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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중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하였다.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페르시아 문명탐사를 한다는 것이다. 30명 선착순. 나는 이 메일을 받자마자 연구소 측에 답을 했다. 물론 가겠다고. 이렇게 해서 나의 페르시아 문명기행은 이루어졌다.

당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한국 대학 최초로 이란에서 구석기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다. 카스피해 연안의 길란 지역을 중심으로 고 인류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기 위한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페르시아 문명 탐사는 이러한 연구소 작업의 의미를 되새기며 페르시아 문명의 세계사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중심으로 팀을 만들어 진행한 것이다. 거기에 내가 끼게 되었다.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고건축 등을 전공한 쟁쟁한 전문가들 틈에 끼어 귀동냥만 해도 얻을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단숨에 동참을 선언했던 것이다.

문명기행은 설 연휴를 낀 2월 4일부터 11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7박 8일의 여정은 한마디로 강행군 그 자체였다. 이란 내에서 약 3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역사적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까 하는 생각에 탐사단은 무리한 여정을 소화했고, 현지에서 예정에 없던 몇 군데를 추가하기까지 하였다. 거기에는 비전문가인 내 역할도 있었으니 내 극성도 알아는 주어야 할 것이다.

이 탐사 여행을 마치고 비전문가로 참여한 내가 이런 기행문을 쓴다는 것이 어쩐지 낯이 두꺼운 일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글을 쓰지 않는다. 이런 글은 그 내용이 너무 일반적이고 다양한 것을 다루기에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가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평가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마추어는 그럴 염려가 없다. 틀려도 아마추어라는 것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런 글은 나 같은 아마추어가 쓰는 것이 제격이다. 어쨌건 이 글이 당시 문명 탐사단을 대표하는 일주일간의 분투기가 될지 모른다. 독자 제현(諸賢)의 아량을 기대한다.

알면 보인다, 돌이 유적으로

이란의 영토를 보자, 면적 165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의 8배 크기이고, 인구 7500만 명의 대국이다.
 이란의 영토를 보자, 면적 165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의 8배 크기이고, 인구 7500만 명의 대국이다.

어느 문명기행도 여정에 앞서 그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지 않으면 현지에 가서 어떤 설명을 들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문명기행을 하면 할수록 이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역사를 알지 못하고 유적을 보면 그것은 단순히 돌무덤에 불과하다. 돌무덤이 유적으로 보이는 것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때이고, 그것은 사전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당해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시기의 주변의 역사를 이해하며 나아가 세계사적인 시야에서 그 역사를 이해할 때 제대로 된 문명탐사가 가능하다.

페르시아 역사에 대한 이해는 문명탐사 목적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이란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란이란 나라를 생각하면 무슨 생각부터 드는가.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고집불통의 별스런 나라, 미국과 항상 적대하면서도 용케도 버티는 나라 등등….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현대사에서 미국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낸 허상이다. 이 허상에서 비롯된 우리들의 이란에 인식은 고작 자유스럽게 살던 이란인들이 졸지에 이슬람 혁명을 맞이하여 철의 장막에 갇힌 사회가 되었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란인들이 자존심이 세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라크와 리비아가 두 손 든 현재의 시점에서 이란은 가히 북한과 더불어 미국에 가장 거칠게 도전하는 나라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렇다, 역사와 문화가 답이다. 그들에겐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있기에 미국의 그 집요한 공격에 대해서 늠름하게 버티는 것이다. 힘으로야 미국을 당해낼 수 없지만 200년 역사의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는 역사와 문화가 있기에 이 고난의 시절을 버틸 수 있다는 말이다.

문명의 꽃이 피기 전 이란 고원, 주인은 누구?

카스피해 남쪽은 거대한 고원인 바, 이것은 자그로스 산맥과 엘브로즈 산맥에 의해 거대한 이란 고원을 만들어 낸다. 고대에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BC 2500년부터 약간의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있다. 이 거대한 고원 전체의 주인은 어느 한 부족일 리는 없지만 적어도 주요 부분의 주인은 알려졌다. 우선 주목해야 하는 부족이 엘람인이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에 가까운 수사를 근거지로 하여 점점 세력을 확장하며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와 경쟁한다.

BC 12세기경, 이들은 티그리스 계곡, 서부 페르시아 및 페르시아만의 해안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때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 조각되어 있는 비석이 이들 손에 들어온다. 이즈음 페르시아의 북방에는 일단의 아리안 부족이 점점 남하해 오는데, 이들은 급기야 파르스 지역(현재의 시라즈 지역)에 정착한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적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또 다른 아리안족의 일파인 메데스족이다. 이들은 서부 페르시아를 장악하며 그 수도를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로 정한다. 메데스족은 당시 카스피 연안까지 장악하고 있던 스키타이 부족을 저 멀리 북방으로 내쫓아 버린다. 더욱 이들은 BC 7세기 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베를 정복함으로써 고대 아시리아 왕국을 역사 속으로 보내고 만다.

이란인의 영원한 자부심, 아케메네스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 현재의 중동지방 대부분, 터키, 이집트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로마제국이 나타나기 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 현재의 중동지방 대부분, 터키, 이집트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로마제국이 나타나기 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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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아케메니아드)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왕조 중 가장 중요한 왕조이다. 이 왕조는 파르스 지역을 차지하였던 아리안 족 일파의 족장이었던 키루스(성경의 구약 에스라에 나오는 고레스왕)에 의해 BC 550년 만들어진다. 키루스는 메데스 왕조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식민지화하고 수사를 수도로 정한다. 이어 그는 파사르가데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시기 키루스는 바빌론에 붙들려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구약에 나오는 현명한 여인 에스더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못한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바사(페르시아)의 왕 아하스에로의 왕비가 된다.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바사의 왕이 키루스 이후의 계승자인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다음 왕인 크세르크세스 1세를 말한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키루스 실린더,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키루스 실린더,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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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에게도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한 모양이다. 그 일단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키루스 실린더다. 이것은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그 백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약속한 일종의 평화문서이다. 팔레비왕 시절 이란 정부는 이 문서를 세계 최초의 인권문서라고 선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이란에 없다. 이것은 우여곡절 끝에 영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획득하여 1880년 이래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팔레비왕 시절 이란은 왕국 2500주년을 기념한다며 이것을 빌려 테헤란에서 전시한 적이 있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혁명 정부는 이것을 다시 한 번 빌려 테헤란에서 전시하고자 했으나 그 뜻을 관철시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10년 이란정부는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이것을 빌려 오는 데 성공했다. 4개월간의 전시가 테헤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인들이 그린 다리우세 1세,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인들이 그린 다리우세 1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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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왕조의 최전성기는 다리우스 1세 시절이다. 그는 제국의 또 다른 수도로 페르세폴리스를 정하고 이곳을 종교적 수도로 키운다. 이 당시 페르시아는 서쪽으로는 터키와 다뉴브강을, 아프리카는 이집트를 포함한 북부 아프리카 대부분을, 동으로는 파키스탄과 인디아에까지 뻗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 시기를 제1차 통일 페르시아 제국이라 부른다. 이 시절 페르시아는 인류 최초의 대제국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로마제국이 성립되기 400여 년 전의 일이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제국은 발달된 우편제도가 있었는데 빠른 말과 길을 이용하여 2700킬로미터나 되는 제국의 어디라도 15일 이내에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제국이 만들어지고 400년 후 만들어지는 로마제국도 제국 통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회간접자본이 도로(로마가도)였었고, 1500년 후에 만들어지는 칭기즈칸의 몽고제국도 제국 통치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도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대 제국의 제1조건이 도로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와의 전쟁으로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소아시아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 배후 세력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라는 것을 안 다리우스 1세는 드디어 그리스 정복에 나선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마라톤에서 예상 밖의 패배를 한다.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도 그리스 정벌을 위해 대공격을 감행하지만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아케메네스 왕조의 그리스 정복은 최종적인 패배로 막을 내렸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이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역사가들은 인류 역사상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이 나온 것을 바로 이 시기로 이해한다. 즉 페르시아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를 기준으로 동과 서의 구별이 생겼다는 것이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보스포르스 해협 너머 소아시아부터가 동양에 속하는 것임). 결국 동서양의 개념은 페르시아 전쟁의 승자가 만들어낸 방위 개념이라는 것이다.


태그:#세계문명기행, #페르시아, #다리우세 1세, #아케메네스,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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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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