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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설은 고유 명절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절기 휴가, 연휴라는 개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라고 고향을 찾는 이들도 많지만, 연휴를 즐기고자 하는 해외 여행객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다. 특히 금년의 경우 인천국제공항공사에 의하면, 설 연휴기간(2월 1~6일) 인천공항 국제선 이용객은 지난해 설 연휴기간보다 13.9% 증가한 58만8902명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이주노동자들은 명절에 고향을 찾아 귀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비용 문제도 있겠지만, 인력난에 시달리는 사측으로부터 휴가를 다녀올 만한 충분한 기간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땅에서 고향 친지들이라도 손쉽게 만나 회포를 풀 수 있다면 다행일 텐데, 이번 설 연휴 기간에는 가까운 고향 친구들을 만나는 것조차 통제와 제한을 받는 일들이 벌어져 쓸쓸한 명절을 보내야 했다.

 

정부가 설 연휴 기간 동안 이주노동자들 이동 통제?

 

정부는 지난 1월 28일 '구제역 차단 확산 방지를 위한 외국인근로자 외부이동 자제 당부'라는 제목으로 법무부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국내 축산농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 외국인근로자가 구제역 발생 지역으로부터 비발생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동을 자제토록 하는 조치를 병행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정부는 축산농가에 근무 중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통제 이외에도, 외국인들이 구제역 발생 지역으로부터 비발생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 연휴를 전후하여 열흘 동안 기차역이나 각 지역 버스터미널, 시외버스 정류장 등 다중 이용시설과 지역간 주요 이동 통로인 거점도로를 중심으로 유관기관과 합동으로 점검활동 및 순찰을 실시하였고, 외국인 이동 자제 안내문을 배포하는 등 적극적인 이동 통제활동을 실시하였다. 설 연휴와 같은 명절기간 동안, 다중 이용시설과 거점도로를 중심으로 한 단속은 과거에는 지양됐던 활동이란 점에서 금년 정부의 이동 통제는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구제역이 난리라지만, 누군가 나에게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만한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이동제한을 한다고 법무부가 당당하게 보도자료를 내놓을 수 있는 현실, 이것이 우리나라 인권 현주소다.

 

이동 제한 관련하여 그 외에 어떤 조치들이 취해졌나?

 

우선, 구제역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축산업분야 외국인근로자 신규 고용을 억제하기 위해 법무부는 외국 인력에 대해 사증발급인정서 발급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축산업 분야에 근무 중인 이주노동자의 사업장변경을 허가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는 축산농가가 문을 닫아 실직해도 근무처를 옮길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구제역 발생으로 인해 이동제한을 받는 모든 체류외국인의 각종 체류허가 신청이나 신고 사항을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방문하지 않고도 인터넷을 통한 전자민원이나 팩스 등으로 접수토록 하여 이동제한 해제 후에 처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제역 방역을 위한 노력이 국가적인 전쟁 수준으로 치러지는 현실에서 정부는 이번 조치가 일정 부분 합리성을 갖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이 합리성을 가지려면, 어느 일방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 정부의 조치를 보면 구제역 발생이나 확산의 책임이 초기 대응을 잘못한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산 책임을 전적으로 이주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이주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을 앞두고 정부가 축산농가에게 구제역 차단 확산 방지를 위해 이주노동자 외부이동 자제를 요청한 부분은 구제역 발생의 원인을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나 동남아를 방문한 축산농가 책임으로 돌리는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책임회피 정책의 결정판이다.

 

DNA 조사를 통해 이번 구제역이 일본에서 발생한 구제역과 유전자적으로 동일하며, 안동에서 발생한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구제역 확산의 책임을 초기방역 실패나 방역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이주노동자나 축산농가에 떠넘기는 뻔뻔함을 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관계를 외면하고, 왜곡하는 정부의 태도가 아쉽기만 하다.

 

사실상 이번 구제역 확산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축산 농가들은 피해보상이라도 받는다. 축산농가에는 살처분 보상금과 생계안정자금 제공 등 다양한 지원이 이뤄지지만, 노동자에 대한 정부 대책은 전무하다.

 

대한양돈협회 등에서는 전국 8000여 양돈농가에 종사하는 3만 명 가량의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인 1만 5000명 정도가 외국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작년 말 출입국통계월보에 의하더라도, 농축산업계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는 9849명에 이른다는 점에서 대한양돈협회의 추정치가 일정 부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구제역 사태 이후 축산농가의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이처럼 구제역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실직당하고도 구직하지 못한다?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실직이 발생할 수 있다. 가령 돼지를 기르던 농장에서 모든 돼지에 대한 살처분이 진행됐다고 치자. 농장은 문을 닫게 되고,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실직하게 된다. 그러면 농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혼자 남아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구제역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며, 주인도 떠난 돈사를 지킬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상식적인 선에서 실직이 발생함에도, 그 사후처리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줄을 잇는다. 농장주들 중에는 살처분 이후 자신은 농장을 지키지 않으면서, 만만한 이주노동자들에게 빈 축사를 지키게 하며 사업장 변경을 허락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사업장 변경을 허락받았다 하더라도, 구제역 발생 이후 방역 당국은 다른 지역으로 바로 가면 구제역을 전염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동 통제를 실시해 왔다. 그런데 앞으로는 아예 근무처변경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직 기간 동안 이들에 대한 고용보험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물질적 보상 역시 따르지 않는다.

 

축산농가와 방역 당국의 허락을 얻어 사업장 변경을 하게 되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은 농축산 업종 특성상 동절기에 또 다른 일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축산업 종사자들은 구제역 발생지역에서 왔다는 사실로 인해, 축산업종에 취업할 엄두는 꿈도 못 꾸고, 시설 재배를 하는 곳들은 농한기라, 일손을 구하는 곳이 흔치 않다.

 

상황이 이런데도, 구제역으로 졸지에 실직당한 이들이 제조업으로 취업을 하거나, 3개월 안에 구직 못하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게 된다. 구제역이라는 대재앙 가운데 주목받고 위로받는 대상은 파묻힌 가축들과 농장주들, 그리고 방역 활동에 투입된 인력들뿐으로, 가장 사회적 약자라 할 이주노동자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지원책 필요하다

 

앞서 대한양돈협회에서 양돈농가 노동자 중 절반인 1만5000명 정도가 외국인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 반면, 작년 말 출입국통계월보는 농축산 전체 종사자가 9849명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현장과 정부 기록과의 차이는 결국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 이외에도 상당수가 농축산 현장에서 일하고 있고, 이들이 한국 축산업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농축산업종은 이주노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이다. 최저임금, 산재 적용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농한기나 구제역과 같은 상황에서는 늘 해고 일순위이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이주노동자 이동 제한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적인 면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이주노동자의 경우 사업장 변경 신청시 3회까지로 제한된 부분이나, 근로관계 종료 후 1개월 이내에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고, 3개월 이내에 근무처 변경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는 규정 등을 관계당국인 고용노동부와 협의를 끝내지 않은 부분이다.

 

물론 이 부분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이 걸려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촉박했다 하더라도, 사업장 변경 횟수 제한이나 3개월 이내 구직을 하지 못한 문제로 불안해 할 수 있는 상당수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명확한 안내가 없었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관계부처는 최소한 구제역으로 실직 위험에 처했거나, 실직 중인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보상 절차는 아니더라도, 피해 예방을 위한 조치들은 하루 빨리 실시해야 한다.  


태그:#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법무부, #구제역,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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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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