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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멈추지 않아 온통 뿌옇다.
▲ 데우랄리 가는 길 눈이 멈추지 않아 온통 뿌옇다.
ⓒ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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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겐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여름 나는 인디고 여행학교에서 40일간 인도와 네팔 여행을 했다. 그때 5일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였다. 고작 푼힐에 올라갈 뿐이면서도 '미워서 죽이려고 날 이곳에 보낸 건 아닐까?' 하며 여행을 적극 추천해 준 이모를 원망했다. 또 '내가 여길 두 번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런데! 인간은 정말 망각의 동물인 것인지 트레킹의 악몽이 미화된 건지, 난 단 6개월 만에 다시 네팔에 가기로 결정했다. 안나푸르나를 간다하면 ABC까진 가줘야 좀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번에 가면 지난번에 비가 와서 보지 못한 설산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등반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솔직히 프리스쿨을 하고 나서 좀 실망했다. 같이 가는 사람들을 보니 잘 맞을 것 같은 또래도 없어 보였고, 인원도 적어서 재밌는 분위기도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프리스쿨 후 가기 싫다고 툴툴댔다. 하지만 곧 '이건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트레킹을 목적으로 가는 거니까 경건한 마음으로 좋은 경험하고 와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했다.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또 겁이 났다. 비행기 뜰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나 혼자 있어야 되나? 그때 혜완이 언니와 은지 언니가 말을 걸어줬다. 너무 고마웠다. 7시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카트만두공항에 도착했다. 6개월 만에 고속버스터미널 같은 카트만두 공항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내가 여길 다시 오다니…'. 멀미날 정도로 오래 차를 타고 포카라로 이동하여 '쓰리 시스터즈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이동 중에 친해진 한정현과 한 방을 썼다.

네팔에 다시 와서 반갑고 기뻤지만, 집에 가고 싶었다

다음 날(12/29) 포카라 자유여행을 했다. 지난여름에 여행했던 곳을 다시 보고 싶어서 한정현과 둘이 일행들에게서 떨어져 낯익은 포카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기억을 더듬어 지난여름 친구들과 돌아다니던 곳을 찾아간 나는 혼자 기뻐하며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그런 다음에는 친구들에게 포카라에 왔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 인터넷 카페에 가
거나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한정현이는 "네팔에 컴퓨터 하러 왔냐"며 툴툴대서 포기했다.

앞으로 10일 간의 안나푸르나 등정에 함께 할 가이드와 포터를 만난 다음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네팔에 다시 와서 반갑고 기뻤지만 사람들과는 여전히 서먹서먹해서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트레킹을 시작하는 12월 30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나야풀로 이동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앞으로 10일 동안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걱정이 되진 않았다. 걱정보다는 뭔가 기대가 더 컸다. 점심 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헉헉대며 걷는데, 어느새 난 거의 맨 끝으로 뒤처져 있었다.

첫째 날은 쉬운 코스인데도 롯지에 거의 도착할 때쯤엔 내가 꼴찌였다.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롯지에 도착해 저녁 먹을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오늘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롯지에 도착해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수다 떨고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을 말끔하게 잊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들과 친하지도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할 때는 알고 있는 길이라 힘들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큰 이유가 아니었다. 심심하고 무기력해서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나중에 커서 친구랑 와도 되는 건데 내가 여길 왜 왔나 싶었다.

둘째 날(12/31)의 목적지는 고레파니였다. 아무리 미화된 지난여름의 기억에서도 둘째 날만큼은 정말 지옥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은 나를 시작부터 뒤처지게 했다. 두세 시간 동안 계속된 돌계단을 빠져나와 점심 식사하기 위해 멈췄다. 볼일을 보고 혼자 일행에게서 좀 떨어져 있는데, 싱숭생숭한 기분에 어울리지 않게 날씨가 참 좋았다. 트레킹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다가 쉴 틈이 생기면 집에 가고 싶어졌다.

점심을 먹고 경사가 있는 숲길을 걸어 고레파니에 도착했다. 고레파니의 롯지는 산 아래에 있는 웬만한 레스토랑과 숙소 뺨칠 만큼 크고 좋았다. 옷을 갈아입고 방에 있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힘든 일정에 대한 보상으로 저녁메뉴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탁이 아주 호화로웠다. 저녁 식사 후에 한 방에 모여 인터뷰를 하는데 내가 여길 왜 왔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고레파니 롯지에서는 사람들과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트레킹 셋째 날은 1월 1일 새해 첫날이다. 그날은 아침 일찍 푼힐 전망대에 올라 새해 해돋이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날씨가 안 좋아서 망창은 아침 날씨를 보고 갈 건지 말건
지 판단하겠다고 했었다. 아침이 되자 우리는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푼힐로 향했다. 약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적어도 2시간은 걸린 듯 했다. 내리막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고 게다가 속이 비어서인지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물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고레파니로 가는 길보다 10배는 힘든 것 같았다.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기어서 푼힐에 도착했다. 너무 힘들어서 사진을 찍거나 전망대에 올라갈 생각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었더니 효석 오빠가 나를 비롯한 여러 명에게 차를 사줬다. 블랙티를 마시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일행들이 먼저 내려가기에 급히 전망대에 올라가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표지판 앞에서도 독사진을 찍고 쫓아갔다. 그런데 날이 흐려서 일출을 못 본 것이 아쉬웠다.

2012년 1월 1일 새해 첫날... 푼힐 전망대에 올라

푼힐 전망대에서 차를 파는 사람들. 차를 마시면서 숨을 고를 수 있다.
▲ 푼힐 전망대 푼힐 전망대에서 차를 파는 사람들. 차를 마시면서 숨을 고를 수 있다.
ⓒ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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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지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한 후 바로 타다파니로 향했다. 고레파니에서 타다파니로 가는 길은 일정에 나온 대로 '오르막길 후 능선길'이었다. 나는 이 날 코스가 제일 맘에 들었다. 초반 오르막길은 힘들었지만 이 후에 이어진 능선길에서는 날아다녔다. 처음으로 뒤처지지 않고 선두로 걸었다. 그런데 가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우리가 스틱을 쥐고 헉헉대며 걸어 올라가는 곳에서, 지상에서 2700m나 높은 곳에서, 산소가 부족해 고산병 증세가 올 수도 있는 바로 그 곳에서, 마라톤을 하는 것이다!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데 너무나 가벼운 차림을 하고 뛰어가는 한 선수를 처음 보고는 정말 황당하고 놀라서 웃음이 나왔다.

이니그마는 몰래 카메라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마라톤을 한다는 것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후로도 선수들과 계속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라마스테(Namaste!)" 하고 인사도 건네고,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 하며 새해 인사도 나누었다. 천천히 걸어도 힘든 곳에서 마라톤을 하다니…. 마라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라면, 안나푸르나 마라톤은 한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인 것이다.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도 참 대단한 것 같다.

능선길은 편하게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그 생각이 끊기지 않도록 속도를 유지하며 쉬지 않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 오래 쉬지 말고 빨리 출발하자며 가이드를 재촉했다. 그런데 가이드는 우리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기다려 주지 않으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따라오려고 서두르게 되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앞에서 서둘러 가면 뒤처진 사람들의 마음이 급해지니까 선두가 그 사람들을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그 말이 왠지 나에게는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니 내가 뒤처졌을 때 선두가 저 앞에서 쉬고 있는 것이 보이면 '내가 많이 뒤처져 있지는 않구나'하는 안도감을 느꼈었다. 그러면서도 그 땐 선두가 기다리는 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오히려 '한 2분만 쉬어도 충분한데, 왜 이렇게 오래 쉬었지?' 하며 하릴없이 기다려 준 선두를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가이드의 말을 듣고 가이드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능선길을 지나 타다파니에 도착해서 핫 샤워를 하고 다이닝 홀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난로 덕분에 아주 훈훈했지만, 너무 건조해서 피부가 갈라질 정도였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일 있을 등반이 걱정되어 추운 줄도 모르고 밖에 나가 눈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눈은 무서운 속도로 쌓였다.

밤새 눈이 그쳤다. 트레킹 4일차(1/2)의 타다파니에서 촘롱까지 길은 편하고 아름다워서 올레길 같은 느낌이었다. 알프스를 가본 적은 없지만, 알프스가 이런 느낌은 아닐까 생각했다. 힘들지도 않았고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길이 나오기
전까지의 숲길은 엉망이었다. 전날 눈이 와서 우리가 출발할 때쯤엔 땅이 질척질척한 데다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곳곳에 있었다. 두세 번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어 배낭과
바지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이 날은 비오고 눈도 오고 우박까지 왔다. 경험 할 수 있는 모든 날씨를 다 경험한 것 같았다.

가는 내내 풍경이 아름다웠다.
▲ 촘롱 가는 길 가는 내내 풍경이 아름다웠다.
ⓒ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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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에서 묵은 롯지는 크고 좋았다. 핫 샤워가 되고 방마다 콘센트가 있어 마치 천국 같았다. 오랜만에 MP3와 카메라도 100%로 충전해놓고 샤워를 했다. 앞으로 더 올라가면 정말 '하드코어'라 마지막 만찬이라는 의미에서 저녁메뉴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테이블이 정말 푸짐했다. 그런데 그곳 음식이 하나같이 다 느끼하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선택한 음식도 먹기 힘들어서 한 사람당 두 조각씩 먹을 수 있게 주문한 피자 세 판에는 손도 못 댔다.

게다가 그 중 두 판은 빵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모두 너무 배불러서 더 먹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식탁 위에는 음식이 좀 남아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먹자는 생각에 원래는 식사를 다 마치고 하는 닫기 모임을 남은 음식을 먹으면서 했다. 닫기 모임을 하는 데 망창이 위로 올라갈수록 더 힘들고 씻을 수도 없다고 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게 무서웠다.

트레킹 5일차인 1월 3일 아침에 서둘러 짐을 싸는 데 하산할 때 촘롱에 다시 들를 것이 불필요한 짐은 두고 가라고 해서 빨랫거리들을 빼놓았다. 그랬더니 배낭무게가 3kg는 가벼워진 듯 했다. 가방이 훨씬 가벼워져서 그런지 트레킹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체력이나 정신력 같은 게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초반에는 정말 힘들어서 자주 쉬어야했는데 4일 정도 트레킹을 하다 보니 익숙해졌는지 적게 쉬고 더 많이 걸을 수 있었다. 이날의 원래 목적지는 도반이었는데 도반 아래에 있는 밤부 롯지에 머물렀다.

밤부 롯지는 시설이 부족하고 불편했다. 그래도 밤부 롯지까지는 수도꼭지가 있어서 이 닦고 세수하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하 언니와 수경이 언니가 그 쌀쌀한 날씨에, 심지어 비도 오고 있었는데, 졸졸 나오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다! 은하 언니와 수경이 언니는 트레킹 내내 항상 선두를 지켰는데, 일찍 숙소에 도착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샤워장을 차지했다.

수면도구를 배낭에서 꺼내기 쉽게 제일 위에 올려둔다고 했던 거 같다. 그렇더라도 밤부 롯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샤워하는 그 모습은 정말 놀라웠다. 흡사 샤워하기 위해 사
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샤워를 하지 않고 기름진 머리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썼다. 저녁식사 전에 카드놀이를 했는데 이제 사람들이랑 웬만큼 친해진 것 같았다. 재미없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안 들었지만, 앞으로 올라갈 ABC 등정이 겁났다. 고산병에 걸릴까 봐도 무섭고, 가는 길에 눈이 오면 어쩌나 걱정되고 추위도 무서웠다.

앞으로 올라갈 ABC 등정... 고산병에 걸릴까 봐, 눈이 올까 봐 겁났다

우리들의 네팔식 이름.
▲ 이름 우리들의 네팔식 이름.
ⓒ 김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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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6일차(1/4)의 목적지인 데우랄리는 고도3200m에 위치해 있다. 데우랄리로 가는데 점심 먹을 때부터 눈이 왔다. 원래부터 눈이 약간 쌓여 있었는데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앞이 뿌예지고 미끄러워서 걷기가 더 어려워졌다. 눈을 맞으며 걷는데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엄마가 알면 여기에 보낸 걸 후회하겠지?'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만큼 정말 '고생스럽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눈을 맞으면서 안나푸르나를 등반해 본 경험을 가진 중고등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엄청 대견스러웠다. 내리막이 나오면 앉아서 미끄럼틀 타듯이 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다. 롯지가 보이기에 우리가 묵을 롯지인 줄 알고 안도했는데 한 참 더 가야 했다.

다음 롯지가 보이자 '저것이 우리가 묵을 롯지가 아니라면 여기서 떨어져 버릴 거야!' 하는말이 절로 나왔다. 롯지에 도착했을 때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다. 롯지에 도착해서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망창은 내일 아침까지 계속 눈이 온다면 ABC에 못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ABC에 가는 게 정말 너무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사실 그 말을 듣고 내심 기뻤다.

그래서 하느님께 눈이 계속 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눈이 그쳐서 내일 ABC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트레킹 하는 내내 나와 함께 뒤를 지키던 은지 언니에게 ABC에 가고 싶냐고 물어봤다. 언니는 여기까지 올라 왔는데 ABC에 못가면 너무 아깝지 않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수긍했다. 데우랄리까지 왔는데, 하루만 더 가면 최종 목적지인데 여기서 막히면 정말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더 오면 롯지가 눈에 파묻힐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눈이 그치길 빌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1/5) 아침 눈이 그쳐 ABC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손가락 발가락이 찢어질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밤새 쌓인 눈을 밟으며 출발했다. 앞사람의 발자국에 의지하여 한참을 걷는데 우리가 점심을 먹을 ABC 식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계단에 혜완이 언니가 허탈하게 앉아있는 게 보였다. 계단 위쪽에 롯지 비슷한 조그마한 집이 있어서 나는 그게 식당인 줄 알고 좋아했다. 그런데 혜완이 언니가 저 건물은 미니어처라고 말했다. 언니는 계단과 길, 두 갈래로 갈라지자 미니어처를 ABC로 착각하고 계단을 올라갔던 것이다.

미니어처를 만든 의도가 뭔지 너무 어이없고 황당했다. 그 후로도 ABC를 앞둔 여행자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미로 같은 갈림길이 계속 나왔다. 두 갈래, 심지어는 네 갈래로 갈라지기도 했다. 길을 찾느라고 이쪽저쪽 헤매는 바람에 10배는 더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큰 바위를 지나가자 그때까지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ABC가 떡하니 나타났다. 알고 보니 그 큰 바위에 쏙 가려있던 것이다. 마침내 식당을 찾아가 밥을 먹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길을 나서려니 더 힘들었다. 내리는 눈 때문에 길이 희미해지고 앞도 잘 안 보였다. 가는 도중 큰 바위 밑에서 잠깐 쉬는 데 배낭에 기대어 누우니 너무 아늑하고 편해서 계속 그대로 누워있고 싶었다. 그래도 효석 오빠가 물도 주고 기다려주고 해서 걷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ABC에 도착했다... 침대 누워서 물건을 찾을 때조차 숨이 차

눈이 많이 쌓여있다.
▲ ABC 가는 길 눈이 많이 쌓여있다.
ⓒ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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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ABC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치는 와중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라고 쓰인 표지판 앞에서 한 컷 찍고 10분 정도 또 올라가서야 마침내 롯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ABC에서는 산소가 부족한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서 물건을 찾을 때조차 숨이 찼다. 정현이는 코피를 흘렸고, 은지언니는 미열과 두통으로 고산병 증세를 보였다. 근데 나는 천천히 기어 와서 그랬는지 쌩쌩했다. 며칠 전부터 그토록 두렵기만 했던 ABC는 예상 밖으로 평범했다. 하지만 7일 동안 정말 고생해서 이곳에 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하산 3일 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1월 6일 아침 일출을 보러 6시부터 일어나서 비몽사몽 롯지 뒤쪽으로 갔다. 그 장소는 산 절벽으로 둘러싸인 분지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해가 솟아오르면서 반대편 산 절벽이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드디어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재미있었다. 경사가 있는 곳이 나오면 앉아서 스틱으로 밀면서 내려갔는데 스키를 타는 것 같았다. 신발에 눈이 들어가고 바지가 젖는 불편함만 빼면 편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틀에 걸쳐 올라온 거리를 하루 만에 내려가야 해서 많이 힘들었다. 게다가 원래 목적지는 시누와까지였는데 밤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어두워져서 랜턴을 켜고 겨우 걸어갔다. 밤부에 도착해서 오랜만에 보는 수도꼭지가 반가
워 이도 닦고 세수도 했다.

트레킹 9일차(1/7). 일정대로라면 톨카로 가야했으나 그 전날 밤부에서 멈췄기 때문에 총 일정 완료 지점을 원래 예정했던 페디가 아닌 나야풀로 바꾸었다. 그에 따라 그 날의 목적지도 바뀌었다. 촘롱에서 점심을 하고 전에 맡긴 짐을 찾아 출발했다. 짐이 늘어나니 가방이 무거웠지만 곧 롯지에 도착했다. 촘롱에서 불과 1시간 거리인 지누단다에서 멈춘 것이다. 처음에는 잠깐 쉬었다 가는 줄 알았는데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벌써 짐을 푼 상태였다. 4시도 안된 시간이라 더 갈 수 있지 않나? 오늘 좀 더 가둬야 내일 편할 텐데 하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가이드와 포터는 벌써 가까이에 있는 온천에 간다며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온천에 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왕복 1시간이 걸린다기에 바로 포기했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혜완이 언니가 어떤 외국인과 대화를 하고 있기에 다가갔다. 그 사람은 내게 인사하고 자기소개를 하더니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물었다. 그 외국인의 이름은 잭이었던 것 같다. 어느새 은지언니도 대화에 합류하였고 잭이 "Come! join us!"하며 우리를 식당 앞에 있는 야외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혜완 언니는 빠져버렸고 어쩌다 보니 은지 언니와 내가 잭과 또 다른 외국인 앞에 앉아 있었다. 또 다른 외국인의 이름은 밥이었다. 잭은 미국인으로 애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한다고 했다. 밥은 독일에서 태어나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살고 있는 수학자라고 했다. 언니와 내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색하게 웃으며 걱정하고 있는데 마침 주호오빠가 식당에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주호 오빠를 끌고 와서 통역하게 했다.

어느새 우리 일행이 거의 다 모여 외국인 두 명과 단체로 우리나라의 역사와 정치, 북한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촛불시위와 한미 FTA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높은 미국 의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북한과 미국이 전쟁을 하면 누구를 응원할 것이냐, 현재 한국의 교육제도에 만족하느냐, 남북통일을 원하느냐 하는 것들을 물었다. 우리말로도 쉽지 않은 토론을 영어로 하고 있자니 정말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했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말했고, 밥은 한국의 다른 학생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그는 싱가포르의 청소년들이 정치나 시사에 관심이 없고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에서 누가 우승할지 같은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고 걱정했다. 망창이 와서 내일 일정을 위해 일찍 자야한다고 해서 토론은 마무리 되었다.

한국이라고 하면 당연히 남한으로 알 거로 생각했는데 남한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 물어서 이상했다. 나는 비교적 시사에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외국인에게 설명하기에는 확실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시사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에 놀랐고, 영어 공부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트레킹 마지막 날(1/8)이다. 10일 간의 트레킹이 끝나는 날이었다. 걷고, 점심 먹고, 또 걷고 하다 보니 마침내 포장길이 나왔다. 거의 다 왔다는 증거다. 10일 간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 싶어서 효석 오빠 MP3에서 가장 상큼한 노래(Suddenly I See)를 반복재생해서 들었다. 그렇게 노래를 들으면서 걷는데 정말 뭔가가 찡했다. 그 힘든 안나푸르나 등반을 아무 탈 없이 잘 마쳤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트레킹을 시작할 때 건넜던 큰 다리가 보이자 너무 반가워서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렀다. 그 다리를 건너 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는 길이 이어지고 마침내 차도 쪽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을 보자 정말 트레킹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포카라로 가면서 나 자신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고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고 말해줬다.

포카라에 도착하자 가이드와 포터가 한 명씩 내리기 시작했다.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10일 동안 우리를 안내해주고 도와줬던 사람들이니만큼 참 고마웠고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지난여름 트레킹에서는 기간이 짧고 여름이라 배낭도 비교적 가벼워서 포터를 고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포터를 세 명이나 고용해서 느낌이 새로웠다. 글을 쓰면서 쓰리 씨스터즈에 대해 검색하다가 포터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은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이드는 무거운 짐을 들지 않고 안내만 하면 되고 일당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일당은 12달러, 포터의 일당은 8달러라고 한다. 그냥 오르기도 어려운 산을 무거운 짐까지 지고 오르는 대가치고는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 포터들은 여자여서 남자포터들과 체력차이가 있을 것인데 10개가 넘는 무거운 침낭을 지고 가게 하는 게 미안했다. 자기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고 가게 하는 게 옳지 않은 일 같았다. 그런데 트레킹을 하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포터는 여행자들의 짐을 들어주는 대신 돈을 벌고, 여행자들은 짐이 가벼워져서 좋은 서로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누단다 롯지에서 백숙 해먹는 한국인들을 보다 

그런데 포터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자신들은 작은 배낭을 메고 가는 한국인 단체 여행자들을 보았다. 돈을 주고 포터를 고용했으니 그들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지누단다의 롯지에서는 놀랍게도 백숙을 해먹는 한국인들을 보았다. 그 재료까지 짐으로 지고 왔다는 얘기인데, 포터들이 지고 가기 때문에 재료를 가져오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같았다. 만약 자신들이 그 짐을 다 지고 히말라야 등반을 해야 했다면 이곳에까지 와서 백숙을 먹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난 여태까지 공정여행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다. 근데 이번 트레킹을 통해서 공정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그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공정여행이란 그 지역의 음식을 먹고, 공정한 대가를 주고, 착취하지 않으며 그 지역의 물건을 소비해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는 여행이다. 포터들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히말라야까지 와서 백숙을 해먹는 행동은 그 나라를 체험하겠다는 마음이 없이 그저 편안하고 입맛에 맞는 것만 누리겠다는 아주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 같다.

우리 일행들이 식사 때마다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 같은 다국적 기업의 제품을 거리낌 없이 마신 것도 공정여행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느껴져 조금 불편했다. 탄산음료보다는 찌아(밀크티)나 라씨를 마셨다면 건강에도 좋고, 네팔의 음식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고 지역경제에 도움에도 되었을 것이다.

네팔 사람들의 주식인 '달밧'. 산 위에서도 비교적 저렴하다.
▲ 달밧 네팔 사람들의 주식인 '달밧'. 산 위에서도 비교적 저렴하다.
ⓒ 김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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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와 포터와 헤어지고 나서 포카라에 있는 '쓰리 씨스터즈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는데 트레킹을 하러 간 사이 방이 다 차서 2개 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4명 만 '쓰리 씨스터즈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가야했다. 모두 다른 곳에 가기를 꺼려 해서 '가위 바위 보'에 진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는데 옮긴 곳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내 방 마냥 아늑했고, 초등학교 때 합창단에서유럽 공연 갔을 때 머물렀던 독일이나 이태리의 가정집 같았다. 그곳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 밥으로는 무사카를 먹었는데 리조또 비슷한 음식으로 정말 맛있었다. 메뉴가 나오기 전에 한국에 전화를 하러 갔다. 엄마랑 통화할 때 살짝 울컥했다.

다음날(1/9)에는 포카라에서 자유여행을 하였다. 아침 식사를 할 사람은 7시 반까지 '쓰리시스터즈 게스트하우스'의 식당으로 오고, 그냥 잘 사람은 자다가 일어나서 자유여행을 시작하면 됐다. 난 며칠 전부터 그 식당의 요거트를 먹고 싶었기 때문에 반드시 아침식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어나보니 10시였다. 그래서 한정현을 깨워 느긋하게 근처 레스토랑에 가 '무거운 아침 식사(heavy breakfast)'를 먹었다. 기념품을 사야 했지만, 카트만두에 가서 사기로 하고 인터넷 카페에 가서 트레킹 마치고 포카라에 있다고 미니홈피에 글도 쓰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어떤 커피를 사야할 지 물어봤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남자 4명을 만나서 한정현이랑 자전거 한 대씩 빌려서 다 같이 돌아다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물과 간식을 사기위해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우연히 우리 가이드였던 럭슈미와 만났다.

우연히 만난 엄홍길 아저씨... 노트 빌려 사인받았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인 1월 10일, 카트만두로 갔다. 호텔에 도착했는데 주변이 무척 낯익었다. 놀랍게도 이번에 묵었던 호텔은 지난여름에 와서 묵었던 호텔 바로 옆에 있었다. 6개월 전에 왔던 곳이어서 어디에 큰 마트가 있는지 어디에 북한식당이 있는지 맛있는 베이커리는 어디에 있는지 다 기억이 났다. 우리는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런데 엄청나게 비쌀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자리에 앉지도 않고 메뉴판을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 비쌌다.

그래서 내빼려는 심산으로 네팔음식 밖에 없느냐고 묻고 그렇다는 대답에 우리는 네팔음식을 못 먹는다며 나왔다. 그리고 일본음식점에 가서 라면을 먹었다. 네팔까지 가서 일본음식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했긴 했지만, 맛은 괜찮았다.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데 앞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팔기에 엄마의 부탁이 떠올라 1kg 샀다. 마침내 탑승 시간이 되고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들 사이에 산악인 엄홍길이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사진이나 찍으려고 가까이 갔다. 근데 대담하게도 '망창'이 사인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엄홍길 아저씨는 흔쾌히 사인을 해주셨고, 우리도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근데 나는 마땅한 종이가 없었다. 그때 수경이 언니가 하드커버노트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고, 엄홍길 아저씨는 제대로 준비가 돼 있다며 길게 사인을 해주었다. 그것을 본 나는 수경이 언니한테 노트를 빌려 사인을 받았다. 한바탕 수선을 떠는 사이에 게이트가 열렸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 안나푸르나 여행기
ⓒ 장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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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2011년 12월 28일부터 2012년 1월 11일까지 안나푸르나 청소년 등반대에 참여하고 난 후 쓴 글입니다.



태그:#안나푸르나,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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