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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평생 시험의 연속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곧 진리처럼 들린다.

더군다나 요즘은 경쟁의 시대에 살다보니 세상에 태어나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에게 학습시키다보니 예전보다 훨씬 일찍 시험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아이들이 가엾기까지 하다.

그나마 도시는 모르겠지만 시골에서 자란 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학업에서는 자유로웠다. 특히, 요즘 4~5세면 들어가는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학업도 늦어 어린 시절 학업의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다니고 나서 2년 후에나 병설유치원이 학교에 생겨서 그나마 내 동생들은 유치원이라는 곳을 경험했다. 지금처럼 학교급식이라는 걸 상상도 못하고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찍 학업을 시작한다는 부러움보다 점심 끼니때마다 유치원에서 간식으로 먹는 걸 보고 부러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어머니 손을 잡고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학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4개 마을 친구들과 일면식을 갖고 친해지면서 학업에 대한 부담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어서 학교 다니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즐거움도 잠시 학교는 배움의 전당이기에 학업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ㄱㄴㄷㄹ' 한글이었다.

당시에는 학업에 관심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한글을 배우고 들어왔지만, 생활환경이 농촌인지라 부모가 농사일로 바쁘고 아이들도 어린 시절부터 같이 농사일을 도우면서 생활했던 지라 한글을 모르고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만큼 시골학교는 도시에 비해 학생 수도 많지 않고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학업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받아쓰기 공책 사와. 낼 시험볼 테니까"

학교에 입학하고 'ㄱㄴㄷㄹ' 한글에 대한 기본을 떼고 단어에 대한 학습을 받고 있을 무렵 담임선생님의 입에서 '숙제'라는 게 주어진다. 학교 끝나고 하교하면 집안 농사일을 도와주고 일이 끝나면 해 떨어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놀기만 했던 아이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단어를 열 번씩 써서 오고 다음날 학교에 오면 담임선생님한테 숙제검사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숙제검사를 해서 숙제를 해 오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어떤 처벌이 기다리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첫 숙제가 주어지고 다음날 선생님의 엄격한 숙제검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숙제를 해 오지 않은 아이들이 생기고, 선생님은 즉시 교실 뒤로 내 보낸다.

숙제검사가 끝난 뒤 선생님은 가늘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회초리 하나를 들고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의 엉덩이를 회초리로 엄하게 다스렸다. 요즘은 아이들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 돼 버렸지만, 그 당시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처럼 선생님의 말은 곧 법이요, 선생님이 때리는 매는 '사랑의 매'였기에 누구하나 반항(?)하지 못하고 매를 달게 받았다.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응당의 댓가를 치르게 한 선생님의 입에서 또 다시 청천벽력같은 말이 나왔다.

"내일 받아쓰기 시험 볼 테니까 받아쓰기 공책 사와. 60점 밑에는 또 매 맞을 거니까 오늘 집에 가서 받아쓰기 연습해 와"

드디어 태어나서 첫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난 뒤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를 졸라 받아쓰기 연습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단어를 부르면 난 받아쓰는 식으로 밤이 늦도록 연습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매 맞는 것을 보니 어린 마음에 두렵기도 했고, 점수가 낮게 나오기라도 하면 동무들에게 창피할 것 같아 열심히 연습했다.

다음날, 받아쓰기 시험이 시작되고 첫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 인생에서 첫 시험을 무사히, 그것도 만점으로 통과한 것이었다.

100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는 공책을 들고 책가방에 넣지도 않은 채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보였다.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지금도 그 때를 잊을 수가 없다.

'햅쌀'이 뭐지? 뜻도 모르는데

그 이후로도 받아쓰기 시험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의 받아쓰기 공책에는 100점이라는 숫자 대신 90점, 80점이 쓰여 지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점수가 떨어진 원인을 보니 틀린 글자만 계속해서 틀리고 있었다. 그것도 당시에는 뜻조차도 모르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바로 '햅쌀', 그리고 '나뭇잎'. '햅'자와 '잎'자가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햅'자 아래 받침에는 'ㅂ'대신 'ㅅ'이나 'ㅍ'을 썼던 것 같고, '잎'자 아래 받침에는 햅쌀과 헛갈렸는지 'ㅍ'대신 'ㅂ'을 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소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때는 왜 그리 어렵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이후에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비로소 '햅쌀'과 '나뭇잎'을 헛갈리지 않고 올바로 쓸 수 있게 됐다.

물론, 시행착오가 끝나기 전까지 내 받아쓰기 공책에는 100점이라는 점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받아쓰기 끝나니 이번엔 구구단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에 올라가자 이번에는 받아쓰기 대신 구구단이라는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2단, 3단, 4단 단을 나누어 하루하루 외우기 시작하더니 9단까지 거치자 선생님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받아쓰기하던 1학년 때는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넘어갔는데 구구단 시험에서 탈락하면 '나머지 공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당시 책받침 뒤에는 모두 있었던 구구단을 외기 위해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나 항상 책받침을 손에 들고 다니며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머지공부까지 하면서 구구단을 외웠지만 결국 글도 읽지 못하고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도 있었다.

'받아쓰기', '구구단' 등 어린아이들에게 암기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되돌아보면 친구들과의 추억도 많이 기억이 나지만 이처럼 암기를 하며 보낸 시간이 기억나는 걸 보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다.

'국민교육헌장' 못 외워 나머지 공부도

저학년을 보내고 고학년에 올라가면 억지로 암기해야 하는 시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나머지 공부'까지 하면서 암기했던 시험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바로 '국민교육헌장'이다. 뜻은 둘째 치고 390여자에 이르는 당시에는 방대한 양의 내용을 강제로 외우고, 선생님 앞에서 암기 시험을 치렀던 기억은 평생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전체 내용을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2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국민교육헌장'하면 곧바로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는 문구까지는 술술 나올 정도이니 당시 얼마나 암기를 강요했는지 알 수 있다.

'산넘어 산'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반공교육 등 사상교육이 강요되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받아쓰기에서 구구단, 국민교육헌장에 이르기까지 암기시험을 강요받았던 생각을 하면 씁쓸해지기도 한다.

특히, 줄곧 100점이라는 점수가 받아쓰기 공책에 매겨지다가 '햅쌀', '나뭇잎'으로 인해 한동안 100점을 맞을 수 없었던 기억을 되돌아보면 실소가 나오기도 하지만, '왜 자꾸 틀린 단어만 틀리지?'하며 100점을 맞지 못하던 자신을 자책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엾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살아가면서 내가 누군가로부터 항상 시험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할 일이 없지만, 인생사 자체가 시험의 연속인 만큼 시험을 즐기면서 사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응모글



태그:#받아쓰기, #구구단, #국민교육헌장,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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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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