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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숙원의 네팔 안나푸르나로 향했다. 70리터 배낭을 메고 공항버스를 타러가는 길에 가로지른 신촌 명물거리에는 멍울진 벚꽃이 얄궂게 봄을 끌어안고 있었다. 회색의 여명을 딛고 나는 그렇게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갔다.

버스에서 만난 마니스. 안나푸르나 트레킹만 다섯 번을 완주한 저력의 마운틴맨. 그는 내게 훌륭한 걸음을 했다며 힘찬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 네팔리 마니스 버스에서 만난 마니스. 안나푸르나 트레킹만 다섯 번을 완주한 저력의 마운틴맨. 그는 내게 훌륭한 걸음을 했다며 힘찬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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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모든 것이 불안했다. 서른은 아니면서 청춘의 달뜬 호기로부터는 한걸음 떨어져 나온 사이의 시간에서 미래는 안개처럼 애매하고 아득했다. 세상은 시종 완성과 마침을 말했지만 나는 늘 절름발이처럼 덜걱댔다. 더 늦기 전에, 늦어서 되지도 않는 변명만 늘어놓기 전에 나만의 걸음을 찾고 싶었다. 하루라도 일찍 나인 채로 살고 싶었다.

안나푸르나는 그런 나를 오래 전부터 알고 도와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로컬버스에 나의 흔들림과 방황도 함께 묻었다. 꿈에 그리던 그곳의 배경은 언제나 순백의 설원이었지만 봄의 안나푸르나는 지천이 포근한 녹음이었다.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깊은 그곳에 서니 내가 곧 바람이었다.

잔뜩 웅크려 있던 몸과 마음을 한껏 펴고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걸었다. 현지사정에 눈 밝은 가이드와 포터의 도움이 소중했지만 겁 없이 혼자 길을 나섰던 건 배낭을 싸고 푸는 그 기나긴 여정 동안 내가 배우고 연습할 삶의 한 방법 때문이었다. 응당 제몫의 짐을 짊어지고 스스로의 필요를 가늠하며 무엇을 채울지가 아닌 무엇을 비울지를 생각하는 매일의 고민은 최소의 여비로 최대의 전율을 끌어내겠다는 고행에 대한 결의보다 훨씬 더 절실했다.

하늘이 커서 구름도 느리게 흘러간다.
▲ 포카라 하늘이 커서 구름도 느리게 흘러간다.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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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 루트, 혼자이면서 혼자일 수 없는 길을 걷다

8091m의 안나푸르나 고봉을 가운데 두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나사처럼 도는 라운드 코스로 출발하여 안나푸르나의 폐부인 베이스캠프로 들어가 문명의 도움을 받지 않고 두 발로 걸어 도심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대장정의 루트를 짰다. 저 멀리 성채처럼 빛나는 설봉을 바라보며 옥빛의 시린 강을 두르고 걷는 그 길에서 나는 히말라야의 여러 계절과 숱한 얼굴을 만났다. 몬순인 탓에 매일 오후 두시면 소나기가 내려 진창을 걸어야 했지만 금세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매섭게 얼어붙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길은 아름다웠다. 신들의 산이 지닌 위엄은 과연 여실했다. 태양은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로 송곳처럼 떠올랐고 저 멀리 창량하게 솟은 안나푸르나 연봉은 저마다의 말간 자태를 천진하게 드러냈다. 해가 떠오르니 만년설의 히말라야는 더욱 강렬하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내내 압도했다. 신과 인간의 변경(邊境) 안나푸르나는 자신을 바로 보려는 이들을 경계하려 눈을 감겼다. 내리 쬐는 볕에 그를 경외하며 절로 고개를 숙이곤 했다.

풍요롭던 마을. 시원하게 뻗은 마르상디 강줄기와 함께 출발하는 트레킹 첫째 날이다.
▲ 마르상디강의 하류 풍요롭던 마을. 시원하게 뻗은 마르상디 강줄기와 함께 출발하는 트레킹 첫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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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트레킹 첫 번째 마을인 베시사하르. 투어리스트 사무소에서 트레커들의 퍼밋과 여권 등을 검사한다.
 라운드 트레킹 첫 번째 마을인 베시사하르. 투어리스트 사무소에서 트레커들의 퍼밋과 여권 등을 검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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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었던 친구들. 왼쪽부터 프랑스에서 온 파니와 뉴질랜드에서 함께 온 연인 롯과 이사벨.
 함께 걸었던 친구들. 왼쪽부터 프랑스에서 온 파니와 뉴질랜드에서 함께 온 연인 롯과 이사벨.
ⓒ 장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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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기에 혼자이면서 매순간 혼자가 될 수 없는 길. 여행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이 되는 일임을 통감하듯 고마운 시절인연이다.

자신의 엄마가, 그 엄마의 엄마가 그러했듯 일찍이 결혼하여 두 아이를 기르면서 때로는 집밖을 나와 제 키만 한 배낭을 메고 이 산을 넘는 여성포터 마야, 안산의 어느 수건공장에서 일했고 비자가 만기되어 고향에 돌아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밀란, 그리고 그의 아내 울밀라, 실로 짠 팔찌와 모자 같은 장신구를 팔며 타향에서의 생계를 잇던 스물 셋 티베탄 소녀 소남, 메콩을 따라 여섯 개의 아시아 땅을 걸었고 인도를 지나 히말라야로 거슬러 올라온 일본인 친구 슌스케, 같은 병원에서 일하며 사랑을 키웠고 같은 날 사직서를 내 트레킹 길에 오른 뉴질랜드 간호사 부부 롯과 이사벨.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들…. 이들은 더디고 느리지만 정확하고 똑똑한 보폭으로 세상의 다름을 걷고 있었다.

쓰리 시스터즈 여성포터 마야.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마을을 거칠 때마다 그녀를 찾았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 여성포터 마야 쓰리 시스터즈 여성포터 마야.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마을을 거칠 때마다 그녀를 찾았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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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중 만난 스물여덟 동갑내기 네팔리 마야는 우리나라의 어느 공정여행 책에서도 소개된 '쓰리 시스터즈' 소속의 여성 포터였다. 쓰리 시스터즈 역시 크게는 트레킹 전문 에이전시로 분류할 수 있지만 이윤추구를 넘어 네팔여성들이 노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에 그 힘은 현지에서도 고무적이었고 이 단체에 대한 관심은 세계에서도 대단했다.

그녀를 만난다면 여성포터의 삶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여자로서 일이 고되지는 않은지, 하루 얼마나 벌고 여성포터가 되려면 어떤 훈련을 거치는지, 일은 어떻게 들어오고 이후 게스트와 따로 접촉할 수 있는지, 트레킹 시즌이 아닐 때는 어디에서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먹고 사는지, 트레킹 중에는 어떻게 밥을 먹고 잠은 어디서 자는지, 얼마나 많은 네팔의 여성들이 포터가 되기를 꿈꾸는지, 그리고 포터가 되면서 네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이다.

마야가 전하길, 포터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1년 이상의 트레이닝을 받는다고 했다. 언어실력과 체력도모는 물론이고 전문가이드로서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까지 배운다고. 특히 가이드는 트레커들의 길잡이인 동시에 문화해설자 역할도 톡톡히 해내야 했기에 여러 방면으로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게스트의 짐을 들어주는 포터로 시작하지만 거듭되는 훈련과 실제 트레킹 경험이 쌓이면 가이드 포터로, 종국에는 전문 가이드로 홀로 설 수 있다고 했다. 포터를 단순히 짐꾼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히 체계적 수순을 밟고 있음을 알고 놀랐다.

게스트가 만족한다면 그들 또한 포터로서 훌륭한 평을 얻을 것이고 머잖아 소원하는 궁극의 꿈인 가이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고통은 따르지만 일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던 사람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리고 살림을 유지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던 사람들. 제 키의 절반은 넘는 게스트의 배낭을 짊어지고 묵묵히 걷던 뒷모습은 이 산의 봄처럼 빛났다.

한국에서는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그는 안산의 어느 수건공장에서 5년을 일했지만 비자가 만기되어 하는 수 없이 네팔로 돌아왔다.
▲ 이주노동자 밀란 한국에서는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그는 안산의 어느 수건공장에서 5년을 일했지만 비자가 만기되어 하는 수 없이 네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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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의 아내 울밀라. 티베탄 전통음식인 모모(만두)를 빚고 있다.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일할 때도 저렇게 웃었을까.
 밀란의 아내 울밀라. 티베탄 전통음식인 모모(만두)를 빚고 있다.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일할 때도 저렇게 웃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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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과 울밀라 부부의 만남, 아름다웠다

밀란과 울밀라 부부를 만난 곳은 참체의 티베탄 게스트 하우스였다. 한국에서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밀란은 안산의 어느 수건공장에서 이주노동자로 5년을 일했지만 비자가 만기되어 하는 수 없이 네팔로 돌아왔다. 늙고 병든 아버지와 함께 지금의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기 시작한 건 오래지 않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선남선녀인 밀란과 그의 아내 울밀라의 만남은 그 밤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아내 울밀라 역시 과거 한국행 비자를 받아 안산의 기사식당에서 일했는데 그때 밀란이 자주 밥을 먹으러 오면서 친해졌다고. 낯선 땅에서 서로를 향해 닿았을 두 영혼의 환희와 외로움 같은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렸다. 약속한 5년은 너무 짧았고 한 사람만 타지에 남겨두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불편했다. 그리움은 두려움을 이겼다.

밀란은 불법체류 했고 그것이 걸려 강제 출국됐다. 입국금지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림이 참 더디다. 밀란과 울밀라는 떠오르는 지난날을 웃으며 말했지만 엷게 드리워진 아픔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밀란과 울밀라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네팔리 포터들. 산중 생활에 필요한 짐들을 이고 지며 저들 또한 자신만의 생활을 꾸려간다. 고되지만 일할 수 있어 기쁘다는 얼굴들.
 네팔리 포터들. 산중 생활에 필요한 짐들을 이고 지며 저들 또한 자신만의 생활을 꾸려간다. 고되지만 일할 수 있어 기쁘다는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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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쌀, 과일, 가스통, 감자 등 온갖 식량과 생필품을 한 짐 가득 이마에, 어깨에, 등에 짊어지고 가는 포터들을 보면 롯지의 숙식비를 깎을 마음이나 지금 내가 지고 가는 배낭이 무겁다는 생각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내 짐 또한 무겁지만 그보다 더한 질량의 삶을 안고 가는 네팔리들을 보면 이내 숙연해졌다.

마치 생의 비애처럼, 저들이 힘겹게 짐 진 생활의 무게를 바라보는 일은 내게 그 자체로 벅찬 숙제였다. 낭만이나 철학이 아닌 구체적 현실이었다. 슬프게도 대개의 포터들은 너무 어리거나 혹은 너무 나이가 많았다.

입에 당기는 패스트푸드나 한국음식이 아닌 로컬음식을 충분히 먹는 것으로 나만의 여행윤리를 세웠다. 실제로 로컬음식은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현지인들이 익숙한 조리법으로 요리하기에 수고가 덜할뿐더러 지역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이었다.

트레킹을 하다보면 현지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컵라면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배낭에 가득 챙겨와 롯지에서 직접 해먹는 여행자들도 곧 잘 만나곤 한다. 여행은 무엇보다 즐거워야 하고 여행의 색깔은 각자 만들어가는 것이며 선택은 저마다의 몫이기에 답을 강요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여행하고 있는 곳에 애정을 갖고 있고 그곳을 존중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여행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이 들려주는 신산한 삶에서 나는 새삼 일의 가치와 삶의 기술,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생각했다. 끔찍한 노동시간과 절대적으로 척박한 노동환경에도 그들이 붙잡고 싶은 것, 그들에게 간절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일이 주는 기쁨과 활력. 그리고 일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생활과 삶. 마야와 밀란은 저들의 생을 통해 내가 떠나기 전 그토록 하찮고 괴롭게 여겨 벗어나고 도망치고 싶었던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이 산에 갇힌 지 어느덧 보름. 해발 5416m의 정상 토롱 라 패스를 앞두고는 고산증세에 더해 그만 다리까지 다쳐 네 발로 울면서 하루 꼬박 열여섯 시간을 걸어야 했지만 막막하고 요원했던 행복은 신비롭게도 고통 속에서 피어났다. 현실을 밀어내고 생활을 빗겨간 공간에는 그렇게 수더분한 꿈이 자랐다. 애초 결단했던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그렇게 보고 깨닫고 아파하고 느끼며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었다.

생명 없는 황량한 길. 건초들 웃자란 마른 배경 사이로 홀로 고고한 히말라야가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생명 없는 황량한 길. 건초들 웃자란 마른 배경 사이로 홀로 고고한 히말라야가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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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길. 이내 사람이 그리워지고 만다.
 고독한 길. 이내 사람이 그리워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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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마뜩찮게 없어서... 그곳으로 떠났다

꿈, 가슴 뛰는 삶, 마음이 원하는 것, 잘하고 싶은 것…. 어느 순간부터 까마득한 말들이었다. 생활의 감각을 거두고 여행길에 오른 것 또한 떠나기 전날까지 쉽지 않았다. 꿈이 많았지만 고민은 그보다 더 많았고 늘어나는 고민만큼 포기해야 할 것들도 세월과 같이 늘어갔다. 시간도, 돈도, 위치도, 미래도 어느 것 하나 충분하지 못했다.

잘 하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해서, 벌이도 그냥 그래서, 결국 썩 행복하지 않아서. 처음 겪었던 사회라는 곳에서 나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뭐 하나 마뜩찮은 게 없었다. 나는 불안하고 불온했다.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은 내게 현실은 끊임없이 완성을 요구했고 나는 내게 요구되는 것들에서 늘 반보씩 느렸다. 자괴와 자책과 열등감으로 벌어진 공간을 메웠다.

오래된 고성인 듯 인적을 삼키고 시간의 표층으로 켜켜이 남은 땅. 천연한 아름다움만큼 안나푸르나는 고통과 아픔의 땅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수록 호흡은 가빠졌고 두통을 넘어 온몸에 미열이 났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웠다. 태어나서 마주하는 최초의 추위였다. 몸을 움직여서 체온을 내야 하는데 한 치 눈앞에서 버젓이 기다리고 있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워 자꾸만 몸을 사렸다. 오랫동안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얼마 가지 못했다.

토롱 라 패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토롱 라 패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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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흔적은 세상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누군가의 흔적은 세상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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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416m의 토롱 라 패스. 걷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그곳에서 정상에 당도하는 일은 어쩌면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난 일이 실은 아닐 지도 모른다. 간절함이 있고, 열정이 있고, 그리고 조금의 금전이 있다면 누구라도 해낼 수 있고 끝내 해내고 마는 길이다.

그것이 오기 가득한 자기와의 전쟁이든, 목적에 대한 맹목적 성취든, 안나푸르나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든 뭐든 말이다. 해낼 수 있는 이유는 처처에 있었고, 안나푸르나는 그 존재만으로 그 꿈을 실현할 수 있게 이끌어 주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대로 안나푸르나는 언제나 지금 내가 보는 것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풍경을 상상하고 기대하게 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이 산을 끝까지 오르게 했다.

토롱 라 패스 정상(5,416m). 천년의 바람에 오색의 룽카가 펄럭인다. 구름은 어깨만큼 와 있다.
 토롱 라 패스 정상(5,416m). 천년의 바람에 오색의 룽카가 펄럭인다. 구름은 어깨만큼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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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걸었다. 사람 속을 걸었다. 오직 열정과 애정으로, 그리고 이 산의 기운과 신비로 묵묵히 걸었다. 누구도 이 길을 강요하지 않았다. 순전한 의지였고 꿈이었고 실천이었다. 그래서일까. 정상을 등지고 저 멀리 허공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눈가를 적시던 눈물은 이내 볼을 타고 흘렀고, 흐느껴 눈물을 삼키다가 결국은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하던 지난 시간이 하나둘 눈앞을 스쳐 갔다.

롯지에서. 물집이 잡혀 살갗이 다 벗겨진 발. 여정은 자신의 끝에 깊은 추억과 함께 작은 상처 하나 남겼다.
 롯지에서. 물집이 잡혀 살갗이 다 벗겨진 발. 여정은 자신의 끝에 깊은 추억과 함께 작은 상처 하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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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여러 날들을 딛고 고대하던 정상에 다가서면서 나는 알았다. 정상이란 오르는 것이 아님을, 오르고 마는 것이 아님을. 그저 어제의 길처럼 스치는 것임을, 스쳐서 지나가는 것임을. 이 사실을 안다면 좀 더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의 목적을 대하는 자세도,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도. 그것은 내게 경험으로 말해왔다.

정상은 다른 날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정상은 단지 지금 스쳐 지나가는 이 순간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침묵으로 동행하는 친구일 뿐이었다. 정상은 말해줬다. 그렇다면 거꾸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스치듯 걷는 매일의 길들 또한 바로 나와 다르지 않다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결국 너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쥐고 있던 모든 걸 놓아버리고 어느 날 문득 세계의 지붕을 찾아 떠난 여정은 이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지나 랑탕 히말라야를 넘어 북인도 가르왈 히말라야로 이어졌고, 라다크의 하늘호수까지 아래로, 아래로 계속됐다. 7월, 집을 나선 지는 어느덧 백일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신촌의 자취방에 돌아가던 그날도 비가 내렸다. 공항철도를 타고 홍대에 내리니 찰나의 성광을 본 듯 이제까지의 모든 순간이 아연했다. 비를 맞으며 걷는 일은 익숙했다. 이제 얼마나 즐겁게 비를 맞느냐가 중요했다. 빗속으로 다시 용기 있게 길을 내며 다짐했다. 이 세상의 소요 속에서 내가 만난 고요를 지키자고. 그리고 기억했다.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흡수했던 인내를, 두 번 다시라는 말을 모르는 듯 하루를 살았던 어느 날들의 열정을, 나를 환대한 낯선 세계를 향해 걸었던 믿음을, 그리고 그 어떤 길도 무던히 잘 걸어준 두 다리를, 그렇게 나를, 세상 속의 아름다운 나를. 믿기지는 않지만 스치고 만난 모든 것이 우주였고, 세계였고, 나였던 날들이 있었다. 참으로 긴 여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은 2011년 4월부터 7월까지 다녀온 것 입니다.



태그:#안나푸르나, #트레킹, #인도,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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