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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3일, 지하철 신길역 근처에 위치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사무실을 찾는 발걸음은 사실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대표적 고령화 및 사양 산업인 농업과 '2030에게 희망을 묻다'라는 인터뷰의 취지는 흡사 물과 기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게다가 별로 길지 않은 필자의 30여 년 삶에서 이 나라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산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난 것 같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고, 무너지는 것을 슬퍼할 이도 없을 것 같은 농업에 대한 얘기를 하자니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2030과 농업, 어째 어색한데...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실 앞에 쌓인 쌀가마니와 현수막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실 앞에 쌓인 쌀가마니와 현수막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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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농민회 사무실 앞에는 시쳇말로 닭장차가 보이는 것 아닌가. 엄청나게 추운 날씨에 전경들 몇몇이 방패를 들고 주변에 서 있었다. 오호라. 저것 때문이구나. 사무실 건물 앞에는 겹겹이 쌓아놓은 쌀가마니들이 농민들의 꽉 막힌 가슴인양 무뚝뚝하게 놓여있다. 그 앞에는 '남쪽에는 쌀값안정, 북쪽에는 식량해결, 정부는 대북쌀지원 재개하라!'고 인쇄된 현수막이 덩그러니 달려있다. 어휴. 무거운 발걸음 곱하기 2가 되어 버렸다.

"결국 농업엔 희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당히 해맑은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내뱉는 이 사람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국장을 맡고 있는 30대 초반의 곽길자씨. 남자화장실에서 여자 만난 느낌이랄까? 농민회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 제 페이스를 찾는 데는 대략 3초 정도 걸린 것 같다.

"농업은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공상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알약 하나 먹으면 배 안 고픈 사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농업은 필수이고 기본입니다. 석유가 없어서 차가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이 그럭저럭 살 수는 있지만 먹을 것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농업이 없으면 인류는 모두 굶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산품을 수출해서 번 돈으로 식량을 수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꼭 이 대한민국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의 농업 정책은 사실상 '농업포기'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세계화와 선진화를 외치며 농업을 포기하고 있는 정부에게 곽길자씨는 이렇게 일갈한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입으로만 외치지 말고 제발 농업에도 적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 같은 소위 선진국들은 농업에서 엄청난 보호무역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농업 보조금도 엄청나게 주고 있고요. 특히 미국은 작년에 농업 관련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보호무역이 더 강화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선진화를 외치면서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의 농업정책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한때 세계최대 쌀 수출국이었는데 농업을 포기한 10년 사이에 모든 기반이 다 무너졌습니다. 소말리아도 예전에는 식량을 자급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농업을 포기한 지금은 기아로 허덕이고 있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이 농업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부는 왜 선진국 따라하자고 하면서 후진국 따라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글로벌 스탠더드, 농업에는 왜 적용 안 하나?

전국농민회총연맹 곽길자 정책국장
 전국농민회총연맹 곽길자 정책국장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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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경상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한 곽길자씨는 대구 출신의 도시 소녀였다. 농촌을 단순히 공동체적 낭만과 유유자적하는 삶의 환상으로만 느꼈던 도시 출신 곽길자씨. 1학년 때부터 매년 빠지지 않고 농활에 참여한 곽씨는 해가 갈수록 무너져 내리는 농촌을 매년 몸으로 경험했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7년에는 농활 가면 젊은 사람도 좀 있었습니다. 분반활동하면 아동반이나 청장년반이 나름 잘 됐는데요. 지금은 전혀 안 됩니다.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남아있는 분들은 노인밖에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직접 목격해서일까. 총여학생회 회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은 페미니스트 곽씨는 농민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2002년에 지역 농민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 농민운동을 시작할 때는 제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과의 충돌이 많았습니다. 농민회가 많이 남성적이잖아요. 그래서 '여성성'을 버리기 위해서 노력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총여학생회장을 했는데, 그 때의 기준으로 보면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였어요. 싸움닭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벽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고민 끝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여자의 심리학> 표지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여자의 심리학> 표지
ⓒ 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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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어려운 시기, 곽길자씨에게 도움을 준 한 권의 책이 있으니 배르벨 바르데츠키가 쓴 '여자의 심리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성성'을 극복한 모습이 내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보고 남성적이라고 많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여자의 심리학>을 읽으면서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자기애(自己愛)도 강하고, 그래서인지 자기방어기제도 강했는데요. 이 책은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여자의 심리학'을 많이 권합니다."

잠깐 페미니즘 얘기로 외도를 했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들려주는 곽길자씨의 얘기는 충격적이다. 쌀을 제외하고는 식량 자급률이 3%란다. 그나마 쌀이 98% 자급이기 때문에 식량 자급률이 27%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해외 농지 개발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사업에 기업이 농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것을 권장하고 있단다.

"해외 농지 개발 차원에서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에 진출을 시도했는데요. 벨기에 절반 크기에 해당하는 농지를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폭동이 일어났어요. 국민들이 자기 나라 땅을 외국에 팔아먹는 데에 분노한 것입니다. 결국 무산됐죠. 무슨 식민지를 경영하려는 느낌이 나잖아요.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해외 농지 개발을 했다고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2008년의 전 세계 식량 위기 때 많은 나라들이 자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수출을 금지했지요. 농업은 돈벌이의 대상이 아닙니다. 농업은 국민의 기본 권리입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천벌 받습니다."

누군가 농사를 지어야 한다, 나는 말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농사를 지어야 한다. 물론 그 누군가가 나는 아닐 거라고 다들 생각하는 것 같다.

"공기가 풍부하게 있으니까 사람들은 공기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농업도 비슷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좀 갑갑하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안되면 다른 나라에서 싸게 수입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곽길자씨가 생각하는 농업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많은 나라들이 중요한 사업에 대해서는 국유화하잖아요. 저는 궁극적으로 농업도 국유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자는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먹고 사는 것은 그 무슨 주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농업은 이윤추구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국유화가 최선의 방책입니다.

금융위기가 오면 공적자금을 몇 십조씩 때려 박는데 농업을 국가가 책임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돈이 들지 않아요. 농민들이 이미 기본적으로 생산기반을 가지고 있고요. 오히려 지금 농업 관련 유통업체나 기업들에게 주는 보조금을 정부가 직접 관리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운영이 가능합니다."

농업을 국가가 책임지게 되면 젊은 사람들도 농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고용창출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곽씨의 얘기다. 그리고 농산물의 유통도 국가가 관리를 하게 되면 가격 폭락이나 폭등과 같은 나쁜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민물가의 안정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쿠바는 유기농의 선진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쿠바가 전국적으로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국민투표였습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투표를 통해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죠. 우리는 친환경농업도 생산자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 버립니다."

먹고 사는 것은 그 무슨 주의를 넘어서는 것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린 코펜하겐에서 선전활동 중인 곽길자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린 코펜하겐에서 선전활동 중인 곽길자씨
ⓒ 곽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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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씨는 국민들이 단순히 소비자로서만 농업문제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 최근에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높은데, 제3세계 농민에게는 정당한 값을 줘야 한다면서 우리나라 농산물은 무조건 싼 것이 좋다고만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농민의 어려움은 고민하지 않으면서 제3세계 농민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은 왠지 선후가 바뀐 느낌이다.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 가운데 귀농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도 있고 유유자적(?)하겠다는 사람도 있고요, 목적은 각자 다양한데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귀농의 추세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도시의 삶이 갑갑하니까요. 인천에서는 도시농업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도시농업을 해본 사람들은 우리 농산물을 구입할 수밖에 없답니다. 얼마나 농사가 힘든지 직접 알게 되니까요. 자신의 작은 텃밭 하나 가꾸는 것도 어렵거든요. 생명의 경이로움을 알게 되고,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움직임이에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 '미국은 최대 농업 국가'

인터뷰를 마치고 전농 사무실을 나섰다. 들어올 때 보았던 쌀가마 더미와 현수막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명박 정부 이후 쌀 52만 톤이 북쪽에 지원을 못해서 그대로 남아있단다. 한해 쌀 수확량이 대략 450만 톤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다. 안 그래도 쌀값이 폭락해서 농민들이 좌절하고 있는데, 대북지원물량이 올해 시장에 방출된다면 농민들은 완전 끝장이라고 한다. 남쪽의 농민에게도 좋고, 북쪽의 동포들에게도 좋은 일이 이명박 정부에게만은 싫은가보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농업 국가이다. 그러면 미국은 후진국이라서 그런가? 세계 최고의 선진국 미국이 세계 최대의 농업 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농업 보호무역과 농업 보조금 국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낯선 까닭은 무엇일까? 정부가 농업을 포기하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덧붙이는 글 | 주변 분들중에 단순히 취업준비와 스펙쌓기를 넘어서 도전적인 삶으로 희망을 일구어나가는 20대 30대의 청년이 있다면 이메일 reltih@nate.com 로 추천해주세요. 많은 분들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태그:#곽길자, #전국농민회총연맹, #농업, #대북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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