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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앞에 선 권중희 선생
 경교장 앞에 선 권중희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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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6일은 고 한길 권중희 선생 5주기다. 나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을 2003년 10월 25일 내 집으로 모신 뒤 그분의 안두희 추적사를 해가 저물도록 듣고 '내 팽생 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2003년 10월 27일부터 2003년 11월 23일까지 8회 동안 연재한 바가 있다.

이 기사로 권 선생과 나는 여러 누리꾼이 보내준 성금으로 이듬해인 2004년 1월 31일부터 3월 17일까지 47일간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가서 백범 관련 문서를 찾아본 일이 있었다.

그때 한 방에서 줄곧 47일간 보냈기에 내 가족 외 가장 많이 동침한 사이로 많은 말을 나누고, 고운 정 미운 정도 들었다. 그분은 백범 암살범이 활개치고 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고 그를 끈질기게 추적 응징했는데 첫 응징 이야기만 전해 드린다.

암살범을 추적하다

1987년 3월 27일 12시 무렵, 안두희가 외출 차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나(권중희)는 20∼30미터 뒤에서 그를 계속 뒤따랐다. 나는 버스정류장 못 미친 곳에 이르러 빠른 걸음으로 안두희에게 다가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을 건넸다.

"아니, 이제야 나가십니까?"
"어! 웬일이야. 오늘 집에 혼자 있겠다고 하더니."
"바둑 둘 상대도 없고 따분할 것 같아서 저도 오늘 집에 잠깐 들러 옷이나 갈아입고자 나갑니다."
"그래? 잘 됐어. 그럼 같이 가자고."

그토록 벼르고 벼르던 내가 안두희와 함께 같은 버스를 타다니. 애당초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혼자라도 응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안두희가 마포구청 앞에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나도 안두희에게 집이 그 근처라고 둘러대고 내렸다. 나는 우선 다방 같은 데서라도 암살 배후를 자백 받고 응징해야겠다는 속셈으로 그에게 차 한 잔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출발 직전 집에서 차를 마셨다고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왼손으로 안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본론을 꺼냈다.

정의봉에 두들겨 맞은 암살범 안두희와 권중희 선생(오른쪽)
 정의봉에 두들겨 맞은 암살범 안두희와 권중희 선생(오른쪽)
ⓒ 권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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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봉으로 암살범을 패다

"꼭 차만 들자는 게 아니라 김구 선생 암살에 대해 할 말도 있고…."

내 말도 끝나기 전에 안두희는 "응, 뭐야!"하면서 펄쩍 뛰었다. 그는 주머니 속의 손을 빼면서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으로 나에게 덤빌 듯한 자세였다.

안두희 상해죄로 복역한 서대문형무소 앞에 선 권중희 선생
 안두희 상해죄로 복역한 서대문형무소 앞에 선 권중희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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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품 속의 정의봉을 꺼내 안두희 이마를 내리쳤다. 그는 "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 놈이 바로 38년 전, 김구 선생에게 총을 쏜 반역자 안두희다! 나는 이 놈을 찾기 위해 5년을 찾아 헤맨 사람이다. 내가 이 놈을 두들겨 팰 테니 모두 비켜라!"

언저리 사람이 놀라 비켰다. 안두희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내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는 듯 허우적거렸다. 순간 나는 백범 선생 머리와 가슴에 총부리를 겨냥한 안두희의 손부터 부러뜨리고자 정의봉으로 내리쳤다.

한참 동안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두들겨 팼다. 그만하면 목숨은 붙어있을지라도 병신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패던 일을 멈추고 미리 준비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반역자를 응징하면서'라는 성명서를 안두희가 쓰러진 자리에다 남겨 두고 택시를 타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내 생각은 순진하게도 그만하면 안두희가 혼쭐이 나서 제 스스로 모든 진상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했다.

반역자를 응징하면서

독립운동의 화신이며 구국의 상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시던 백범 김구 선생이 가신 지도 어언 38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모든 것이 많이 변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오히려 더 응어리진 것은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통한이다. 그 당시 백범 선생의 통일 구국이념대로 서로 뭉쳤던들 오늘처럼 국토가 분단되어 동족끼리 서로 싸우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반역자 처단을 꼭 정부에만 미룰 일이 아니고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결행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이때껏 개인적 응징을 유보하고 정부 차원의 처단을 촉구한 것은 대국민 교훈 면에서 더 나은 효과를 기하고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역대 정권들은 일사부재의니 시효니 하며 처형을 기피해 오지 않았던가. 독립투사를 죽인 반역자에게 무슨 시효를 따진단 말인가. 이 민족이 살아있는 한 반역에 대한 시효는 영원할 뿐이다.

한 시대의 사회상이 그 시대 정치의 표현이라면 광복 후 오늘까지 우리 사회상은 마치 뿌리 썩은 나뭇가지에 조화를 달아놓고 향기와 생명이 약동한다고 우기는 거나 다름이 없다. 민족은 있어도 혼은 없고, 위정자는 많아도 정치가는 볼 수 없고, 학자는 흔해도 선비는 드물고, 깡패는 득실대도 협객은 없다보니 모두가 불의에 면역되고 악에 중독되어 올바른 가치관이나 사회정의가 모두 파괴돼 버린 폐허 속에서 자아마저 상실한 채 모두가 헤매고만 있다.

우리는 민족혼만 살아 있으면 잃었던 땅도 되찾을 수 있지만, 민족혼이 죽고 나면 이나마 차지한 땅마저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죽어가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오늘 그 암살 역적을 응징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68년 3월 권중희 

그들을 정의봉으로 두들겨 주고 싶다

권중희 선생과 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딱 부러진 암살배후 문서를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돌아왔다. 그분은 귀국길에 누리꾼들에게 암살배후의 알맹이를 찾지 못해 면목이 없다고 "태평양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곁에서 극구 만류했다.

"우리는 미국 땅에 씨를 뿌리고 갑니다. 언젠가는 그 씨가 열매를 맺을 겁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서고에서 권중희 선생(왼편)과 기자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서고에서 권중희 선생(왼편)과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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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선생은 나에게 앞으로도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일과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사회지도층의 비리범들을 정의봉으로 혼내주는 일을 함께 하자고 여러 번 제의를 했다.

권 선생은 특히 전직 대통령들이 수천억 원의 돈을 강탈하고서도 아직도 배째라 식으로 버젓이 살고 있는데 이들을 그대로 두고 두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이 전직 대통령으로 대우받고 사는 세상에 무슨 정의와 양심이 살아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안두희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당신은 그들 머리통에다 정의봉을 내리치고 싶다고 그 일을 같이 하자고 거듭 간청했지만 나는 끝내 사양하고 강원도 산골로 내려왔다.

내 집 거실에서 안두희 추적사를 들려주던 권중희 선생
 내 집 거실에서 안두희 추적사를 들려주던 권중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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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보니까 현직 대통령이 퇴임 후 거처할 사저를 짓는다는데 그 일로 특검을 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큰 나라에서도 전직 대통령은 평민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면서 청바지 입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페인트 칠을 하거나 세계분쟁 지역을 다니며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전임 대통령이 고향에다 새 집을 지어놓고 사랑땜도 못하고 저 세상에 간 것을 두 눈으로 빤히 보고서도 오두방정을 떤다.

권 선생이 환생한다면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뭐라고 하실까.


태그:#권중희, #전직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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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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