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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데 운하의 중심 리알토 다리와 인공섬 베니스를 만든 나무말뚝.
 그란데 운하의 중심 리알토 다리와 인공섬 베니스를 만든 나무말뚝.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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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는 22세기에 바다 속에 잠겨 사라질 것이다."

일부 기후학자들의 예측이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베니스도 바닷물에 잠길 운명이라는 것이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관광명소 베니스가 세계지도에서 사라진다니. 하긴 지금도 겨울철이면 만조 때 물에 잠기는 아쿠아 알타(Acqua Alta) 현상이 빈발하니 전혀 비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곧 바다 속으로 사라질 도시 베니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탈리아 보다 '베니스'에 가고 싶어졌다. 운하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사람이 만든 인공섬 베니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배와 보행자의 천국 베니스. 베니스 영화제, 베니스 비엔날레, 베니스의 상인 등등.

한국에서 베니스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에서 유럽까지 만주벌판과 시베리아 동토를 관통해 기차를 타고 가는 건 나의 오랜 꿈이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만큼은, 베니스 만큼은 비행기보다 기차를 타고 가고 싶었다.

그렇게 국경이 무의미한 유럽의 나라와 나라 사이를 세계시민처럼 자유롭게 기차로 월경하고 싶었다. 유럽대륙을 호랑이처럼 질주하는 초고속열차 안에서 젊은 날 프랑스문화원 같은 곳에서 즐겨보던 유럽영화의 한 장면쯤 스스로 연출하고 싶었다. 약간은 나태하거나 방심한 자세로, 한없이 여유있고 너그러운 표정을 하고 차창 밖 유럽의 너른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그렇게 유럽대륙을 주마간산일지언정 마음껏 구경하고 싶었다. 국민과 시민이 행복한 유럽의 땅 기운, 유럽인들의 사람 향기, 지역과 마을의 문화적 풍미를 직감적으로 체감하고 싶었다. 저마다의 나라 안에서 도시와 마을을 옮겨갈 때마다 바뀌는 국지적인 풍경과 기운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나라와 나라 사이에 놓여있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경계와 울타리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유럽공동체(EU)로 한데 묶여있으나 정작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 엿보고 싶었다. 그렇게 다른데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공생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유럽에서는 기차가 비행기보다 더 비싸요"

산조르로 마조레 섬과 성당이 바라보이는 아드리아해 베네치아만과 곤돌라 선착장.
 산조르로 마조레 섬과 성당이 바라보이는 아드리아해 베네치아만과 곤돌라 선착장.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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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행사의 단호하고 야속한 조언 앞에 유럽 초보 여행자의 간절한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유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투였지만, 진심과 배려심이 묻어있는 고마운 충고였다.

"유럽에서 기차는 비행기보다 더 비싸요. 시간도 더 걸리고."

가난한 여행자가 안고 있는 문제는 세계사나 지리학의 지식이나 인문학적 소양이나 사회학적 가치관이 아니었다. 언제나 결정적 문제는 돈과 시간이다. 돈과 시간이 없는 까다로운 고객 주제에 여행사를 자꾸 졸랐다. '착한여행사'라는 여행사의 자비로운 상호를 약점 삼아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다.

"그래도 나는 기차를 타고 싶어요. 돈도, 시간도 없지만 한두 번만이라도, 베니스 등 한두곳 만이라도 기차를 탈 수 있게 해주세요. 유럽에서 기차를 타보는 건 오랜 로망이었어요. 부디 헤아려주세요."

그렇다. 유럽 기차여행은 젊은 날부터 오래 품고 간직해 온 간절한 꿈이었다. 애타는 소망이었다. 지리적, 정치적 '외딴 섬' 한국을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을 기차로 질풍노도처럼 내달리는 꿈. 일단 서울역에서 국적 기차를 타고 휴전선부터 훌쩍 뛰어넘어 저 넓은 대륙으로, 광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는 꿈.

그렇게 개성, 평양 신의주를 거쳐 북녘의 산과 들, 강과 계곡을 굽이굽이 누비고 싶었다. 급기야 눈물 젖은 두만강가에 다다르면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단숨에 월경해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고 싶었다. 마침내 호연지기를 갖춘 대륙인으로, 세계시민으로 진화하고 싶었다. 그쯤에서 멈추거나 만족하는 작거나 약한 꿈은 아니었다.

그 길로 격동의 시기에 말을 타고 달리던 선구자들처럼, 또는 숙명적인 역마살의 유목민처럼 만주벌판을 끝없이 질주하고 싶었다. 비록 단기필마일지라도, 철마로나마 광야를 호령하고 싶었다. 압록강 쪽도 상관없다.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로 건너가 시베리아 동토를 가로질러 중앙아시아 내륙으로 거침없이 침투하고 싶었다. 아시아 대륙을 넘어 베를린,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를 잇는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까지 깊숙히 파고들고 싶었다.   

베니스에 청소차 대신 다니는 '청소배'

베니스에서 운하를 따라 운행하며 거리 청소를 하는 청소배.
 베니스에서 운하를 따라 운행하며 거리 청소를 하는 청소배.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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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차를 타보겠다는 간절한 소원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풀 수 있었다. 로마에서 베니스로 갈 때,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베니스 산타루치아역까지 4시간여 동안 시속 250km로 질주하는 초고속열차를 탔다. 트렌이탈리아(trenitalia) 열차회사의 프레시아르젠토(frcciargento)호. '은색 화살표'라는 이름처럼 날렵하고 쾌적했다. 이코노미석으로 70유로(한화 8만5천원) 쯤 되는 요금은 아깝지 않았다. 더 비쌌어도 기어이 타고 말았을 것이다.

베니스로 향하는 초고속열차의 차창 밖으로 <냉정과 열정 사이>와 우피치미술관의 그 피렌체, 협동조합의 도시, 볼로냐대학의 그 볼로냐가 초고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순간 기차에서 뛰어 내려 피렌체와 볼로냐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요동쳤다. 이성적으로 겨우 참았으나 아쉬움은 컸다. 언제 또 올 일이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먼 나라니까.

대신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다는, 기차역 담장마다 어김없이 새겨진 화려한 그래피티(graffiti)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문자를 그림처럼 형상화한 일종의 낙서이지만 유럽에서는 어디를 가나 거리의 예술인 그래피티를 감상할 수 있다. 기차를 타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면 기차역의 그래피티조차 구경하지 못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아뿔싸. 산타루치아역을 빠져나와 숙소를 가는 차를 타려는데 듣던대로 거리와 도로에 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베니스에서는 도심에서 자동차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 베니스에서는, 또는 베네치아(venezia)에서는 버스나 택시 대신 배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여행안내서의 지침이 전혀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채소가게도 배에서 좌판을 벌이고, 거리 청소도 청소배가 대신 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내리자마자 자동차가 아닌 배로 환승해야 하다니. 낯설었지만 역시 물의 도시 베니스의 이색적 풍경이라 흥미로웠다. 베니스영화제의 그 베니스, 베니스의 상인의 그 베니스, 한국의 광고회사들이 광고 촬영을 많이 하는 그 베니스. 순간, 그곳만의 고유한 지역성과 장소성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배가됐다.

역 앞에서 페로비아(ferrovia) 선착장을 찾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아닌 관광객들로 인해 보도가 정체될 정도의 관광명소 베니스. 이곳에서는 눈치껏 관광객들의 무리만 잘 쫓아다니면 된다. 시내버스가 아닌 운하 수상버스, 바포레토(vaporetto)를 타고 베니스에서 가장 크고 넓은 운하 수로 그란데 운하를 따라 리알토(Rialto) 다리 선착장에 내렸다. 베니스의 심장부다.  

베니스는 운하로 먹고 살지만, 한국의 4대강은...

베니스는 14~15세기 무렵 지중해를 장악했던 해상공화국의 중심이었다. 아드리아해 베네치아만에 자리잡고 있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567년에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정착하기 위해 이룩한 역사다. 석호(潟湖, lagoon) 위에 무수히 나무말뚝을 박고 나무기둥 뗏목을 이어서 이토록 신비하고 특별한 인공섬을 만든 것이다. 섬이 생긴 모양이나 역사 자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당연히 베네치아 주민의 대다수가 운하, 골목을 무대로 관광에 관련한 다종다양한 일을 하며 먹고 산다. 그중 단연 베니스 최고의 관광자원이자 산업유산은 운하다. 마치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수많은 운하의 물줄기는 118개 섬 사이를 이어주는 수로로 기능한다. 사람으로 치면 혈관에 해당된다. 하늘에서 본 지형은 마치 안동 하회마을의 태극문장처럼 환상적인 만곡을 이룬다. 평균수심은 3m가 채 되지 않아 두렵지 않다. 

운하와 석호 사이로 길이 약 10m 가량의 검은 곤돌라(gondola)가 쉴 새없이 들락거린다. 베니스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검은색이 된 이유가 재미있다. 당초 곤돌라에는 화려하게 쇠장식들도 부착되어 있었으나 1562년 사치금지법으로 모든 곤돌라를 검은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수백대의 곤돌라가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영업용이다.

곤돌라 사공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국가에서 허가를 준 운행자격증이 필요하다. 연소득이 1억 원이 넘어 베니스에서 가장 고소득자 직군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금이 너무 비싸다. 1인당 50유로(한화 약 6만 원). 선뜻 올라타기에는 부담스럽다. 곤돌라의 날렵한 모양이라든지, 곤돌라 사공의 다소 거만해보이는 표정이라든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택시승강장처럼 손님을 기다리는 빈 곤돌라가 눈에 많이 띈다.

대리석 돌덩어리 리알토(rialto) 다리는 그란데 운하의 무게중심에 해당한다. 건축물이라기보다는 16세기말에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술과 토목술을 동원해 만든 예술작품으로 부르는 게 타당하다. 다리 설계공모전에서 미켈란젤로를 제치고 안토니오 다 폰테가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베니스를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온갖 기념품점, 식당들이 몰려있어 베니스의 시장경제 경기를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 역할을 한다.

리알토 다리 만큼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도 유명하다. 특별한 스토리텔링 때문이다. 운하를 가로질러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른 다리와 달리 이 다리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다. 총독부가 있던 두칼레 궁과 피리지오니 누오베라는 감옥을 연결한다.

두칼레 궁에서 재판을 받고 나오던 죄수들은 이 다리를 건너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다. 다리를 건너갈 때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기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베니스에서 운하를 건널 때마다 4대강이 생각났다. 베니스에 운하가 없으면 베니스 시민들은 먹고 살 수 없다. 베니스에서 운하는 필수불가결하다. 시민 모두에게 이롭다. 숙명적이다. 운하가 곧 베니스다.

4대강 사업의 목적은 홍수 등 물 피해를 대비한다는 명분이었다. 절대 운하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십조원의 국민세금을 허비하고 생태계만 파괴했다는 합리적인 비판이 거세다. 4대강이 운하가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강행해야만 했던 이유는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때 자연과학을 공부한 나는 4대강 사업이 운하개발 사업이라고 믿는 편이다. 과학적으로는 4대강을 그냥 강으로 볼 수 없다. 그것도 국민의 행복이 아닌 몇몇 토건족과 그 배후 권력자의 탐욕적 사익 추구를 위한 부도덕하고 부패한 범죄행위라고 확신한다. 베니스의 운하 위에 놓인 탄식의 다리를 쳐다보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카사노바가 투옥될 감옥으로 건너가며 한숨을 내쉰 탄식의 다리.
 카사노바가 투옥될 감옥으로 건너가며 한숨을 내쉰 탄식의 다리.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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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유럽, #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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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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