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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 세상만사에 희로애락이 깃드는 이유는 불멸의 부재 때문이리라. 사라지기에 아름답고, 잊히기 때문에 기억하려 애쓰는 유한한 존재들. 엄마와의 동거도 결국엔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단막극이었다. 주인공들은 언젠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엄마 곁을 떠난 지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처음에 생각했던 6개월을 채우지 못해 미안했다. 함께 하려 마음 먹었던 일들을 전부 실행하지 못한 아쉬움도 컸다.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연에 의해 틀어지는 물줄기의 방향을 혼자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엄마와의 동거가 유야무야 흐릿한 끝을 맺었더랬다.

동해로 온 엄마

동해에서 한 달간 혼자 살면서 틈틈이 찍은 사진을 엄마에게 보냈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춥지는 않냐, 그렇게 엄마와 아들다운 대화만 오가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한테 바다는 언제 보여줄 거냐?"라는 낯선 질문을 받고 순간, 커다란 해일이 머릿속을 덮쳤다.

우리 엄마도 이런 말을 할 줄 아네? 평생 먼저 어디 가자, 뭐 먹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당신이다. 당장 짐부터 싸, 약이랑 챙기고. 이것이 동해 한달살이를 끝내자마자 엄마랑 다시 강원도를 찾은 이유다.

강원도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한 사람이라기보다, 강원도 구경 한번 못 시켜준 불효자가 뒤늦게 정신 차린 꼴이랄까. 엄마와 단 둘이 떠난 강원도 여행은 엄마와의 동거를 매듭짓는 끝이자 새로운 출발인 셈이다. 강원도 여행에 관한 글이지만 여행지나 맛집 소개는 한 줄도 없다는 점, 미리 양해 바란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고, 마지막까지 평탄치 않았던 엄마와의 여행이었다. 가장 많이 신경이 쓰였으나, 가장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날씨다. 강원도로 출발하는 날은 푸른 하늘이 드문드문 보였더랬다. 영업시간까지 검색하고 갔던 평창의 한 식당이 임시휴업이어서 다른 식당을 찾을 때까지도, 여행의 재미는 변수라고 생각했다.

속초에 도착하자 바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바닷가니까, 당연히 바람이 부는 거지. 파도가 좀 넘실거려야 진짜 바다지, 잔잔하면 호수지. 서로 위안하고, 격려하며 첫날을 보냈다. 아니, 첫날밤을 맞이했다.

바람이 창을 흔드는 소리 때문에 새벽녘에 잠에서 깼다. 5성급까지는 아니어도 엄마 모시고 가는 여행인지라, 호텔도 신중하게 골랐다. 높은 층을 배정한 것은 전망을 위한 호텔 측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지나친 배려는 독이 되기도 한다.

방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 정도의 바람.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쓰레기 수거통이 나뒹굴 정도의 바람과 함께 둘째 날을 맞았다. 그날, 강릉에서는 커다란 산불이 나서 인명 피해까지 입을 정도였다. 속초 토박이 지인도 이런 바람은 드물다고 할 정도였으니, 관광객이 느끼는 바람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엄마의 한 마디는 애처롭고, 구슬펐다.

"촌놈이 난생처음 장땡 잡으면 전깃불이 나간다더니, 이 년의 팔자가 그렇지, 뭐."

바람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비가 내렸다. 강원도 여행은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핵심인데, 잔뜩 흐린 하늘과 성난 바다는 우리의 입지를 촌놈으로 굳혀버렸다. 그래도 방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화라도 보러 가자며 엄마를 달랬다.
 
바람이 너무 거세서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날이었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은 엄마와 나.
▲ 속초 어느 영화관에서 바람이 너무 거세서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날이었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은 엄마와 나.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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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에 종종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관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혼자인 경우가 더러 있다. 이번에도 엄마한테 생색 좀 내려고, 엄마를 위해 영화관 하나 전부 예매했어,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텅 빈 멀티플렉스. 티켓박스 직원조차 자리를 비운 을씨년스러운 멀티플렉스에서, 엄마를 위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때론 텅 빈 극장이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위가 좋지 않은 엄마에게 팝콘은 언감생심이고, 속초중앙시장에서 포장해온 오징어순대를 씹으며, 우리는 딱히 재미있다고 볼 수 없는 한국 영화 한 편을 봤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퍼 보이는 상황, 인생은 그러하다.

객실을 저층으로 옮기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하늘은 촌에서 온 모자를 꾸준히 감시하고 있었다. 장땡은커녕 패조차 주지 않을 기세의 매정한 하늘. 셋째 날, 아침은 밝았으나, 미세먼지는 동해 일출이라는 신비로움을 앗아갔다. 외출 자제. 천식이 있는 엄마에게는 바람을 피하니 된서리가 내린 격이다. 강릉에 들러 점심을 먹고, 숙소가 있는 정동진으로 내려오니 그나마 대기가 살짝 좋아졌다.
 
엄마 모시고 꼭 한번 와야지 했던 정동진의 한 호텔. 엄마는 민박 세대다.
▲ 정동진 숙소 앞에서 엄마 모시고 꼭 한번 와야지 했던 정동진의 한 호텔. 엄마는 민박 세대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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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분가량, 정동진 해변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모래사장을 밟은 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야외 관광이랄까? 다음날은, 중국발 거대 황사가 예보되어 있었다.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맞지 않기를 기대하는 날이 있다. 소풍이나 운동회, 오랜 시간 준비한 행사들이 그렇다. 염원은 종종 하늘에 닿아 기적을 일으키곤 한다. 다만, 촌에서 온 자들은 열외다.

넷째 날의 황사와 미세먼지는 가히 폭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간다 한들, 우리는 거의 안개와 같은 풍경에 놓여질 것이 뻔했다. 고심 끝에 엄마와는 평생 가볼 것 같지 않은 전시관으로 향했다. 국내 최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실내공간. 차를 몰고 가면서도 사실 내키지 않았다. 비싼 입장료 내고, 뭔 지랄이냐고 욕만 오지게 먹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해서 실내 가볼만한 곳으로 택한 강릉의 아르떼뮤지엄
▲ 강릉아르떼뮤지엄-1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해서 실내 가볼만한 곳으로 택한 강릉의 아르떼뮤지엄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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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엄마를 온순하게 아니, 자비롭게 만들었다. 5시간 차 타고 온 강원도인데, 그 어떠한 것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노라. 엄마는 마침내 보살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예상보다 훨씬 신기하고, 재밌었다. 엄마는 연신 탄성을 외치며 말했다.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들 참 많아,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지? 수학여행에서 63빌딩을 처음 본 여중생처럼, 엄마가 행복해 보였다.
 
다소 생소한 전시관이었는데, 엄마는 무척이나 재미있고, 신기해 하신다. 엄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린 순간이다.
▲ 강릉아르떼뮤지엄-2 다소 생소한 전시관이었는데, 엄마는 무척이나 재미있고, 신기해 하신다. 엄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린 순간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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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엄마랑 함께 떠난 4박 5일의 강원도 여행은 별일 없이 끝났다. 우리는 16부작 드라마를 정주행해서 13부까지 보았고, 서로의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10시간 이상을 잤다. 호텔 비용은 거의 본전을 뽑았다고 볼 수 있는 호캉스를 즐기다 왔다고, 맘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달리 생각한다고 뾰족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음 회에서는 엄마와의 여행을 통해 느낀 점을 몇 자 적어 보기로 한다.

태그:#강원도여행, #강릉아르떼뮤지엄, #정동진썬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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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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