은 전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아이들에게 종종 엄마는 반 지하에 살았었고, 아빠는 식당 옆 골방에 살았다는 말을 하면 농담인 줄 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처음 아파트라는 곳에 살아보게 된 그해의 추석. 박봉의 시기였지만 최대한 지갑을 두둑이 채우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봉투 받은 어머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잡고 역 앞 시장까지 장을 보러 다니던 것은 친숙한 기억이다. 하지만 그해의 추석 장보기는 느낌이 달랐다. 내 지갑에서 나가는 과일값이기에 빛깔이 더 선명해 보였고, 내 주머니에서 값을 치르는 고기는 갓 잡은 듯 더욱 신선해 보였다. 물건 값을 하나하나 치를 때마다 어머니는 극구 만류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사람 구실한다는 생각이 들어 행복감에 자꾸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차례준비를 위해 온 식구가 둘러앉았다. 그래봤자 네 명에 불과한 가족이었지만, 네 식구가 함께 모여 명절을 보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절이면 더욱 심해지는 아버지의 주사(관련기사: 명절마다 술상 엎어버리는 아버지가 미웠다)와 머리 큰 자식들의 반항이 부딪혀서, 우리 집 명절 분위기는 흉흉하거나 잔혹할 때가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전을 부치는 모습은 극히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오랜만에 며느리 역할 제대로 하신다는 어머니의 웃음 속에는 자식 뒷바라지에 청춘을 바친 여인의 헛헛함과 짓눌리던 생활고에서 벗어났다는 여유로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나이 탓인지, 줄어든 책임감 탓인지 전보다 나약해 보이던 아버지는 곁에서 조용히 막걸리 잔을 비우셨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부모님께 용돈을 챙겨 드렸다. 대학 다니는 아들 기죽지 않게 꼬박꼬박 챙겨주시던 용돈과 하숙비의 출처가 이웃집에서 빌린 돈이거나 현금서비스였다는 걸 알고 난 후였기에 명치끝이 저릿해짐을 느꼈다. 봉투를 꽉 쥔 당신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차마 고맙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멋대가리가 없는 거니까.

2001년 그해. 훈련소에서 정주영 회장의 사망이야기를 들었고(당연히 거짓말이라 생각했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신혼여행으로 난생 처음 해외를 나가며 밟게 될 인천 국제공항이 개항을 했으며, 무엇보다 누구의 소행인지 여전히 의심쩍은 9.11 테러로 인해 전 세계에 테러의 공포가 확산되던 한 해였다. 하지만 이러한 떠들썩한 사건들보다 내 가슴에 진하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앉아 전을 부치던 그해의 추석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손주들의 사진을 보며 추석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아내라면 절대 사줄 리 없는 비싼 장난감을 장롱 깊숙이 숨겨두시고, 냉장고 가득히 손주들 먹거리를 채워두셨을 게다. 평생을 바라던 작은 아파트의 안주인이 되어, 부지런히 쓸고 닦기를 반복하고 계실 것이다. 앞머리가 희끗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도 추석은 결국 어머니의 품인 것이다.

이제 두아이의 아빠가되었지만 추석하면 여전히 어머니의 품이 생각난다
▲ 추석날 한복을 입은 두 아들 이제 두아이의 아빠가되었지만 추석하면 여전히 어머니의 품이 생각난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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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추석,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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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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