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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나는 그들과 함께 산길로 남을 향해 걸었다. 남들은 북으로 후퇴하는데 우리 일행만 남쪽을 향해 갔다. 가는 도중 인민군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만약 낌새가 이상하면 사살해 버리고 도망갈 각오를 다졌다. 그날은 얼마 걷지도 못했는데도 날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어두운 길을 더듬어 농가를 찾아들어 갔다. "오늘 쉬어 갑시다. 우리는 작전상 후퇴 중입니다"하고 우격다짐으로 사정했다. 집주인은 선선히 쉬고 가라고 한 후 저녁상까지 차려 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 여섯은 무작정 남으로 향했는데 북으로 가는 피난민들을 많이 만났다. 우리와는 사정이 달랐지만, 그들 역시 북으로 가느라 여러 날을 걸어서인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피난길에 가족들과 생이별한 사람도 있었고, 고향서 가족을 데리고 오지 못해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거리는 사람, 전쟁 통에 가족 모두를 잃고 홀로 북으로 가는 사람, 사람마다 각기 애타는 사연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안전하게 남으로 가기 위해 낮에는 가능한 산에서 머루나 다래를 따 먹으며 숨어 있다가 야음을 타 밤길에 산길을 올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루에 고작 20km 이상을 걷지 못했다. 

무작정 남으로 향하는 여섯 명의 탈영병 

원산서 후퇴를 하다 탈출한 지 사흘째가 되었다. 풍문에는 국군이 평양을 함락하기 직전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우리는 산속 외딴 농가에 머물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살피기 위해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 동정을 살펴보니 남으로 가는 행렬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달구지에 짐을 가득 싣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무리에는 인민군은 없었다. 나는 안심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사람들 말이 국군이 70리 밖까지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서 이상 증후가 나타났다. 소변을 보는데 피가 조금 섞여 나왔다. 나는 큰 병이 난 것 아닌가 고민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 탈은 없을 것이라고 위안을 했다.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총이 있어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지만, 탈영병을 5명이나 데리고 다녀야 하니 한편으론 염려도 되었다. 그러나 나름 유리한 점도 있었다. 여럿이서 분대 행동을 하니 후퇴하는 군인들을 만나도 많은 부대 병력이 아닌 개인이나 소대 병력 정도를 만나서는 겁이 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어디로 가시오?"하고 물으면 우리는 "작전상 아무 데 가요"하고 대답만 해주면 무사통과였다. 누구 하나 우리를 수상히 여겨 "혹시 도망병이 아니요?"라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하루는 큰 고개를 넘어 동네로 내려가서 자그마한 냇가를 건너 밭 옆을 지났다. 길에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두 처녀를 만났다. 그중 한 처녀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남자만 여섯인 우리 모두가 홀딱 반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그 처녀를 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처녀는 국군이 밀려와 북쪽 친척 집으로 피난 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남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도 방향을 일러 주었다.

의용군 한 사람이 말하길 "난 서울에서도 저런 미인을 보지 못했어. 남남북녀라더니 정말로 저런 미인은 난생처음 보았어"하며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했다. 그 말에 나도 처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보니 정말로 예쁘게 생겼다. 만일 지금이 전시가 아니고 평화로운 때이고 내가 자유의 몸이라면 그 처녀에게 한 번 사귀어 보자고 통사정이라도 하고픈 맘이 절로 들었다.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북으로 가는 두 처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 다음날도 산에 올라가 다래를 따 먹었다. 나뭇잎은 다 지고 다래만 몇 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만 골라 따 먹었다. 허기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저녁때가 되어 산속에 있는 외딴 집을 발견했다. 집주인에게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사정을 했다. 주인은 잠은 재워 주겠지만 먹을 것은 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마당에 베어놓은 조가 있으니 우리가 비벼 좁쌀을 만들어주면 밥을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손으로 조 이삭을 열심히 비벼서 쌀을 만들었다. 쌀밥은 아니었지만, 밥을 배불리 먹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새벽 2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다음 날 우리는 새로 힘을 내 육십 리나 넘게 걸을 수 있었다.

남으로 가는 길에 길가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총살하여 죽여 버리고 갔다고 했다. 나는 죽은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 중 부역혐의자들을 사살한 군인들이 그 자리에다 시신을 묻고 있다(대구 근교(1951. 4.). 박도 기자 제공
 한국전쟁 중 부역혐의자들을 사살한 군인들이 그 자리에다 시신을 묻고 있다(대구 근교(1951. 4.). 박도 기자 제공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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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소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산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국군이 곧 들어온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국군이 벌써 여기까지 왔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일러주길 면사무소에 가면 소비조합에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으니 누구든지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국군이 들어오면 어차피 다 빼앗기니 그 전에 하나라도 빨리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부지런히 가보니 쓸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고 남은 것은 소금에 절인 고등어와 소금뿐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 맹산서 영원읍으로 향하는 큰 길에 도달했다. 어느 농가에 들어가니 식구들이 피난 짐을 꾸리고 있었다. 북으로 피난 가려고 짐을 꾸린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집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나는 등에 지고 다니던 가닥가루를 주면서 조반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피난 준비하는 피난민, 양식으로 엿 만들었지만...

떡국을 해주어 맛있게 먹었는데 부엌에서 엿 냄새가 났다. 아주머니는 피난길 양식으로 엿을 달이는 중이라고 했다. 모두 분주한 가운데 부엌에선 엿을 달이고, 방에선 남편이 피난 보따리를 열심히 싸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북으로 피난 가면 다시 집에 돌아 올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글쎄요. 작전상 후퇴라고 하니 다시 올 수도 있겠지요. 가다가 죽지만 않는다면 ……" 하고 말을 흐렸다.

밖에는 공습이 심해서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그때다. 별안간 "국군이 들어온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마을 어귀를 보니 수백 명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지프 앞에 단 지뢰 탐지기도 선명히 보였다.

놀란 집주인 내외는 허둥지둥 짐 보따리만 가지고 황급히 집을 떠났다. 주인이 떠난 집에는 우리 일행만 남았다.

나는 졸이다만 엿을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갔다. 하지만 엿이 너무 뜨거워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나는 아쉽지만 엿 먹기를 포기하고 불씨가 남아있는 아궁이의 불을 서둘러 껐다. 우리는 울타리를 타고 집을 빠져나와 옥수수 밭을 타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우리 일행은 산등성이를 타고 다시 남으로 길을 걸었다. 경사가 심한 비탈을 걷다 보니 힘이 부쳐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날이 저물었다. 어둠이 깔린 산골짜기에는 골짜기마다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큰 길로는 국군이 진격해 오니 피난민, 패잔병 그리고 도망병 모두가 산속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우리는 인민군을 피해 캄캄한 길을 걷다가 조그만 농가를 하나 발견했다. 염치불구하고 다짜고짜 "하룻밤 쉬고 갑시다"하고 집에 들어갔다. 젊은이는 없고 노인만 홀로 남은 집이었다. 노인이 말하길 "우리는 쌀은 없고 먹을 것이라고는 강냉이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강냉이라도 좋아요"라고 답했다. 우리는 노인이 건네 준 이삭 강냉이를 맛있게 먹었다.

강냉이를 다 먹고 나니 노인이 우리를 불렀다. "여보시오, 돼지를 소리 안 나게 잡을 수 있소? 우리 집에 소와 닭, 돼지 몇 마리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닭은 다 잡아 먹고 소도 끌어가고 송아지와 돼지 한 마리만 남았소. 암만 생각해 봐도 그냥 두었다간 이마저 뺏길 것 같소. 그러니 돼지를 소리 안 나게 잡아 주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의용군 일행을 보고 "혹시 누가 돼지를 소리 나지 않게 잡을 수 있소?"라고 물었다. 그중 한 사람이 자기가 잡을 수 있다고 나섰다.

우리는 돼지우리에서 돼지 한 마리를 끌어냈다. 의용군 하나가 도끼를 높이 쳐들어 도끼날을 돼지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아뿔싸! 순간 놀란 돼지가 머리를 모로 돌리는 바람에 도끼날이 골통을 빗나가 뺨에 비켜 맞았다. "꽥" 돼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당을 길길이 뛰어다녔다. 혼비백산한 우리 여섯은 돼지를 쫓아 마당을 이리 저리 헤맨 끝에 돼지를 간신히 잡았다.

그런데 돼지를 잡고 보니 어느새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돼지 잡는 소리가 워낙 요란하여 그 소리를 듣고 산에 있던 군인, 당원들이 모두 모여든 것이었다.

그들은 작전상 후퇴 중이라 매우 시장하니 고기를 조금만 달라고 하였다. 가만히 보니 굶주린 그들에게 고기를 나눠 주지 않고 우리끼리만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빼앗아가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어떻게 처리할까를 물었다. 노인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불러 모았다. "여러 동무들, 이리 오시오. 이 돼지의 절반을 줄 테니 가져가서 나누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 돼지를 반으로 갈랐다. 그들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절반을 가지고 돌아갔다. 나는 나머지 반을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내게 고맙다며 앞다리 하나를 주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돼지 날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비린내도 나지 않고 고소한 게 매우 맛있었다. 나는 그날 생전 처음으로 날고기를 먹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퍼져 앉았는데 노인이 돼지 내장을 삶아 와 허리띠를 풀고는 또다시 먹었다.

노인은 우리를 보고 "우리 아들도 군대에 갔는데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소"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돼지를 반이나 뺏겨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노인은 "할 수 있나요, 몽땅 뺏기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태어나 돼지고기 날것을 처음 먹어 보았는데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내장을 실컷 먹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조반으로 강냉이를 삶아 먹은 후 앞다리 남은 것을 달아보니 열 근도 안 되었다. 간밤에 우리가 엄청나게 먹어 치웠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노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낮에는 산으로 올라가 조용히 숨어 하루를 보내며 어둡기를 기다렸다. 늦가을 날씨인데 북녘의 산은 한낮에도 불구하고 매우 추웠다. 해발 1000m 정도의 산에 불과했지만,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매서워 발길을 더디게 했다.

저녁에 다시 한 농가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 집에는 아낙네와 아이 둘만 있었다. 아주머니 말이 전쟁이 나자 남편은 군대에 가고 시동생은 김일성대학에 다녔는데 지금은 소식을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너무 걱정마세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요? 틀림없이 살아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시간이 늦어 집안 식구들은 식사를 이미 끝냈고 남은 밥도 없었다. 아주머니는 쌀이 없어 밥은 못해 주지만, 감자라도 좋으냐고 물어 우리는 아무래도 좋다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마당에서 감자 한 대야를 담아 가지고 와서 물에 씻은 후 찌기 시작했다.

나는 의용군들에게 감자 지식을 늘어놓았다.

"동무들, 이런 감자를 먹어봤소? 이 감자는 봄에 심어서 겨울에 서리가 올 때 캐는 감자요. 속이 딴딴하고 녹말도 많지요. 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감자요."

의용군 한 명이 신기한 듯 "아니, 감자로 국수도 만듭니까?"하고 반문했다. 나는 감자로 찰떡도 만들고 엿도 만들고 또 얼키설키하여 감자국수와 떡도 만들어 먹는다고 설명을 했다. 이어 감자는 두부만 못 만들고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만들 수 있다고 말하니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아주머니가 삶아 온 감자는 큰 것은 20cm가 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아리지 않고 맛이 좋았다. 우리는 감자를 마음껏 먹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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