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성왕)의 어린 시절은 시련의 나날이었다. 그는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부여 금와왕 밑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시기하는 부여 왕자들 틈 속에서 항상 생명의 위협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시련이 원동력이 되어 대제국 고구려의 시조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런 기적을 이루기 전까지 그는 살얼음을 디디는 긴장감 속에 하루하루를 견뎌야만 했다.
주몽의 시련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철없는 어머니 유화와 무책임한 아버지 해모수의 혼전 성관계가 그 출발이었다고 단정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편에, 딸의 혼전 성관계에 분노한 아버지 하백이 유화를 백두산 남쪽 우발수로 쫓아낸 것이 인연이 되어 유화와 금와왕이 만났고 금와왕 밑에서 주몽이 태어나 성장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몽의 시련, 부모의 자유연애 때문이었다물론 혼전 성관계가 유화 모자에게 시련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을 면밀히 뜯어보면, 보다 더 본질적인 요인이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우발수에서 금와왕을 우연히 만났을 때, 유화는 자신이 그곳까지 흘러들어간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라 합니다. 동생들과 함께 놀러 나갔을 때 어느 남자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자칭하면서 저를 웅심산 밑 압록강가의 집으로 끌어들여 (저를) 범하고 간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중매도 없이 사람을 따랐다고 책망하시면서(父母責我無媒而從人) 우발수로 쫓아내셨습니다." 하백이 유화를 책망한 것은 단순히 혼전(婚前)에 이성을 만났다거나 무책임한 '놈'에게 눈이 멀어 신세를 망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더 본질적인 요인은 유화가 무매(無媒) 즉 중매도 없이 남자를 만났다는 점이었다. 자유연애를 해서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유였다.
유화와 해모수의 자유연애 때문에 유화가 고향에서 쫓겨나고, 그로 인해 유화와 금와왕이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몽이 금와왕 밑에서 태어나 온갖 시련을 겪은 것이다. 주몽의 시련은 부모의 자유연애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중매를 통해 남녀가 만나야 한다'는 관습을 깬 두 남녀의 '불장난'이 문제의 발단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선 법적으로도 중매결혼을 강요
오늘날에는 자유연애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에서 그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중매결혼이 남녀의 보편적인 결합방식이었고 그것을 깨는 남녀는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런 문화는 주몽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으로부터 시작해서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했다.
예컨대, 고대 중국의 예법을 정리한 <예기> '곡례' 편에서는 "남녀는 중매가 오고가지 않으면 서로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며, 예물을 받지 않으면 사귀지도 않고 친해지지도 않는다"라고 했다. 고대 중국의 시를 정리한 <시경> '남산' 편에도 "아내를 취하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중매가 아니면 얻지 못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맹자> '등문공' 편에는 "부모의 명령과 중매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을 뚫고 서로 엿보며 담을 넘어 서로 붙어 다니면 부모와 나라사람들이 모두 천시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자유연애나 연애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천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나라의 법률인 당률(唐律)의 주석서로서 법적 효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중국 형법의 모범이 된 <당률소의>에는 "시집가거나 장가갈 때는 중매인이 있어야 한다"라는 표현과 "혼인할 때는 반드시 중매인을 세운다"라는 표현이 있다. 중국에서는 중매가 법적으로도 강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작품에까지 등장한 중매결혼의 중요성중매결혼의 강제성은 경전이나 법률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만큼 대중의 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청나라 때에 편찬된 당나라 시집인 <전당시>에 이런 시들이 있다.
가난한 집 딸은 밉지 않게 생겨도인연 맺어 시집가기 더디네.명성 있는 이 찾아오기 기다려도소개해주는 사람 없이 때를 놓치듯이-옹도의 <감흥>박명한 저는 머리가 세도록해가 바뀌고 바뀌어도 결혼하지 못해요(중략)중매하는 이들에게 업신여김만 당해요 - 왕백정의 <첩박명>'소개해주는 사람'이나 '중매하는 이들'이 없어서 노처녀·노총각이 양산되는 세태를 반영하는 시들이다. 문학작품의 소재가 될 만큼 중매결혼이 강제성을 발휘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중매결혼이 강제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연애로 만난 사람들일지라도 혼례를 올리기 전에 형식적으로나마 중매인의 도움을 빌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나라 때의 소설인 <이왜전>에서 이왜(李娃)가 남자와 수년간 동거하다가 막상 혼례를 올릴 때에는 중매결혼을 가장했다는 이야기로부터 그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중매 없는 결혼은 왕따를 자초하는 일
중매를 거쳐야만 이성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문화는 남녀가 보다 더 책임감 있게 교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2가지 방향에서 사회질서의 유지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가정의 성립단계에서부터 사회적 통제를 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중매를 서는 사람들은 향촌사회에서 최소한의 경제력과 인망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국가나 사회는 개인과 가정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개인 스스로 사회규범을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부모나 동네 어른 등의 중개 없이는 결혼을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에, 개인은 어려서부터 사회규범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수단을 통해 한국·중국의 지배권력은 개인들을 사회질서 속에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중매 없이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왕따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협동노동을 필요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굶어죽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관료가 되건 수공업자가 되건 상인이 되건 다 마찬가지였다. 또 주몽의 사례처럼 그것은 장래 출생할 자녀의 사회생활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엄청난 반전으로 이어진 '그들'의 불장난중매결혼 여부는 주민등록등본상의 전출입 이력처럼 평생 개인을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A 지역에서 중매 없이 결혼한 다음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서 B지역으로 이주한 경우에도 두 남녀는 왕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결혼했는지 알 수 없는 의문의 남녀에 대한 B지역 토박이들의 시선은 따가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중매 없이 이루어지는 자유연애 혹은 연애결혼이 아주 오래 전부터 사회적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하백이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유화를 멀리 내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몽이 겪은 어린 시절의 시련은 단순히 유화가 혼전 성관계를 맺은 일이 아니라 중매 없이 이성을 만난 일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부모의 자유연애로 인한 콤플렉스가 결국에는 주몽의 '대박 출세'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이다. 주몽의 콤플렉스는 그에게 시련을 주었고 그 시련은 도리어 그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대제국 고구려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 중매 없이 자유연애를 즐긴 유화와 해모수의 '불장난'이 그런 엄청난 반전으로 이어질 줄이야 그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