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낙안읍성'을 둘러보면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교과서로 치자면 필수항목이 없는 셈이다. 일반 민속촌이 아닌 사적지(제 302호)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안타깝다. 낙안읍성의 필수항목, '낙안군', '김빈길장군', '이순신장군과 낙안군수군'은 왜 장롱 속에 묻혀 있을까?

 

하나, 낙안읍성이 나무라면 '낙안군'은 산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낙안군의 성곽이다. 낙안군은 전라도의 순천부와 보성군 사이에 존재하던 행정단위로 그 치소가 낙안읍성이다. 때문에 "낙안읍성에 잘 오셨습니다"가 아닌 "낙안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시작해야 낙안읍성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면 산을 먼저 보고 나무를 보는 것이 이치지, 나무를 보고 산을 유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낙안군은 현존하는가? 아니다, 100여 년 전에 사라진 고을이다. 1908년,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하면서 현재의 보성군 벌교에 전진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낙안군을 해체시키고 강제로 지역민을 인근 지역 세 곳에 분산수용 시켜 버렸다. 한마디로 비운의 고을인 셈이다.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 낙안면, 별량면 일부 그리고 보성군 벌교읍과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가 당시 낙안군 지역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단지와 같은 지형을 가지고 있었고 넓은 평야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로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와 해안지방의 성격이 강했다.

 

현재의 순천시와도 다르고 현재의 보성군이나 고흥군과도 전혀 다른 독립적인 행정단위였던 낙안군, 그 치소였던 낙안읍성이 지금은 왜 순천시 낙안면의 그것으로 변해 그 시절의 씨줄과 날줄인 보성이야기며 고흥이야기는 장롱 속에 묻힌 이야기가 되고 말았을까?

 

바로 알자! 역사적 사실을 오늘에 맞춰 해석할 수는 없다. 행정구역이 달라졌다고 순천시 낙안면 얘기는 대문짝만하게 걸어놓고 당시 같은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행정구역이라고 벌교나 동강, 대서의 이야기를 깨알만하게 구석진 곳에 놓아두거나 취급하지 않는 것은 낙안읍성을 바로 알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둘, 임경업장군이 산이라면 김빈길장군은 큰산

 

낙안읍성을 얘기하는데 임경업장군은 빼놓지 않는다. 더구나 낙안읍성 중앙부에는 임경업장군을 칭송하는 비각까지 세워져있다. 자칫, 임경업장군이 이곳의 시조이거나 낙안읍성을 만든 사람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낙안읍성은 낙안군 옥산부근에서 태어난 지역민, '김빈길'장군에 의해 1397년 최초로 토성으로 세워졌다. 이는 임경업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한 것보다 200여 년 앞선 일이며 낙안읍성하면 김빈길이라는 등식이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낙안읍성 행사엔 늘 임경업장군이다.

 

그럼 김빈길 장군은 어디에 있을까? 낙안읍성밖 낙안향교내의 임경업장군 사당인 충민사에서 더부살이로 영정이 걸려있다. 그가 태어난 온야마을(옥산)에도, 망해당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이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장소인 옥산에도 그를 기리는 사당 하나 없다.

 

김빈길 장군은 왜란 당시, 낙안읍성을 쌓고 왜구에 맞선 인물이다. 다른 지역이 장수나 관졸이나 주민이나 모두가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다는 점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낙안읍성을 쌓고 왜구에 맞서자고 외쳤기에 이후, 이 지역은 왜구의 철저한 보복으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바로알자! 역사적 유물이나 사건, 장소 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최초로 시작했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다. 설령 낙안읍성처럼 그것으로 인해 피해가 컸다 해도 뜻이 의롭고 바르기에 기려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말년에 일가친척 모두를 데리고 고향을 뜰 수밖에 없었던 김빈길 장군. 지금 그를 기억하는이가 없는 현실. 곰곰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셋, 이순신 장군의 흔적과 낙안군 수군의 활약은 독보적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 군사를 모으고 군량미를 거둔 대표적인 곳 중에 하나가 바로 낙안군이다. 왜란 중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인물들이 낙안군 장수와 수군들이다. 울릉도를 개척한 전라도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바로 낙안군 사람들이다. 낙안읍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들을 알고 떠날까?

 

이순신 장군이 이곳 지형을 살피기 위해 올랐다는 오봉산의 장군바위,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 객사에 3일간 머물면서 즐겼다는 음식 팔진미, 전쟁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직접 심었다는 객사 뒤 팽나무, 모두가 이순신 장군과 관련 있다.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에 가면 전방삭 장군의 사당인 충효사가 있다. 전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운 낙안군 장수다. 또한 이 지역은 용맹스런 낙안군들의 훈련지이기도 하다. 또한, 보성군 벌교읍 진석마을을 선소라 부르는데 전쟁을 준비하는 배가 정박했었고 무기창도 있었고 전한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앞두고 낙안군 낙안읍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또한, 군량미를 모으고 군사를 동원했는데 낙안군 장수들과 수군들은 가장 용맹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갯가 사람들로, 현 보성군과 고흥군 사람들이었다.

 

바로 알자! 낙안군은 해안가 고을이다. 그것을 지탱한 것은 수군이며 주로 갯가마을이던 현재의 보성군 벌교와 고흥군 동강, 대서 주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낙안읍성 장롱 속에 묻혀있다. 더불어 이순신 장군도 묻히고 말았다. 이런 점은 전남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보성군 벌교읍 장좌리에서 열렸지만 현 순천시 낙안면 사람들이 했다는 이유로 90여 년간 보성군에서는 행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오버랩 된다.

 

낙안읍성은 낙안군의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낙안읍성은 당시 낙안군의 치소로 현 순천시 외서면, 낙안면, 보성군 벌교읍,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등을 총괄하던 곳이다. 당연히 그 시대의 기록들을 가감 없이 간직해야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서로 행정구역이 달라졌다고 특정 지역의 인물과 사실 등을 축소하거나 등한시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행위는 역사를 바로 알리는 사적지로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으며 올바른 자세도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낙안읍성, #이순신, #전방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