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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16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있는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장남(신동주 회장)이 후계자"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아내 조은주씨, 민유성 고문, 남동생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등이 배석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16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있는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장남(신동주 회장)이 후계자"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아내 조은주씨, 민유성 고문, 남동생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등이 배석했다.
ⓒ 사진취재풀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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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막장 드라마'도 울고 갈 '막장 재벌'이었다. 지난 16일 오후 언론의 관심은 '왕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머물고 있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쏠렸다.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이날 오후 4시 아버지 집무실을 '접수'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 집무실 직원과 CCTV를 철수시키라고 통보서를 보낸 직후였다(관련 기사: 신격호 "후계자는 장남" 롯데 "신동주 이제 그만" ).

장남은 예정대로 오후 4시께 부인 조은주씨, 작은아버지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등 일행과 함께 현장에 나타났고, 롯데그룹 직원이 아닌 몰려든 취재진과 몸싸움 끝에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들은 이후 1시간 넘게 두문불출했고, 대신 산업은행 총재 출신인 민유성 SDJ코퍼레이션 고문과 홍보 담당 정혜원 상무가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놈의 '열쇠'가 뭐기에

정혜원 SJD코퍼레이션 상무(가운데)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 로비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이 위치한 34층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키를 요구하고 있다.
▲ '키를 주세요' 정혜원 SJD코퍼레이션 상무(가운데)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호텔 로비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이 위치한 34층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키를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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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롯데그룹 쪽에 왕회장 집무실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열쇠'를 요구했다. 왕회장 집무실이 있는 34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에서 카드키로 인증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장남 일행은 이 열쇠가 없어 롯데그룹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결국, 이 열쇠에는 '집무실 접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것이다.

롯데그룹 쪽은 왕회장 직계가족인 장남에겐 열쇠를 줄 수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제3자'에겐 줄 수 없다며 버텼다.

급기야 집무실에 있던 일행과 전화를 주고받은 민유성 고문은 이날 오후 5시 30분쯤 취재진에게 왕회장 깜짝 인터뷰를 제안했다. 영상촬영기자 2명, 사진기자 2명, 취재기자 2명씩 풀을 짜는 조건이 붙었다.

첫 번째 인터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곧 "한국과 일본 풍습에 따라 장남이 후계자가 되는 게 맞다"는 왕회장 발언이 수많은 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이미 왕회장은 신동주 회장을 통해 롯데그룹 경영권을 차남이 아닌 장남에게 물려주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취재진 앞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한 것은 처음이어서 파장이 컸다.

이 같은 발언이 나올 때마다 왕회장이 고령이어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식으로 은연중에 '건강 이상설'을 흘렸던 롯데그룹 쪽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왕회장은 94세 고령이어서 귀가 어두운 탓에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민유성 고문의 도움을 받긴 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왕회장은 취재기자 3명을 불러 진행한 두 번째 인터뷰에서 "앞으로 10년, 20년 더 일할 생각"이라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16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있는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16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에 있는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 사진취재풀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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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차남 쪽(롯데그룹)은 이날 저녁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왕회장을) 정신이상자라고 한 적도 없고 감시한 적도 없다"고 해명하면서도 "왕회장이 고령이고 심신이 허약해 (언론 앞에서) 그런 판단이나 말씀을 한 것"이라면서 발언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애썼다. 한마디로 왕회장 건강 상태(판단력)가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장남 쪽에서 자신들에 유리한 (일시적이고 단기적) 상황에 맞춰 언론 인터뷰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차남 쪽은 "장남이 이미 주총, 소송 등 법적 절차를 진행하면서 고령의 왕회장을 앞세워 불필요한 논란을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장 면세점 특허 등으로 회사가 어려운 데 국민과 정치권 눈 밖에 나게 생겼다는 볼멘소리도 흘러나왔다.

아버지 말고 믿을 게 없는 장남, 아버지 정신이 이상하다는 차남

'경영권 찬탈자'란 오명을 쓴'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9월 17일 오후 국회 본청에 도착하고 있다.
 '경영권 찬탈자'란 오명을 쓴'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9월 17일 오후 국회 본청에 도착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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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쪽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이날 왕회장 인터뷰는 경영권 쟁탈전에서 밀린 장남 쪽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고 의도한 게 분명했다. 인터뷰 시간도 짧았고, 철저히 장남 쪽에서 환경을 통제했다. 왕회장 건강 상태가 온전했다면 직접 자신이 나서 기자회견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남이 이렇게 고령의 왕회장을 앞세울 만큼 무리수를 둔 것도 결국 차남과 롯데그룹의 언론플레이 때문이다. 왕회장이 롯데그룹 경영권을 장남에게 물려주려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경영권 찬탈자'란 오명을 쓰게 된 차남 쪽은 '고령', '정신이상', '판단력' 같은 말을 흘리며 장남이 왕회장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갔다. 롯데홀딩스 주주총회 등으로 벼랑 끝에 몰린 장남이 기댈 곳이라곤 아버지 왕회장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느 부잣집 자녀들이 아버지 재산 싸움을 벌이는 주말 드라마라면 그래도 봐줄 만하다. 하지만 롯데그룹은 평범한 부잣집도, 드라마에 등장하는 허구의 기업도 아니다. 당장 한국과 일본에 수십만 임직원과 협력업체 직원 생존권이 걸려있는 거대 기업이다.

장남과 차남 누가 정통성 있는 후계자든, 경영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기업이 온전할 수 없다. '막장 드라마'는 시청자를 허탈하게 만들 뿐이지만, '막장 재벌'은 임직원과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열쇠(경영권)를 서로 차지하려는 신격호 일가의 '롯데판 <런닝맨>(SBS TV 예능 프로그램)'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롯데그룹, #신격호, #신동빈, #신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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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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