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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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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개선문에서 포로 로마노 한쪽 끝 카피톨리노언덕 쪽으로 오다 보면 언덕 부근에서 만나는 개선문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다. 티투스 문보다 크기가 훨씬 크고 양식도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다른 게 아치문의 개수다. 티투스의 것은 아치가 하나뿐인데, 이것은 아치가 세 개나 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45~211)는 로마 역사에서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다. 현재 리비아 땅에 있던 도시 렙티스 마그나 출신이다. 로마는 기원후 2세기에 이르면 오현제 시대를 맞이하여 가장 융성한 로마제국을 만든다. 이 시대에 들어서면 황제마저도 능력이 있으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오현제의 두 번째 황제 트라야누스와 세 번째 황제 하드리아누스 모두 로마가 고향이 아닌 스페인 출신이었다. 이방인이 로마에 와서 황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지방색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기풍이 오현제 시대가 끝난 시점에서는 더욱 확산된다. 로마시민권은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명실상부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 되고 있었다.

세베루스 가문은 엄밀히 말하면 혼혈 집안이다. 어머니계는 이탈리아계이고, 아버지계는 당시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의 피부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그것도, 백인계 로마인의 그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흑백의 혼혈족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니 지금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 정도가 아니었을까. 다만, 피부 색깔과 관계없이 세베루스 가문은 매우 부유했고, 일찌감치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로마로 가서 정계에 입문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세베루스도 일찍 로마로 들어가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세베루스가 한창 활동할 때의 황제는 우리에게 철인 황제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그의 아들 콤모두스(Commodus)다. 아버지는 철인이었지만 아들은 천하의 망나니로 콜로세움에서 직접 검투사가 되어 군중 앞에서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콤모두스가 황제가 되고 나서 로마제국은 점점 그 빛을 잃기 시작한다. 로마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콤모두스 사후 일 년에 5명의 황제가 나오는 대혼란기에 접어든다. 황제가 되기만 하면 죽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진 것이다. 세베루스는 이 혈투의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지방색 없는 진정한 세계주의의 표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 재미있는 것은 이 조각상은 청동으로 되어 있어 뒤에 보이는 다른 황제의 흰 대리석과는 구별된다는 것. 셉티미우스 황제의 피부색이 특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 재미있는 것은 이 조각상은 청동으로 되어 있어 뒤에 보이는 다른 황제의 흰 대리석과는 구별된다는 것. 셉티미우스 황제의 피부색이 특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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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덕에 내리막길에 있던 로마는 잠시나마 영화를 누린다. 세베루스는 제국의 변경을 누비며 국경을 안정시킨다. 하지만 오현제 이후 로마는 결코 그 화려했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베루스 재위 기간 로마제국의 위용은 잠시 반짝했을 뿐이다.

세베루스 개선문은 세베루스 재위 기간(203년)에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승전 개선문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당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고 있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개선문은 티투스의 것보다 훨씬 웅장하다. 전체 높이가 20.88미터, 폭이 23.27미터다. 여기에는 아치문이 세 개가 있는데 중앙의 큰 아치문이 높이 12미터, 폭이 7미터이고, 중앙 아치문 양옆으로 작은 아치문이 서 있는데 각각 높이는 7.8미터, 폭 3미터다.

이 개선문이 엄혹한 중세를 거쳐 18세기 이후 복원된 것은 그 주변에 있었던 교회 건물의 한 부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수백 년을 남의 집 대문 역할을 하다가 어느 날 건물의 다른 부분은 해체되고 그 대문만이 로마제국 황제의 개선문으로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기구한 운명이지만 긴 생명력에 경의를 표한다.

함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된 요한 하인리히 쉴바하가 그린 포로 로마노, 그림 속의 개선문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다. 자세히 보면 개선문의 절반 정도가 지표 아래에 있는데 흙을 파낸 다음 펜스로 두른 것을 볼 수 있다.
 함부르크 미술관에 소장된 요한 하인리히 쉴바하가 그린 포로 로마노, 그림 속의 개선문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다. 자세히 보면 개선문의 절반 정도가 지표 아래에 있는데 흙을 파낸 다음 펜스로 두른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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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함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그곳 미술관(함부르크 쿤스탈레)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이 세베루스 개선문과 관련된 아주 귀한 그림을 발견했다. 요한 하인리히 쉴바하(Johann Heinrich Schilbach)가 1827년 로마의 포로 로마노를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19세기 초 이 세베루스 개선문이 어느 정도 복원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선문의 거의 절반이 지표 아래에 있지만, 이즈음 주변 땅을 파낸 다음 거기에 시멘트 펜스를 두른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 수호자인가, 사악한 냉혈한인가... 로마 황제 중 황제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그가 누군가. 그는 다른 황제와 달리 로마 황제 중 대제(the Great)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황제다. 이 황제 이전에 로마제국 역사에서 대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황제가 이 사람 말고 어디 또 있을까. 그만큼 이 사람은 로마사 아니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 그의 개선문이 지금 로마에 있다. 바로 콜로세움 옆에 서 있는데 그 크기 또한 대제의 것답게 크다.

콘스탄티누스(272~337, 재위기간 306~337)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그의 인간성 자체를 생각하면 역사상 어떤 권력자도 사악함과 포악함에 있어 그를 능가하기는 힘이 들 것이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처와 아들을 죽였다. 아들은 그의 후계자가 될 황태자였음에도, 처는 황제(막시미아누스)의 딸로 그가 권력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에도 석연치 않은 것이 이유다.

아들은 독살시키고, 처는 끓는 목욕물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죽여 버렸다. 정말 끔찍한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다. 정적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했다. 그와 함께 공동황제였던 루키니우스(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의 남편)도 끝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정계를 은퇴했지만, 모반했다는 이름으로 그 아들(콘스탄티누스의 조카)과 함께 살해하고 말았다.

이런 황제임에도 역사는 콘스탄티누스를 기독교의 수호자로 기록한다. 권력과 종교가 어떤 관계를 맺어 공생했는지를 우리는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종교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에 대해서 함부로 비판할 생각이 없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가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이것은 세계적 종교가 된 그 어떤 종교에서도 예외가 없다. 속세의 권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 종교라 불리는 것들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소위 보편 종교로서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그가 로마제국의 절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던 그의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 헬레나를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기독교가 자신을 수호하고 황제의 권력을 도와줄 것이라 믿게 된 것은 그의 숙적인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밀비아 다리 전투였다.

당시 로마제국은 몇 명의 공동황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로부터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로마에 있는 막센티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꺾지 않고서는 안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콘스탄티누스는 회심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로마로 진격한다. 312년 어느 날 드디어 이 둘은 로마 외곽에서 맞붙게 되는데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에겐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계시에 따라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부하 장병의 모든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게 하고 전투에 임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로마 한가운데를 흐르는 티베르 강에 도륙해 던져 버린 것이다. 이날 이후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가 자신을 수호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믿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야기를 다 믿을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 정도다. 기독교 입장에서도 그 오랜 세월 박해에서 벗어나 공인 종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만난 것이다. 권력과 종교가 만나 상호 권력을 향유하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이 밀비아 다리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중요한 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 사건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 공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드디어 기독교를 공인한다. 역사는 이를 밀라노 칙령이라 부른다. 이제 기독교는 지하에서 활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기독교도는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포교할 수 있고 그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보장했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과거 황제(특히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몰수되었던 재산까지 돌려줌으로써 기독교에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기독교는 공인에서 끝나지 않고 사실상 국교화 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두 번째는 325년의 니케아종교회의이다. 이 당시 기독교는 중세나 그 이후처럼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많은 분파의 기독교가 생겼는데 크게 두 파가 대립한다. 3위 일체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와 그것을 부인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다.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강력한 종교로 성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교회의 안녕을 빈다는 차원에서 이 둘 중에서 하나의 손을 들어 준다. 이로써 기독교 역사에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지목되었고 박해를 받게 된다.

세 번째는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이탈리아 반도와 서유럽 전체를 기부했다는 이야기다. 이게 소위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관한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에게 기진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함으로써 속세의 왕은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중세 시절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기독교 내부에서 만든 거짓말이었다. 기진장 원본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가짜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결코 그런 문서를 만든 적이 없었다. 이것을 최종적으로 밝힌 이가 15세기의 로렌초 발라이다. 그는 이 기진장에 들어 있는 단어가 콘스탄티누스가 살아 있을 때인 4세기의 언어가 아니라 그보다 4백 년이나 뒤인 8세기의 언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교회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한 가지 더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 말해 둘 것은 그로 말미암아 비잔틴 제국, 곧 동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공동 황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단독 황제가 되지만 더 이상 수도를 로마로 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새로운 수도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비잔티움, 후일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이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로 나뉘고 5세기 말 서로마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동로마가 로마제국을 이어받아 다시 1천 년의 역사를 쓰게 된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는 바로 유럽의 역사를 다시 쓴 장본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수호자의 정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뒤쪽이 카피톨리노 언덕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뒤쪽이 카피톨리노 언덕이다.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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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는 대충 이런 인물이었다. 그를 기념하는 개선문이 바로 콜로세움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개선문은 315년 완공되었는데 바로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아 다리 전투(312년)를 통해 로마제국의 완벽한 황제로 부상하는 시점이다(물론 콘스탄티누스가 동서마 로마제국 전체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것은 그로부터 12년 후인 324년이다). 이 개선문은 현재 로마에 남아 있는 개선문 중에서 가장 늦게 건립된 것인데, 큰 특징은 거기에 있는 대부분 장식품들이 남의 기념물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것이다. 2세기 오현제 시대의 황제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크 아우렐리우스의 개선문이나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에서 장식품을 떼어 와 여기에 붙였다는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개선문이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 개선문의 높이는 21미터, 폭은 25.9미터이고, 3개의 아치가 있는데 가운데 큰 아치가 높이 11.5미터, 폭 6.5미터, 작은 두 개의 아치가 높이 7.4미터, 폭 3.4미터이다. 로마에 있는 3개의 로마제국 시절 개선문 중에서는 가장 크다. 양식은 위에서 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것과 흡사하지만 독창성은 한 마디로 꽝이다. 남의 것 떼어내다가 만든 재활용한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만든 데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촉박한 시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3년 만에 그 큰 개선문을 만든다는 게 당시 상황으로서는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로마 시내에 있는 과거 개선문에서 실례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또 한 설은 당시 4세기 초의 로마의 건축 기술 및 예술 수준이 전대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시내에 있는 개선문 이상의 개선문을 만들 수가 없어 선대의 개선문에 실례를 범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것도 신빙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가지 나름대로 가설을 내놓고 싶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가 로마제국의 황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제국의 황제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는 가설이다. 오현제 시대의 황제는 그 이후의 황제들에게도 하나의 전범이 되는 황제들이다. 훌륭한 조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 감히 그 위대한 조상의 장식품에 손을 대 자신의 개선문을 만든다는 말인가.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오현제의 개선문에 손을 댔다면 이것은 그가 이룬 새로운 왕조가 과거의 로마와는 다르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왕조이니 선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은 자신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황제이기에 자신의 개선문을 만드는데 과거 로마 황제의 장식품을 떼어 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또 하나 이 개선문을 유심히 살피면 일어나는 의문이 있다. 이 개선문 어디에도 기독교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개선문이 만들어지기 2년 전에 기독교를 공인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그런 연유로 기독교는 이 황제를 기독교의 수호자라 부르고, 성인 중의 성인으로 칭한다. 그런 그의 개선문에 기독교의 흔적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기엔 여전히 로마 신화의 신들, 아폴로, 헤라클레스, 다이아나가 나온다(하드리아누스 시기의 장식품을 떼어내 붙인 것임). 어찌 이런 일이? 생각하면 이것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그리 깊지 않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밀비아 다리 전투에서 그가 꿈에서 계시를 받고 승리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는 기독교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을 뿐이지 순수한 신앙의 발로에서 기독교를 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원로원으로부터 개선문을 받을 때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이든, 비록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의 내용이라 할지라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의 나이 40 전후에서는 비록 기독교를 공인했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그의 신앙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태그:#로마문명이야기, #세계문명기행, #로마문명,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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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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