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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14일~25일까지 필리핀 이주과정 전반에 관한, 한국으로의 이주노동을 중심으로 한 실태 조사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단순히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주와 관련하여 출국 전, 이주노동 현장, 귀국 후까지 이주과정 전반을 살펴보고, 아시아에서 이주노동이 차지하는 위치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향후 어떤 정책이 개발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고민을 담아보고자 한다.

이번 실태 조사는 기자 외에 아산외국인노동자센터 우삼열 소장, 박종우 활동가, 결혼이주여성인 안나, 의정부 엑소더스 이인화 간사가 동행했다. <기자 주>

UN국제이주세계위원회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3%인, 2억명 가량의 이주민이 존재한다. 매년 200만에서 300만 명이 이주노동에 합류한다. 아시아에서 걸프만 지역만 놓고 보면, 전체 3300만 명 중 1100만 명이 이주노동자로, 세 명 중 한 명은 이주노동자인 셈이다.

인도네시아는 하루 3000명이 해외이주노동을 떠나고, 자국민 해외 취업 관리를 목적으로 설립된 필리핀 POEA(해외취업청)에는, 일평균 3000명에서 5000명에 이르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이 해외 취업을 위한 접수를 한다고 한다. 08년말 기준, 연인원 120만 명이 넘는다. 한국의 경우, 현재 117만 명의 체류 외국인 중 저임금비숙련 직종에서 70만에 이르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세계 이주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시아가 차지하는 인구 비중, 경제력 등과 궤를 같이 한다. 아시아는 과거 주요 인력 수출 지역이었으나, 이제 수출과 수입이 동시에 활발히 이뤄지는 지역이 되었다.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쿠웨이트 등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력수입국의 위치에 선 지 오래되었고, 중국, 말레이시아, 홍콩, 태국, 여러 중동 산유국은 인력 수출과 수입이 병행되는 나라들이며,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주요 인력 수출국이다.

그 중 '필리피노 쿼터스'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필리핀은 전 세계에 해외이주노동자를 파견하고 있다. 한 번 해외이주노동을 경험한 이들은, 또 다시 이주노동을 떠나는 경향이 있는다. 이는 해외에서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한다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반면, 가족간의 장기적인 이별로 인한 가족 해체 등의 부정적인 문제가 불거진다. 그런 면에서 이주의 악순환으로 인한 가족 해체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움이 원망으로- 이주의 악순환

위 그림은 이주노동을 떠나는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우울함 등이 묻어난다.
▲ 이주노동을 떠나는 여인 위 그림은 이주노동을 떠나는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우울함 등이 묻어난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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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일하고 퇴직금을 700만 원 넘게 받았다고요? 월급이 230만원을 훨씬 넘었겠네요?"
"근무 시간이 정말 길었어요. 하루 12시간 기본이었고, 삼년간 한 달 평균 3~4회 철야가 이어졌는데, 철야가 있을 때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일해야 했습니다. 일요일, 휴일 특근은 외국 사람이 다 했어요. 70명이 넘는 필리핀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들 그렇게 일했어요. 월급은 많았지만 몸이 많이 힘들었어요."
"정말 죽도록 일한 셈이네요."
"일하는 기계였죠. 하하하."

2005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자동차 에어컨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는 레이놀은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 서른 살 가장이다. 기계처럼 일했다는 레이놀에게 그렇게 일하고 병나지 않았는지를 묻자, 오히려 그때가 건강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는 아주 규칙적인 생활이었어요.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식사하고, 일하고, 자고. 지금은 일이 있을 때만 하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살지 못해요. 이러다간 병날 것 같아요."
"해외 이주노동을 떠나지 못해 병나는 건 아니고요?"
"제가 사는 곳은 시골이에요. 저 같은 사람들이 일할 곳이 없어요."

3년간의 해외 이주노동 기간 동안 기계처럼 일만 했었다는 레이놀은 사실 처음 이주노동을 떠날 때, 마음고생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아들이 여섯 살, 딸이 일곱 달이었었는데, 고국을 떠난 후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린 자식들이 떠오를 때마다 레이놀은 '삼년이다. 삼년만 죽어라고 일하고,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자'며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고 했다. 덕택에 3년이 지난 후 시골에 번듯하게 집을 지었고, 트라이스클이라고 불리는 필리핀 교통수단을 사서 큰 돈벌이는 되지 않아도 그나마 영업을 할 수 있었다.

레이놀이 시골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는 트라이스클은 필리핀 도,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오토바이에 승객을 태울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이다.
▲ 트라이스클 레이놀이 시골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는 트라이스클은 필리핀 도,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오토바이에 승객을 태울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이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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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레이놀의 어머니는 그리스에서 20년째 일하고 있다. 레이놀이 열 살 때 어머니가 그리스로 출국했는데, 15세 때 한 번 만나고 그 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레이놀은 그런 엄마가 늘 그리웠다고 했다. 또한 엄마가 돈만 좋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가 해외에서 어떤 고생을 하는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를 이해할 만한데도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원망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그는 귀국하기 전, 회사와 재계약을 해서 재입국비자를 받았었다. 3년만 더 일하면, 가까운 도시에 가서 조그만 가게를 차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가족과 함께 꿀맛 같은 두 달간의 휴가를 보내고, 다시 출국하려던 그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출국예정사실확인서를 갖고 있던 그의 비자가 취소됐다는 것이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비자가 취소됐다는 말을 듣고 회사에 전화를 하자, 회사에서는 고용을 희망하지만, 에이전시(브로커)가 안 된다고 했다는 말만 하고 끊어 버렸다.

"회사가 아주 좋았다. 브로커 ***가 나쁜 사람이었다. 그는 영어를 아주 잘했는데, 그가 비자 발급을 약속해 놓고 취소시켜 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다"고 말한 레이놀은 원망이 아주 큰 듯 브로커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놀이 말한 브로커는 외국인력 담당 전문 인력이 없는 회사로부터 외국인 고용허가와 관련한 업무를 위임받아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수수료가 적은 재계약 대신 신규 인력을 도입하는 식으로 농간을 부린 것이었다.

그렇게 출국이 무산된 레이놀은 일년간 준비를 거쳐 다시 출국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당신도 이주노동을 떠났고, 또 다시 떠나려고 계획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That's our life, We need more money.(그게 우리 인생이죠, 우리는 돈이 더 필요해요)"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레이놀의 자식들 또한 레이놀과 같은 경험을 할 지 모른다. 이주의 악순환인 셈이다.


태그:#해외이주노동, #필리핀, #가족 해체, #이주의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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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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