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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무신론자다. 내게는 신의 존재나 권능을 믿는 일이 몹시 힘이 들고 어렵다. 정확하고 솔직하게 고해하자면 신의 본심을 잘 모르겠다. 이쯤 되면 종교 무지론자 또는 무관심론자에 가깝다. 최소한 불가지론자다. 신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을 나 같은 정도의 경험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속이 편하다. 

그래서 평소 신의 전지전능함과 구원의 복음을 기대하는 성직자, 신도들의 진지한 기분과 절박한 심정을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서로 낯설고 불편하다. 특히 체육관처럼 생긴 큰 교회는 타자들의 전당, 외계 같은 피안으로 느껴진다. 크면 클수록 성스럽기는 커녕 가장 세속적인 공간으로 다가온다.

종교는 큰 건축물을 위용을 빌려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설파하려는 듯하다. 그렇게 자꾸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직된 교조주의를 믿느니 차라리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을 믿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본질적 실재는 신앙의 영역'이라는 임마뉴엘 칸트의 불가지론도 어쩌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결국 신앙 또는 종교의 본질적 실재 자체가 불가해하거나 불가지하다.

결국 나로서는 그 흔한 '자기만의 신'도 없는 셈이다. 스스로의 자아나 실존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믿는다한들, 믿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불가항력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두렵거나 외롭지도 않다. 믿는 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한계와 숙명이라는 확고한 경험칙과 인식을 냉정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을 믿는 이유가,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가는 이유가, 종교와 교회에서 기대하는 효능이 위로와 치유, 평화와 행복감 따위인가. 그렇다면 나는 굳이 성전에 출석해서 설교를 듣거나 의식에 동참하지 않아도 된다. 산책, 숙면, 여행, 독서, 작문, 음악이나 그림 감상 등으로 충분히 개인적으로는, 신앙적으로 위로받고 치유받는다. 평화와 행복감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종교공동체 조직과 제도 안에서보다는 '자기만의 신'으로부터 더 큰 종교의 효능을 얻을 수 있다. 그 이상의 종교의 효능과 필요성은 나로서는 불가지하고 불필요하다. 따라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종교의 내용은 애매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종교는 오히려 자신만의 자율적인 현실 영역과 힘을 가진 어떤 실체"라는 울리벡의 주장이 어느 종교의 교리보다 더 믿음이 간다.

성베드로 성당(St. Peter's Basilica)과 바티칸광장
 성베드로 성당(St. Peter's Basilica)과 바티칸광장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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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신 같은 인간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다

종교에 대해 무지하고 무례한 내가 로마 바티칸시국에서는 하마터면 신을 믿을 뻔했다. 접신할 뻔했다. 성 베드로 성당 앞을 서성거릴 때 느닷없이 광장에 울려퍼지는 성가 몇 소절 이 나의 영혼을 흔들었다. 바티칸광장에서 나는 한 마라의 길 잃은 양의 심정이 되었다. 자꾸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신자 같았다. 제 정신을 차려 바티칸시국의 출구를 빠져나오자 무신론자의 본분으로 겨우 돌아왔다. 하지만 자꾸 멈춰서 뒤를 돌아 바티칸시국 쪽을 쳐다봤다. 신을 만나고 나온 기분이었다.

이게 다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이다. 바티칸 공화국에 입성한 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신자들의 행렬이 바티칸광장을 한바퀴 둘러싸고 있었다. 믿음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감히 성당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건달처럼 광장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바티칸광장에 한켠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교황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목도 내용도 알 수 없는 성가가 광장에 가득 울려퍼졌다.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나의 건들거리는 자세와 옷매무새를 고쳤다. 교황이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서 있으니 교황을 직접 알현하는 기분이 되었다. 새가슴은 벌렁거리고 묵직해졌다.    

순간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모습과 말씀이 겹쳐졌다. 그래서 더욱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교황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노란 세월호 리본을 왼쪽 가슴에서 한번도 떼지 않았다. 세월호 유족을 비롯한 한국민들의 아픔과 슬픔을 진심으로 함께 해주었다. 믿음을 주었다.

"세월호 유족의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당시 교황이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 받아 달자 누군가 다가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공격적 질문까지 받았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리본을 끝까지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어느 나라의 국왕보다 대통령보다 더 낮게 임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1세의 진면목을 봤다. 존경하고 신뢰하기로 했다. 신은 믿지 않지만 그가 믿고 전하는 신은 무조건 믿어보기로 했다. 신 같은 인간,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신앙심이 생긴 것이다. 그런 교황을 비록 직접 마주 보지는 못했지만 지난 2월 로마 바티칸시국이라는 같은 시공간을 잠시나마 공유한 기억은 소중하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이다. 가난하고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사회적 소수자들 편에 늘 선다. 검소하고 겸손하다. 소박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생활을 한다.

전임 교황들은 사도 궁전에 거주했는데 프란치스코는 성녀 마르타 호텔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전례를 집전할 때에도 화려한 장식이 없는 검소하고 소박한 제의를 입는다고 한다. 목에 거는 가슴 십자가는 추기경 시절부터 착용하던 철제 십자가를 그대로 걸고 있다. 그럴 사람이다.

산탄젤로 성에서 바라본 바티칸시국
 산탄젤로 성에서 바라본 바티칸시국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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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아닌 국가, 신이 다스리는 바티칸

그런 교황이 로마시 북서부의 바티칸시국(State della Citta del Vaticano)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에 대한 호감과 기대를 높이기에 충분하다. 바티칸이 자리잡은 곳은 고대 로마인들이 '점(占)치는 언덕'이라 부르던 곳이다.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훗날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베드로의 묘지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8세기부터 교황의 정식 주거지 교황령이 되었다. 1870년 이탈리아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가 로마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에게 넘어간다.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되면서 독립국가 바티칸시국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0.44㎢의 면적, 1천여 명이 안되는 거주자 등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나라다. 바티칸 궁전,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도서관, 바티칸 박물관 등 그 자체가 신을 믿든 안 믿든 모든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사방이 요새처럼 대리석 벽체로 둘러싸여 있다. 100여 명의 스위스 국적의 근위병이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교황을 지키는 전통과 풍경도 이색적이다. 스위스 용병이 유럽에서 가장 충성심이 높고 용맹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1506년부터 이어진 관습이다. 

바티칸시국 권위와 신성의 무게중심인 성베드로 대성당은 서기 90년에 예수의 열두 제자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건립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세기의 거장들이 교황과 추기경들의 외압을 받고 자의반 타의반 건축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그럼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는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던 걸까. 만일 100% 자의로 작업에 참여했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얼마나 더 위대한 예술작품이 탄생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성 베드로 성당은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알려진다. 단순한 건축물이라기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예술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다. 하루종일 줄을 서도 들어갈 수 없을 듯한 많은 인파 때문에 미처 성당 안은 들어가지 못했다. 인생에 몇 안 되는 후회와 미련이 남을 일이다.

황제의 무덤, 교황의 도피처 산탄젤로 성(Castel Sant' Angelo)
 황제의 무덤, 교황의 도피처 산탄젤로 성(Castel Sant' Angelo)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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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도피처 산탄젤로 성은 황제의 무덤이었다  

바티칸시국에서 이탈리아 로마시로 출국하면 아름다운 성 '천사의 성(산탄젤로 성, Castel Sant'Angelo)'과 마주친다. 피해갈 수 없다. 원통 모양으로 생겨 일단 눈에 띄고 아름다우며 신비로운 외관에 저절로 이끌린다.

하지만 창문도 거의 없고 너무 폐쇄적으로 생겼다 싶었더니 본디 로마 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무덤이었다. 이후 로마 황제들의 묘지로 쓰이다 5세기에 로마 교황청의 성곽이자 요새로 바뀌었다.

'산탄젤로'라는 이름의 유래는 5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흑사병의 퇴치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다 흑사병의 종말을 뜻하는 환영을 목격한다. 대천사 미카엘이 성의 상공에서 칼집에 칼을 집어넣는 장면을 본 것이다. 이후 천사의 성이란 뜻의 '산탄젤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성의 꼭대기에는 대천사 미카엘의 대리석상이 우뚝하다.

중세 시대의 교황은 교황청에서 지척인 이 성을 자연스레 애용했다. 불가피하고 위급한 혼란기 때 도피처로 사용했다. 산탄젤로 성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연결하는 요새화된 비밀통로를 통했다. 교황 니콜라오 3세가 통로를 만들었고 15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실제로 이 비밀통로로 바티칸을 빠져나갔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세월호 아이들이 바다에 자꾸 잠기고 있을 때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몹시 궁금하다, 우리 대통령이 그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한 정도로. 이제 더 이상 신이나 종교에 기대하지 않는다. 신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신이 발휘하는 권능은 좀 알듯하다. 그래서 일단 사람을, 우리를, 나를 먼저 믿을 뿐이다.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 최근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공식 인정한 교황. 그는 내가 왜 이런 무신론자가 됐는지 조금은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산탄젤로 성에서 본 로마 시내 전경
 산탄젤로 성에서 본 로마 시내 전경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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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 ‘사람이 행복한, 유럽’ : 문화와 예술, 자유와 평화, 협동과 연대, 자주와 자립, 이타심과 공동체의식, 신뢰와 질서, 생태주의와 생명사상 등 역사적 자산과 사회적 자본이 바탕이 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패러다임과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유럽의‘7개국(영국,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일상체험 여행기’



태그:#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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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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