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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6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광주전라입니다. [편집자말]
유명해지기 위해 변신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그곳을 그렇게 변화시켰고, 그 변신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됐다. 전주의 시인 안도현이 비빔밥, 콩나물국밥, 막걸리와 더불어 전주의 4대 미식문화로 꼽은 '가맥'(가게식 맥주)이 그 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호프집이나 술집이 아닌 가게에서 파는 맥주. 우리나라 어디서든 더운 여름날 편의점 파라솔 밑에서 '가맥'을 쉽게 만나지만 전주에서의 '가맥'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전주에 가맥 문화가 태동한 것은 1990년 전후다. 옛 도청과 전주시청, 경기전(태조 어진을 모신 곳)이 500여미터 안에 있는 경원동은 이씨 조선을 태동시킨 예향 전주의 심장부 같은 곳이다. 당연히 촘촘한 한옥들 사이로 생활의 공간들이 자리했다.

연탄 팔던 가게, 가맥집의 시초가 되다

가맥 원조거리인 경원동의 대표적인 가맥 전일슈퍼, 경원슈퍼, 영동슈퍼. 한옥마을에서 멀지 않은 구시가지 중심인 경원동 일대에 있는 가맥집들. 지금도 이 인근에 수십곳의 가맥이 영업하고 있다.
 가맥 원조거리인 경원동의 대표적인 가맥 전일슈퍼, 경원슈퍼, 영동슈퍼. 한옥마을에서 멀지 않은 구시가지 중심인 경원동 일대에 있는 가맥집들. 지금도 이 인근에 수십곳의 가맥이 영업하고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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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가맥 문화의 상징적인 '전일슈퍼'를 비롯해 경원슈퍼, 영동슈퍼가 태동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연탄 장사를 하던 전일슈퍼 주인 부부는 기름보일러의 보급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연탄 수요를 만회하기 위해 가게 한구석에 작은 슈퍼마켓을 열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맥주 한잔 하고 갈 수 있게 테이블을 놓았다.

그런데 연탄보다 이것이 더 매출에 도움이 됐다. 전북대 의대생은 물론이고 당시만 해도 근처에 있던 도청 직원, 시청 직원들이 즐겨 찾으면서 테이블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되자 집주인이 가게를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다행히 얼마간의 말미를 얻었고, 맞은편에 집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가맥집을 열었다. 전일슈퍼는 갑오징어, 황태구이 등의 대표안주와 독특한 소스로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서신동 등에 분점을 내면서 가맥 체인점을 연 가맥계의 '브랜드'가 됐다.

영동슈퍼 김형배 사장과 그가 개발한 닭발튀김. 1991년 닭발 메뉴를 개발해 지금까지 성업하고 있는 김형배 사장과 부인.
 영동슈퍼 김형배 사장과 그가 개발한 닭발튀김. 1991년 닭발 메뉴를 개발해 지금까지 성업하고 있는 김형배 사장과 부인.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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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슈퍼의 변신과 더불어 경원동 일대 작은 슈퍼마켓들의 변신도 시작됐다. 이제 이 골목에서 터줏대감이 된 영동슈퍼 김형배(72) 사장도 그중 한 명이다. 지금은 사위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문앞을 지키고 있는 김 사장. 그가 선택한 메뉴는 닭발튀김이었다. 주변 시장에서 닭발을 모아 정성껏 손질한 후 맥주를 먹는 손님들에게 주전부리로 내놓았다.

그런데 이게 대박을 쳤다.

"공짜로 주는데 맛이 있으니까 한 접시 두 접시 더 먹고 계속 먹읍디다. 그런데 가맥집은 음식점이 아니라 조리를 할 수도 없고, 더욱이 그걸 돈 받고 팔 수도 없었지. 또 인심 사납게 공짜 안주도 끊기 그래서 통닭이나 닭똥집 같은 메뉴도 만들었지. 이제는 체인점 치킨보다 맛있다고 통닭만 사가는 이도 있지만, 지금도 닭발은 여전히 서비스로 주고 있지."

김 사장은 이렇게 지난 23년을 추억했다. 한때 하룻밤에 맥주 30짝도 팔았다나. 김 사장은 이제는 물가가 올라 맥줏값도 오르고 국산 갑오징어도 드물어 안주가 예전같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주 서민들의 삶의 일부가 됐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가맥이 전주의 문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가게마다 나름 특색이 있는 메뉴들과 또 독특한 소스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전일슈퍼는 갑오징어나 황태를 주메뉴로 했고, 영동슈퍼는 닭 관련 메뉴들이 중심이었다.

경원동 가맥집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옛 도청 맞은 편 초원슈퍼(현 초원편의점)는 명태와 황태로 명성을 얻었다. 갓 구워내면 살들이 바람에 날릴 정도로 잘 다듬어진 황태와 잘 구운 명태가 특징인데, 매운 고추와 간장과 마요네즈를 넣은 소스의 맛이 독특하다.

"소스 맛의 비결? 나랑 사위밖에 몰라요"

가맥의 대표안주인 황태구이와 소스. 초원슈퍼는 옛 도청앞에 있는 가맥집으로 황태와 명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가맥의 대표안주인 황태구이와 소스. 초원슈퍼는 옛 도청앞에 있는 가맥집으로 황태와 명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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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슈퍼와 마찬가지로 모든 가게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소스를 갖고 있다. 전일슈퍼의 명성도 갑오징어나 황태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소스에 있다. 소스는 간장이나 마요네즈를 주재료로 쓰지만 가게마다 약재나 해물을 첨가하는 등 차이가 있다.

전일슈퍼가 체인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가게가 흉내내지 못한 소스 때문이다. 영동슈퍼 김형배 사장 역시 처음에 소스를 만드는 방식 때문에 제일 고심했다. 지금도 그 소스 레시피는 자신과 가게를 운영하는 사위만 공유하고 있다.

소스나 주메뉴도 중요하지만 대부분 가게에서 꼭 빠지지 않는 안주가 있다. 바로 계란말이다. 시장기를 느끼는 손님에게 뿐만 아니라 딱딱한 안주 일색의 가맥집에 부드러움을 제공하는 안주가 바로 계란말이다. 

하지만 계란말이는 또 다른 가맥집들의 고민을 대변하기도 한다. 계란말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리기구를 써야 했고, 이 일로 가맥집과 영업범위가 중복되던 호프집 등 일반 음식점 간의 갈등도 점화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초창기에는 가맥집에서 가정식 맥주를 파는 탓에 탈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게에서 파는 맥주 가격에 20병들이 한짝을 놓고 마시는 즐거움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다

경원동 가맥집들도 업종을 일반음식점으로 바꾸고, 영업용 맥주를 사용하면서 그 논란은 잦아들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맥은 주류 업소들의 형태를 바꾸었다. 서신동 낭주골 막걸리 골목에 자리한 '가맥 아저씨'는 막걸리식 메뉴와 맥주를 조화시켰고, 갑오징어를 반건조 상태로 구운 피데기로 명성을 얻었다.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세계맥주들도 취급하면서 분점까지 내고 있다. 경원동에 현대식인 가맥집 '보보스'나 '베스트 가맥' 등이 등장하면서 가맥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외국 관광객도 찾는 가맥집

소리축제 봉사나온 대학생부터 노년의 지인들 모임까지 가맥은 남녀노소 흥겹게 즐기는 곳이다.
 소리축제 봉사나온 대학생부터 노년의 지인들 모임까지 가맥은 남녀노소 흥겹게 즐기는 곳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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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게 맥주를 즐길 수 있다는 것 이외에 가맥의 또 다른 장점은 대학생들부터 노년들까지 누구나가 같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맥의 소문이 퍼지면서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도 가맥집을 관광코스로 빼놓지 않고 있다. 베이징에 가면 왕푸징거리를 찾고, 방콕에 가면 짜뚜작시장을 찾듯 전주에 오는 이들도 가맥집을 찾는다. 가맥집에서 일본관광객이나 중국관광객들을 만나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됐다.

물론 잘 나가던 가맥 문화에 어두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2~3년 전만 해도 1500원 하던 맥주 한병이 이제는 3000원에 육박하면서 가격 부담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서민들의 주머니가 헐거워지면서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는 게 가맥을 운영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가맥집의 주 메뉴이던 갑오징어나 황태의 품질도 예전만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봄철 서해안에서 흔하게 잡히던 갑오징어는 횟감으로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대신에 원양에서 잡힌 갑오징어가 오는데, 두툼하던 살점도 없고, 말리는 방식도 예전과 달라 그 맛을 흉내낼 수 없다. 갑오징어는 마른 것이나 반 말린 피데기 모두 2만 원은 넘게 받아야 수지가 맞기 때문에 손님들은 지갑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일슈퍼와 초원슈퍼의 황태구이 모습. 연탄을 사용해 적당히 굽는 것이 황태의 맛을 결정한다. 각 집의 맛을 결정하는 소스가 중요하다.
 전일슈퍼와 초원슈퍼의 황태구이 모습. 연탄을 사용해 적당히 굽는 것이 황태의 맛을 결정한다. 각 집의 맛을 결정하는 소스가 중요하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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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병 시절에 무슨 돈이 있어. 그럴 때 공짜 안주에 맥주를 한짝식 놓고 먹을 수 있는 가맥집은 우리들에게 축복이었지. 월드컵이랑 올림픽도 가맥집에서 보면서 같이 목청 높여 환호하고 탄식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 없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주 사람들에게 가맥은 동반자 같은 느낌이야."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선배는 가맥 취재를 하는 내게 나지막히 읊조렸다.

덧붙이는 글 | * 대표적인 전주 가맥집들

전일슈퍼: 063-284-0793 전북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3가 13-12번지 /영동슈퍼: 063-283-4997 전북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3가 15-6 / 초원편의점: 063-287-1763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14-1 /삐루봉: 063-229-7571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2가 770-2 /가맥아저씨: 063-278-2540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 829-2



태그:#전주, #가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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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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