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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줄 수 없게 됐다. 사진은 어버이날을 앞두고 마을 부녀회가 마련한 경로잔치에서 부녀회원들이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모습.
▲ 카네이션 달아주는 아름다운 모습 더 이상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줄 수 없게 됐다. 사진은 어버이날을 앞두고 마을 부녀회가 마련한 경로잔치에서 부녀회원들이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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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맘때면 더욱 그리워지는 걸 어쩌랴. 이렇게라도 어머니의 기억을 더듬어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다시 펜을 들었다.

술 한 잔 마시고 술에 취해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면 조금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맥주컵 한 잔에 소주를 붓고 벌컥벌컥 마셔봤다. 하지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괜히 술을 마셨나보다. 그리움이, 가슴에 맺히는 후한이 더욱 메여 왔다. 너무나도 부르고 싶고 보고 싶은 어머니. 지금은 불러도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고 보고 싶어도 어린시절 내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는 그리운 외침이 되어버렸다.

2년 전 어머니의 환갑을 맞아 가족 모두가 산소를 찾았다. 주인공 빠진 환갑이었다.
▲ 어머니 환갑을 맞아 찾은 산소 2년 전 어머니의 환갑을 맞아 가족 모두가 산소를 찾았다. 주인공 빠진 환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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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내가 어머니 가슴에 마지막으로 카네이션을 달아준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하다. 이제 더는 카네이션도 달아드릴 수 없다. 벌써 10년. 어머니께서 우리 곁을 떠난 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다.

평생을 오직 자식들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는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2002 한일월드컵의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말이다.

종갓집 살림 책임지던 억척스런 어머니... 누구보다 '자식바보'

어머니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녘에 일어나 풍로를 돌리며 가족들의 아침을 준비했다. 사진은 태안 튤립꽃축제장에 전시된 풍로의 모습.
▲ 어머니의 풍로 어머니는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녘에 일어나 풍로를 돌리며 가족들의 아침을 준비했다. 사진은 태안 튤립꽃축제장에 전시된 풍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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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항상 자식 걱정에 까만 밤을 하얗게 샜다. 교회의 새벽종소리가 울리던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밥을 지었다. 밥이 익어가는 동안에는 매운 쌀겨 연기에도 연신 풍구(풍로)를 돌리며 소여물을 끓였다.

두 개의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무렵 가족들은 겨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하나밖에 없었던 좁은 샘가에는 학교 가기를 서두르는 동생들과 회사 출근 준비에 분주한 아버지가 한꺼번에 몰리는 통에 아침 댓바람부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소동을 잠재우는 역할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여물을 끓이며 덥힌 따뜻한 물을 세숫대야에 옮기면서도 어머니는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소동에도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가족들의 아침을 책임졌다.

아궁이에서는 새벽부터 어머니께서 정성껏 준비한 김이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어머니는 이 양은도시락에 가마솥에서 맛있게 익은 밥을, 또 새벽부터 준비한 정성이 담긴 반찬과 함께 우리 3남매의 점심도시락을 챙겨주셨다. 사진은 태안 튤립꽃축장에 마련된 추억의 교실.
▲ 양은 도시락 어머니는 이 양은도시락에 가마솥에서 맛있게 익은 밥을, 또 새벽부터 준비한 정성이 담긴 반찬과 함께 우리 3남매의 점심도시락을 챙겨주셨다. 사진은 태안 튤립꽃축장에 마련된 추억의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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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상에도 오르는 김이기도 하지만 우리 3남매의 점심 도시락 반찬이기도 했다. 아침상이 차려지고 안방 한켠에 붙어 있는 작은 부엌문이 열리면서 아침상이 들어온다. 좀 전에 구운 노릿노릿 잘 구워진 김도 밥상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밥상에 올려진 김 이외에 남은 김은 라면봉지에 담겨 양은도시락과 함께 우리 3남매의 가방에 담긴다.

아침식사까지 한바탕 우리 가족의 소란한(?) 아침이 지나면 어머니는 또 묵묵히 밥상을 치운다. 설거지가 끝나면 다시 밭으로 향한다. 5리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뙤약볕을 안고 밭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울만도 하지만 어머니는 묵묵히 밭으로 간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 앉아 또아리를 튼 수건 하나 머리에 이고 밭에 풀을 맨다. 매일같이 혼자서 풀을 매는 모습에 우리 남매들은 "우리 학교 갔다오면 같이 해. 혼자 하지 말구"하면서 말려도 봤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니들 학용품이라도 사 줘야지"하며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 기억 속에 자식들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았던 억척스런 어머니로 남아있다.

한 번은 학교 갔다가 오후 3시쯤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엌이었다.

슬쩍 부엌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어머니께서 밥에 물을 말아 김치를 반찬으로 시장기를 떼우고 있는게 아닌가. 순간 울컥했다. 왜? 집에 먹을 것 없는 가난한 가정도 아니었는데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엄마! 왜 지금 밥 먹어? 그것도 물 말아서?"

너무나 어이없게 난 어머니께 화를 냈다.

"어. 일하다가 끼니를 놓쳐서... 해 먹기도 뭐하고..."
"그래두 그렇지 왜 물을 말아 먹어. 일이 그렇게 좋아?"

철 없는 어린 시절 난 그렇게 어머니께 막말을 해댔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색도 하지 않고 급하게 밥그릇을 치우면서 "배고프지? 엄마가 뭐 해줄까?"하고 여전히 자식 걱정을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그랬다. 자식들 때문에 자신은 늘 뒷전이었다. 자라면서 우리 남매들은 '아들 딸 바보'인 어머니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성장했다.

어머니는 또 종가집의 맏며느리로 시집 와 종갓집의 큰 살림도 맡았다. 힘들 법도 하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종친을 대해 종친들의 입에 칭찬으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한 종친은 "우리 종부님 안 계시면 종친회가 제대로 될지 몰라"라고 할 정도로 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기도 했다.

집안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종갓집임에도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난 그렇게 성년으로 자랐고, 지금도 남부러울 것 없이 떳떳하게 살고 있다.

날 두 번 울린 어머니의 세 차례 눈물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사진도 몇 장 남아있지 않다. 시골집을 떠나면서 장롱 깊숙히 숨겨져 있던 어린 시절 사진 몇 장을 찾았다.
▲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어머니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사진도 몇 장 남아있지 않다. 시골집을 떠나면서 장롱 깊숙히 숨겨져 있던 어린 시절 사진 몇 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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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강인한 것처럼만 보였던 어머니도 자식 앞에선 천상 약한 어머니였다. 나를 두 번 울렸던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지난 2002년 어머니께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기 전까지 자라오면서 어머니는 내 앞에서 세 번의 눈물을 흘렸다.

항상 자식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였던 어머니. 어머니의 눈물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한 번은 내가 대학 입학원서를 쓰던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한창 대학입학원서를 쓰던 고3 말. 담임선생님은 원서쓰기 전 상담을 위해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학교에 올 수 없었고, 어머니는 학교에서 호출(?)하기 3일 전 트랙터가 뒤집히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매일같이 병원을 찾는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어머니는 "난 괜찮으니 공부 열심히 하라"며 연신 "미안해, 미안해"하며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다.

짜증을 내며 병원을 찾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본 어머니의 눈물에 더는 짜증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에 나도 울었다. 그러면서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되겠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또 한 번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입대 전날 난 또 한 번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 나에게 어머니는 입대 전날 옷자락이 다 젖도록 눈물을 보였다. 훈련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평생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아들과의 긴 이별이 어머니의 눈물샘을 자극했나보다.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잘 챙겨먹구. 차 조심하고..."하는 짤막한 말만을 되풀이하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무사히(?)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장교로 임관한 늠름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직까지도, 아니 평생 가슴에 묻어 둘 어머니의 눈물은 날 더욱 담금질했고, 지금도 힘들 때마다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새로 집을 지을 무렵 어머니께서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 시골집도 행복도시 예정지로 편입돼 지금은 흔적 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나의 추억속에, 그리고 몇 장의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다.
▲ 아직도 어머니의 온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시골집 새로 집을 지을 무렵 어머니께서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 시골집도 행복도시 예정지로 편입돼 지금은 흔적 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나의 추억속에, 그리고 몇 장의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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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버팀목이 돼 주던 어머니께서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다. 벌써 10년이다. 비록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의 추억과 사진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지만 어머니는 평생 내 가슴속에, 우리 가족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10년이 지났지만 마지막까지 자식걱정을 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밥 잘 챙겨 먹고, 차 조심하고..."

덧붙이는 글 | '나의 어머니' 응모글입니다.



태그:#어머니, #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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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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