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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 곧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비롯되는데, 그는 카이사르 사후 혼란기를 정리하고 500여 년 지속된 공화정을 폐지한 뒤 스스로 제국을 통치한다. 이것이 로마제국의 시작이다.

제국은 기원후 4세기에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는 476년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동로마는 1453년까지 이어진다. 동로마를 기준으로 하면 로마제국은 1500년간 지속하였으니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제국이다.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기둥.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 기둥.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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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로마제국에서 최고의 전성기는 소위 오현제 시대로 불리는 시기인데, 5명의 황제가 연달아 나타나 로마제국 최고의 번영기를 이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바로 이 시기를 말한다. 이것은 대체로 기원후 1세기 말에서 2세 말까지 100년간 지속되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 5명이 바로 그 현명한 황제들이다.

로마제국의 지경을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

오늘 초상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이들 황제 중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린 이로 통하는 트라야누스(재위기간 AD 98~117)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황제로 재위 기간에 전선을 누비면서 로마제국의 지경을 넓힌 주인공이다. 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인 다키아를 정복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파르티아 왕조를 격파하여 국경선을 유프라테스강까지 넓혔으며,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사하라 사막의 경계까지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의 국경은 지금의 지중해 연안 대부분으로 확장되었고, 지중해는 로마인들에게 "우리들의 바다"가 되었다. 지금도 그의 공적은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포로 로마노 근처에 우뚝 솟아 있는 트라야누스 기둥이라는 것이다. 이 기둥은 전승 기념비로 그 기둥 벽면에는 다키아 전투가 생생하게 부조되어 붙어있다. 당시의 전투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바로 이 기둥의 부조를 해석함으로써 당시 전투를 짐작하고 있다.

서설이 길어졌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선 사진 몇 장부터 보고 말을 이어가자. 아래 사진 세 장 중 처음 두 장은 칼스버그 미술관에서 찍은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영국박물관에서 찍은 것인데 모두 트라야누스 황제의 초상화 조각이다. 이들 조각품이 정확히 어디에서 출토(발견)된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 세 개의 조각품이 모두 트라야누스 황제의 초상 조각이라고 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라야누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박물관
 트라야누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박물관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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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영국박물관
 트라야누스, 영국박물관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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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을 아는 사람은 이 조각상을 보자마자 트라야누스를 알아맞힌다. 언젠가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로마의 한 대학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젊은 교수를 만났다. 이야기 도중 이 사람의 전공이 로마제국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임자 만났다는 생각에 내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 중 로마황제 사진을 쭉 끄집어내어 보여 주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사람은 사진을 보자마자 오현제를 비롯하여 나도 미처 기록해 놓지 못한 조각상의 이름을 모조리 알아맞혔다. 거기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로마 조각상이 역시 그냥 예술품이 아니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상화구나."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그린 초상화 말이다.

어떤 조각상이 초상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 수와 관계없이 누가 보아도 같은 사람을 조각했다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대상의 특징이 정확히 조각에 반영되어야 한다.

위 사진 속 트라야누스는 헤어스타일, 눈과 코, 그리고 이마가 거의 동일하다. 기법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이 제작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트라야누스라는 어떤 특별한 사람의 얼굴을 동일한 기준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렸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명상록>의 아우렐리우스와 <글레디에이터>의 콤무두스

오현제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기간 AD 161~180)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명상록>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바로 그 글의 주인공이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전쟁터에서도 항상 책을 읽고 명상에 잠겼고 그것을 글로 옮겨 놓은 철학자 황제다. 사실 기원후 2세기 말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된 시점부터 로마제국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변방의 이민족들은 점점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국경지방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는 거의 전 생애를 변방의 전쟁터를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 교육은 제대로 시키지 못한 모양이다.

러셀 크로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글레디에이터>, 2000년 개봉.
 러셀 크로우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글레디에이터>, 2000년 개봉.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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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를 이은 콤무두스라는 인물은 방종하기 짝이 없는 로마제국 최악의 황제 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러셀 크로우가 나오는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바로 이 황제가 나오는 영화이다. 여하간 그는 힘이 세었던 모양이다. 항상 몸이 근질근질했던지 자신이 직접 검투사가 되어 원형 경기장에 나가길 좋아했다. 당시 그는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 세워진 콜로세움 한가운데서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자, 이제 두 부자를 한 번 보자. 보는 순간 우리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같은 인물은 아니지만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에 말이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라는 것이 이 초상화를 보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얼굴 전체의 형태, 곱슬머리, 수염 등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눈에 보아도 부자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사진 왼쪽)와 콤모두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사진 왼쪽)와 콤모두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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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콤모두스의 어머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처인 포스티나는 정조 관념이 희박한 여자로 알려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콤모두스가 과연 아우렐리우스의 친자인지 의심을 한다. 그럼에도 아래의 두 초상화 조각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두 가지 가정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콤모두스가 아우렐리우스의 친자식으로 진짜로 두 사람의 용모가 비슷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그렸고, 그러니까 두 개의 조각품이 닮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둘째는 콤모두스가 친자가 아니었을 가정이다. 그 경우 두 사람의 용모는 상당히 달랐을 텐데, 어떻게 두 조각품이 부자 사이로 보일 정도로 비슷해졌을까. 그것은 작가에게 콤모두스를 친자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황제와 그 자식을 다르게 그리면 그 결과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온전히 살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혹은, 황실로부터 처음부터 두 사람이 닮은 것처럼 만들라는 요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요구는 누가 했을까. 당연히 아우렐리우스보다는 요부 포스티나가 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로마시대의 도덕관념으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어디에 해당할까? 이것을 아는 이는 사실 아무도 없다.

로마의 초상화가 항상 인물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초상화도 사진이 아닌 바에야(사진도 조작이 가능하다!) 그리는 목적에 따라서 실물과 차이가 난다. 로마황제의 초상화는 대부분 정치적 목적에서 만들어졌을 테니 실물에 가까운 경우라도 정치적 목적에 따라 (대부분은 신민에게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 과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위에서 본 트라야누스의 초상화도 위엄을 보이기 위해 어딘지 모르게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얼굴 인상이 강인하고, 몸은 마치 운동선수처럼 군살 없이 다부지다. 설마 황제가 이런 몸을 만들기 위해 온갖 운동과 다이어트를 했겠는가.

또 다른 복잡한 이유에서도 로마황제의 초상화는 실물과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연인과 비교되는 황제의 얼굴을 그릴 때는 그 연인과 짝을 맺을 정도의 과장된 아름다움이 작가에게 요구되었을 것이다.

팍스로마나의 진정한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그가 사랑한 미소년 안티노우스

오현제 중의 한 사람 하드리아누스(재위기간 AD 117~138)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하드리야누스는 트라야누스 다음 황제인데, 그 또한 트라야누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출신이었다. 하드리아누스가 통치한 이 시기는 로마제국 역사상 최정점의 시기였다. 그는 팍스 로마나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하드리야누스는 선제가 만들어 놓은 국경선을 확실하게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황제다. 그래서 그는 황도 로마에 있는 날보다 길바닥에서 세월을 보냈다. 제국 전체를 쉬지 않고 여행한 것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과 로마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각종 기념물을 만들었다. 지금도 지중해 곳곳에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문이나 도서관은 바로 그가 여행 중에 남긴 건축물이다.

그런데 이 황제는 당시 안티노우스라는 미소년을 사랑했다고 한다.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는 안티노우스를 너무나 사랑해 제국 순행에 항상 동반했다. 그러다가 이집트를 순행하던 중 나일강에서 안티노우스가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게 단순 사고사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말들이 많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는 안티노우스가 자신이 나이를 먹으면 황제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 자살했다고 한다. 일리 있는 가정이다.

여하튼 안티노우스는 익사했다. 그렇게 되자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위해 이집트에 도시(안토니노폴리스)를 만들고 그를 신격화했다. 안티노우스는 죽은 후 신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는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와 함께 초상화를 만들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미소년의 얼굴과 어울리는 정도로 만들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아래 그림을 보라.

왼쪽 사진이 칼스버그 미술관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①, 오른쪽 사진이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②
 왼쪽 사진이 칼스버그 미술관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①, 오른쪽 사진이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②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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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초상화 ①, ② 두 개는 언뜻 보아도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다르다. 하드리아누스 ①은 그저 평범한 황제의 얼굴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②에 나타난 황제는 왠지 품격이 다르다. 얼굴의 전체적인 균형미가 하드리아누스 ①에 비해 뛰어나고, 무엇보다 귀티가 난다. 그런데 이 귀티 나는 초상화와 안티노우스의 초상화를 한꺼번에 같이 보자. 뭔가 어울리지 않는가.

미소년 안티노우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미소년 안티노우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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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안티노우스와 하드리아누스 ①이 함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영, 그렇다. 한눈에 어울리기 어려운 커플이다. 하드리아누스 ②는 요새 말로 하면 '뽀샵(포토샵)'을 한 것이다. 실제 얼굴보다 훨씬 로맨틱하게 얼굴에 덧칠을 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을 담당한 로마의 작가는 초상화 작가로서는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사례비를 두둑이 받는 궁정화가의 비애이자 운명이 아닐까.


태그:#세계문명기행, #로마문명 이야기, #오현제, #초상화, #로마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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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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