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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3월 12일 오전 11시 50분]

[사연] 결혼 2년 된 이지현(가명·29)입니다. 남편에게 너무 실망해서 이혼하려고 합니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사람과 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연애 때부터 많이 싸웠는데 남편이 결혼만 해주면 잘 하겠다고 하니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린 뒤에도 남편의 성격은 고쳐지지 않더군요. 저녁 때 술자리에서는 전화를 안 받기 일쑤고, 새벽에 들어오는 날도 잦았습니다. 그래놓고도 일 때문에 늦었다고 거짓말도 자주 합니다.

임신한 저는 매일매일 눈물로 지샜습니다. 하루는 남편을 붙잡고 "더 이상 못살겠으니 이혼하자"고 소리를 쳤어요. 그랬더니 남편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만일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자정을 넘겨서까지 술마시고 귀가하지 않았을 때는 전 재산을 위자료로 지급하고 이혼하겠으며 자녀 친권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몇 달 뒤 새벽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저 몰래 대출까지 받아서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더군요. 이 남자한테 너무 실망했습니다. 저 정말로 이혼을 해야 하나요. 이혼하면 각서대로 전 재산을 모두 받을 수 있나요. 

폭탄주
 폭탄주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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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만 하면 호강시켜준다"는 약속이 효력없는 까닭

결혼 생활 중 부부는 서로 많은 약속을 주고 받습니다. 특히 배우자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사죄의 뜻을 담아 각서를 작성해 주기도 합니다. 이 각서는 효력이 있을까요? 오늘은 부부간 계약의 법적 효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하고 위반하는 쪽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부부간 계약은 여러 가지로 특별합니다.      

먼저, 이행을 기대하기 힘든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저도 결혼 당시에 아내에게 "당신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 결혼만 하면 호강시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안타깝게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저 말고도 많은 남편들이 아내들을 잘 떠받들겠다는 의미로 다양한 약속을 수시로 하지 않습니까. 물론 아내들은 큰 기대를 하지는 않겠지요. 이것을 민법에서는 '진의 아닌 의사표시'라고 하는데, 상대도 진의 아님을 알았다면 무효가 됩니다.

또한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한 내용, 현저하게 불공정한 사항 등은 당사자들의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라도 무효로 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각서 등을 통해 "바람을 피우면 손가락을 자르겠다"거나 "상대의 잘못이 있더라도 절대로 이혼을 청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을 하거나 재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면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배우자 중 한쪽이 "자녀의 친권과 면접교섭권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각서를 썼더라도 그 약속 자체가 유효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친권과 면접교섭권 등은 부모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고, 자녀의 권리라는 성격도 띠고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포기하는 차원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부의 협의 또는 재판을 통해 결정할 일입니다.

부부간 계약, 언제든지 취소 가능하다?

부부 사이에 주고 받은 각서나 계약이 지키기 힘든 약속이 되는 근거는 또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민법 828조입니다.

부부간의 계약은 혼인 중 언제든지 부부 일방이 이를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자의 권리를 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아내 명의로 되어 있는데, 남편이 자기 명의로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편 명의로 넘겨주기로 계약서나 각서를 썼더라도 나중에 아내가 입장을 번복한다면 법률적으로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청구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부부간 계약만 특별하게 대우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으로 2012년 2월 10일 이 조항은 삭제되었습니다.

재산포기각서, 어떨 때 유효할까?

KBS 드라마 <내딸 서영이>의 한 장면.
 KBS 드라마 <내딸 서영이>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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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간의 계약은 어떤 상황에서도 취소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판례에 따르면 법적인 부부 사이라도 파경을 맞은 상태라면 취소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혼을 하지도 않고 결혼 생활 중에 재산분할 포기각서를 썼다면 어떻게 될까요? 원칙은 무효입니다. 재산분할 청구권은 미리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재산포기각서가 유효하다고 본 사례입니다.

[사례] 30대인 A씨(남성)와 B씨 부부는 결혼 2년만에 파경을 맞게 되었다. 남편 A씨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B씨가 알게 되면서다. 당시 부부에겐 아파트가 한 채 있었는데, B씨 명의로 되어 있었다. B씨는 이혼을 제안했고 이에 A씨는 용서를 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각서를 작성해줬다.

"본인은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경우 협의이혼 절차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한다. 이혼 시 아내 명의의 재산에 대해 본인은 어떤 권리도 없음을 인정하며, 설사 권리가 있더라도 재산을 위자료로 지급한 것으로 인정한다."

나흘 뒤 부부는 법원에 협의이혼신청을 하였고, 곧바로 이혼신고까지 마쳐 남남이 되었다. 그러자 A씨는 "아파트는 아내 명의로 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내 것"이라며 재산분할을 청구했다.

법원은 재산분할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각하했습니다. 각하란, 재판이 형식적 요건을 갖추지 않아 실체판단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법원은 "혼인이 해소되기 전에 발생하지도 않은 재산분할청구권을 미리 포기하는 것은 그 성질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만 예외적으로 당사자들 사이에 협의이혼이 이루어질 것을 조건으로 재산분할 협의를 하고 약정한 대로 협의이혼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재산분할 약정은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법원은 ▲각서가 작성된 뒤 4일만에 협의이혼신청을 하였고 협의이혼까지 이루어진 점 ▲A씨가 그 뒤에 "아무 것도 필요없다, 니가 가진 건 다 니가 가져"라는 메일을 보낸 점 ▲각서가 위조된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한편, 정반대의 사례도 있습니다.

[사례] 40대 남성 C씨는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별거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C씨는 술집 마담 D씨를 알게 되어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 E씨는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1심 법원은 징역형을 선고하고 두 사람을 구속했다. 그러자 C씨는 항소한 뒤 재산분할 포기의사를 밝혔다가 형사재판이 끝난 뒤 이혼재판에서는 다시 재산분할청구를 하였다.

E씨는 "남편이 재산분할청구를 포기한 뒤 약 1년 뒤 다시 철회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간통죄의 형이 감경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아직 혼인이 해소되기 전에 (재산분할청구를 포기)한 것이므로 효력이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혼 재산분할로 재산을 절반씩 나눠 갖게 되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부부가 협의이혼을 전제로 재산분할 약정을 하였고, 실제로 협의이혼까지 이뤄졌다면 약정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각서를 쓴 뒤에도 결혼생활이 계속되었거나 협의이혼이 아닌 재판이혼이 되었다면 각서는 무효입니다. 

각서는 유력한 이혼 소송 증거가 된다

재산문제에 관한 약정에서도 만일 '잘못이 저지르면 배우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각서를 썼더라도,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것이 위자료인지, 재산분할의 성격인지, 금액은 타당한지 등을 살펴보게 됩니다.
 재산문제에 관한 약정에서도 만일 '잘못이 저지르면 배우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각서를 썼더라도,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것이 위자료인지, 재산분할의 성격인지, 금액은 타당한지 등을 살펴보게 됩니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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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재판에서 각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혼소송은 일반 민사소송과 달리,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증거 자료의 수집과 제출에 법원이 주도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민사소송보다 법원이 개입할 여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 '거짓말을 하거나 외도를 하면 이혼을 한다'는 약속이 있었더라도 무조건 이혼판결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이혼사유가 되는지를 직권으로 조사해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재산문제에 관한 약정에서도 만일 '잘못이 저지르면 배우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는 각서를 썼더라도,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것이 위자료인지, 재산분할의 성격인지, 금액은 타당한지 등을 살펴보게 됩니다. 법원은 재판을 통해 재량으로 위자료 액수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각서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힘든 이혼 소송에서 각서는 중요한 증거자료가 됩니다. 한 판사는 "폭력이나 외도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내용의 각서인 경우 위자료 판단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특히나 "이혼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진실되게 잘못을 자백하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작성한 각서라면 중요한 증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간 각서, 대부분 효력 인정 어려워

이지현씨에게 답변을 드려야겠습니다.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술과 친구에 빠져 있어서 실망스러우시겠네요. 그런데 거짓말을 할 경우 전재산을 주겠다는 각서를 썼더라도 그대로 법적인 효력을 인정받기는 어렵겠습니다. 부부가 작성한 각서는 일반적인 각서와는 달리 상징적인 성격을 지닌 것도 많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결혼 초기인만큼 실수를 인정하게 하고 남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어떨까요. 사람을 좋아한다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아내 이지현씨가 되길 바랍니다.


태그:#이도남,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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