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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에 처음 갔던 해에 구치터널에서 찍은 가족사진
▲ 1998년, 호치민 호치민에 처음 갔던 해에 구치터널에서 찍은 가족사진
ⓒ 이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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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1998년부터 5년간 베트남 호치민에서 살았다. 무역회사에 다니던 아빠가 호치민 지사로 발령 났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2까지 호치민에서 살았으니 사춘기를 통째로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우리 가족은 그 5년 동안 웬만한 베트남 유명 관광지를 대부분 가봤다.

그런데 내게는 베트남의 어떤 이국적인 풍경보다도 우리 집 가정부 화 아줌마의 시골 고향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의 집은 궁벽한 시골마을에 있었는데 특별한 인연 덕에 갈 수 있었다.

한국 '마담'들의 찌어이

베트남에서는 가정부를 '찌어이'라고 부른다. 베트남어로 찌어이는 나이 많은 여성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한국어로 '아줌마'라고 생각하면 된다. 찌어이의 월급은 한국 돈으로 5만 원에서 10만 원이라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찌어이를 고용한다. 한국어를 한다든가, 음식 솜씨가 좋으면 월급을 더 받을 수 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를 겪은 탓에 고유문자 대신 알파벳을 쓰고 말에도 프랑스의 흔적이 있다. 일례로, 찌어이들은 한국 아줌마를 '마담'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뜨악스러운 건 그게 술집 여자를 뜻하는 말이라서가 아니다. 베트남에서 '마담'은 '주인님'이라는 어감도 있다. 

'마담' 소리를 듣는 한국 아줌마들도 대체로 찌어이들처럼 가난을 겪었다. 1970년대까지 많은 한국 여성은 '산업 역군'으로 불리며 시골집과 남자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나. 우리 엄마 역시 가난하게 살았다. 대학교 3학년 때 결혼한 부모님은 할머니집에서 신혼방을 차렸고 큰아들이 유치원에 갈 즈음에야 겨우 셋방 하나 얻어서 나왔다.

그랬던 엄마가 10년 만에 베트남에서 작은 정원이 딸린 2층집 안주인이 됐고 찌어이까지 부리게 됐다. 당연히 엄마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첫 번째 찌어이에게는 누가 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휘둘렸다. 두 번째 찌어이는 100만 원 가까운 현금을 들고 도망가기도 했다.

사실 이런 일은 종종 벌어졌다. 우리 엄마뿐 아니라 많은 한국 아줌마들이 찌어이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래서 어떤 한국 아줌마들은 찌어이가 퇴근할 때마다 속옷 안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1970년대 버스회사에서 여자 안내양 속옷 검사하듯 말이다. 그 시절을 살았던 한국 여자들이 베트남 여자들에게 같은 일을 한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고향집에 마담 가족을 초청한 화 아줌마

다행히도 마지막 찌어이와는 별 문제가 없었다. 화 아줌마는 성격이 온화했다. 우리 집을 거쳐간 총 4명의 찌어이 중에 엄마와 죽이 제일 잘 맞았다. 화 아줌마는 그래서 우리 집에 2년이나 있었다.

화 아줌마는 운(?)도 좋았다. 베트남에 온 지 5년째 되던 2002년, 우리 가족은 아버지 임기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한국에 이삿짐을 보내려고 알아보니 그 비용이 상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돈 안 되는 것들을 놓고 가기로 했다. 자연스레 그것들은 화 아줌마 차지가 됐다.

호치민 교외의 2층 양옥집으로 작은 마당과 차고가 있다.
▲ 호치민의 우리집 호치민 교외의 2층 양옥집으로 작은 마당과 차고가 있다.
ⓒ 이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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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아줌마는 신이 났다. 5년 남짓한 베트남 생활이라 살림살이가 꽤 됐다. 작은 TV, 라디오, 테이블, 의자, 다리미 등 종류도 다양했다. 화 아줌마는 작은 트럭까지 불러야 했다. 화 아줌마는 우리 가족의 선의(?)에 감격하며 엄마의 손을 잡고 "마담 심, 우리 집에 놀러 와요"라며 우리를 자기 고향집으로 초청했다.

아빠는 별로 갈 생각이 없어서 엄마, 나, 내 남동생만 온갖 잡동사니를 실은 1톤 트럭을 따라 화 아줌마네 집을 방문했다. 엄마는 빈손으로 가기 그렇다며 김치를 챙겼다.

베트남에는 산이 많지 않다. 도심을 벗어나면 대게 지평선이 보이는 논밭이다. 매일 해가 뜨거운 나라여서 일년에 3번 쌀을 수확한다. 그 시기가 제각각이라 누렇게 익은 벼 옆에서 모내기가 한창인 경우도 많다. 차로 2시간을 달려 작은 농가에 도착했다. 화 아줌마를 맞이하러 15명쯤 되는 식구들이 나와 있었다.

17세 한국 도련님, 가정부의 심부름 하다

우리 집에서 화 아줌마는 우리가 밥 먹을 때 서빙을 하고 거실에서 쉴 때는 일을 했다. 집안에 자기 물건이라고는 이불밖에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열 살 조금 넘은 내동생도 화 아줌마에게 라면 끓여오라고 시켰다.

그랬던 화 아줌마도 고향집에서는 가장 세련되고 자신감이 넘치게 행동했다. 그녀는 팔을 걷어 부치고 식구들을 시켜 차에서 짐을 내렸다. 그리고 식구들에게 물건을 나눠줬다.

화 아줌마는 멋진 이모이기도 하다. 짐을 정리한 화 아줌마는 아이들에게 도시에서 사온 선물을 분배했다. 반쯤 발가벗은 아이들은 화 아줌마 앞에 줄을 서서 공손하게 선물을 받았다. 그러면 화 아줌마는 한 명 한 명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부 잘 해라" "엄마 말 잘 들어라" 같은 말을 했다. 애들 중에는 내 동생 또래의 애들도 있다. 화 아줌마의 나이가 새삼 떠올랐다.

화 아줌마 형제들은 돼지불고기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왔다. 엄마가 가져간 김치도 상에 올랐다. 그러자 화 아줌마는 자기가 나설 차례라는 듯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바탕 김치에 대해 설명했다. 10명이 넘는 베트남 사람은 화 아줌마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화 아줌마는 직접 김치를 손으로 찢어 먹는 시범을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애들이 "꼬까, 꼬까"라며 콜라 먹고 싶다고 졸랐다. 어른들은 식탁을 정리하고 엄마는 뭔가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화 아줌마는 내게 돈을 주며 "콜라 좀 사오라"고 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가 내게 뭔가 시킨 셈이다. 찌어이를 '부린' 지 5년 만에 생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콜라를 샀다. 자존심이 상했느냐고? 정반대다. 유쾌해서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화 아줌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게 심부름을 시켰고 나도 자연스럽게 돈을 받았다. 화 아줌마네 집에서는 그가 주인공인 게 당연했다.

우리 집의 질서가 완전히 전복된 하루였다. 그림자였던 화 아줌마가 주연이었고 우리는 조연이었다. 잠깐이지만 나는 화 아줌마가 중심이 된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날 나는 화 아줌마를 이모처럼 느꼈다. 2년이나 한집에서 살았음에도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찌어이'의 심부름이 유쾌했던 이유

저녁을 먹고 10명이 넘는 그녀 가족들과 일일이 정이 넘치는 인사를 하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 오자마자 화 아줌마는 다시 찌어이로 돌아왔다. 그녀는 세탁기를 돌리고 아침 준비를 했다. 딱 반나절 만에 다시 역전이다.

잠깐 이상한 세계로 빠진 것처럼 그날의 여행은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호치민 여행 고수인 내게 그날 하루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여행이라는 건,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 진짜 여행은 그런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화 아줌마 집에서 유쾌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심부름을 시킨 건, 나를 마담집 도련님이 아닌 자기 동생이나 조카 쯤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사실 그런 '인정'은 찌어이를 '부리는' 동안 상상해본 적도, 기대한 적도 없다. 그런데 찌어이에게 라면 끓여 오라고 시켰던 것보다 심부름했던 게 유쾌한 기억 남아 있다니. 아마도 나는 화 아줌마 집에서 사람은 평등하게 만날 때 가장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살짝 배운 것 같다.

화 아줌마의 시골집. 나를 돌아보게 한 최고의 여행지였다.

덧붙이는 글 | 공정여행 기사 응모



태그:#베트남, #찌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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