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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사랑했던 C.S 남해의 푸른 섬이 펼 펴진 이곳 고향 앞바다에서 영원한 나래를 펼치다." - 2007월 10월 다이빙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후배의 추모비문 중에서

준비없는 이별, 불현듯 찾아 오는 죽음!

죽음! 죽음이 슬픈 이유가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탓이라 했던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은 지병보다 슬픔의 정도가 더 진한 법이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죽음을 내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있는 방에 혼자 들어가서 죽음을 직접 확인했다. 날 그렇게 사랑해 주셨던 큰아버지의 죽음이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군복무시절 해수욕장으로 피서 온 일행 3명이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어 다음날 해변에서 시신을 찾아낸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그가 다리에 새긴 '사요나라'라는 문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의미는 일본어로 헤어질 때의 인사말로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뜻인데 그 문신이 죽음과 딱 맞아 떨어졌다. 허구 많은 말 중에서 왜 하필 그런 문구를 새겼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필자가 겪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이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후배의 죽음이 내 마음 한켠을 차지한다. 내가 다이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다. 고향이 섬인 관계로 바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바다는 쳐다보기조차도 싫었던 내가 수중레저인 다이빙을 할 것이라고는 꿈도 못 꾸었다. 당시 회사 선배가 다이빙을 다녀와 하도 대물 얘기를 늘어놔서 우연히 관심을 가졌고 후배에게 다이빙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 만약 내가 같이 하자는 말만 안했어도 다이빙 사고로 후배가 목숨을 잃는 일은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은 지금도 여전하다.

 2005년 5월 오동도 앞바다에서 수중정화 활동중 스쿠버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우에서 7번째가 하용식 회장이고 5번째가 총무 C.S의 모습이다.
2005년 5월 오동도 앞바다에서 수중정화 활동중 스쿠버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우에서 7번째가 하용식 회장이고 5번째가 총무 C.S의 모습이다. ⓒ 심명남

백중사리 살기 뻗힌 바닷물살 후배를 삼키다

3년 전 10월쯤으로 후배가 사고가 난 당일의 이야기다. 지인들과 모처럼 바다로 낚시를 갔다. 여수에서 보트를 타고 남면 앞바다를 지나 서고지로 향했다. 내게 보트가 있는 관계로 여수 바닷길은 안 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쫙 꿰고 있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닷길이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바다는 잔잔한데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섬과 섬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마치 블랙홀처럼 빙빙 도는 모습은 사람이 빠지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물때를 백중사리라고 했다. 백중(百中)은 음력으로 7월 보름을 뜻하고 사리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최대가 되는 시기로 일년 중 조석차가 가장 큰 날이다. 특히 어촌에서 백중사리가 유명한 이유는 연중 조석차가 가장 커서 해안 저지대가 침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날 만큼은 어장과 바다작업을 피한다.

이날 우리는 이런 무서운 바다를 오가며 무사히 낚시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지인들과 잡은 고기를 썰어 즐겁게 식사를 끝냈다. 그런데 자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동료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후배 C.S(고인의 이니셜을 씀)가 남면에서 다이빙중 사고가 났으니 빨리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순간 먹었던 술이 확 깨나 싶더니 이내 불안한 맘이 앞섰다. 왜냐면 오전에 본 살기 돋친 바닷물살이 뇌리에 너무 선명해 예감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처음으로 다이빙 동호회를 만들었던 우리는 순천 잠수교육센타를 오가며 다이빙 라이센스를 3개나 취득했다. 오픈워터를 비롯하여 응급구조와 나이트록스까지 많은 돈을 투자해 교육과 실질적인 훈련을 통해 취득한 자격증이었다.

 일명 바다물개로 불리우던 C.S가 물속에 들어가기전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일명 바다물개로 불리우던 C.S가 물속에 들어가기전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 심명남

나처럼 섬이 고향인 C.S는 남면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명 바다물개로 불릴 만큼 수영과 다이빙에서도 독보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사내 다이빙 동호회를 하는 날이면 멍게와 해삼은 물론 자연산 횟감은 30여 명이 충분히 먹을 만큼 푸짐했다. 다이빙 동호회가 출조하는 날이면 C.S는 물량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런 C.S가 사고로 병원에 실려 왔다는 소식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연락을 받고 병원에 와보니 이미 손도 쓰지 못한 채 영안실로 갔고 그의 가족들은 이 믿기지 않은 현실에 울부짖고 있었다. 후배의 처는 실신까지 했다.

이날 후배가 사고를 당한 사연은 이랬다. 공무원인 처와 교대근무를 하는 후배는 서로 근무가 잘 맞지 않아 추석 전 미리 아버님의 산소를 다녀오기로 했단다. 산소에 가고 오랜만에 고향집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그들에게 밤에 다이빙을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고향에 도착한 후배네는 아버님 산소에 들러 인사를 드렸다. 그날 아버지에게 올린 인사가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까? 후배는 산소에 갔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등에 업고 집까지 가장 행복한 얘기를 나누며 먼 거리를 걸어 왔다고 한다. 마치 신들의 시샘과 질투라도 받듯이……. 또한 고향에 내려가면 친척들이 식사를 초대해도 잘 다니지 않던 후배는 그날따라 친척집에 가서 저녁식사도 두 그릇씩이나 걸지게 먹었단다.

 바닷속 깊은곳에서 다이버가 숨을 쉰후 공기를 내뱉고 있다.
바닷속 깊은곳에서 다이버가 숨을 쉰후 공기를 내뱉고 있다. ⓒ 심명남

사랑하는 아내 위해 전복을...

이렇게 고향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날이 저물자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후배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 아내를 몸보신 시킨다고 해삼과 전복을 따기 위해 마을 앞 방파제로 다이빙을 떠난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방파제 앞 차에서 아내를 기다리게 해놓고 밖에는 그물이 쳐져 있으니 안쪽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다이빙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바닷속에 들어간 지 30분쯤 지나서 비명을 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그물이 쳐진 바깥쪽으로 나갔던 것이다. 또한 다이빙을 하다 그물에 장비가 걸렸는지 당황한 후배는 죽을 힘을 다해 올라왔고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고 다시 가라 않기를 반복했다. 놀란 그의 처는 마을 사람들에게 즉시 구조를 요청했고 나이든 마을 어른들이 배를 타고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기력을 잃은 뒤였고 해경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다이빙을 함께 다녔던 동료 다이버들은 후배를 잃은 공허함과 엄청난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떠나기 전 얼굴이라도 한 번 보는 것이 후배에 대한 마지막 예의일 것 같아 영안실에서 얼굴을 확인했다.

삶과 죽음은 무엇이던가?

그물에 걸려 사투를 벌이다 죽음을 맞이했을 후배의 모습은 우려와는 달리 너무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삶과 죽음이 눈을 뜨고 있는 것과 눈을 감고 있는 것의 차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후배의 영면을 빌어 주었다. 바다에서 서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 모금의 공기를 나눠 목숨을 지켜주자고 다짐했던 다이버들이 아니었던가? 너무도 맘씨가 착한 후배의 죽음으로 나는 3일내내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았고 장례식 내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철들고 이렇게 슬퍼해 보기는 처음이었을 듯싶다.

이후 출상하는 날 회사측의 배려로 고인을 실은 영구차는 회사에 들러 노제를 치렀다. 그 동안 일했던 정든 일터에 들러 동료들과 마지막 이별을 고하기 위해서다. 추모사가 이어 지는 가운데 많은 동료들은 후배 C.S와 가졌던 추억들이 오버랩 되며 현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또한 후배의 부인은 고인이 쓰던 락카룸에서 고인의 유품을 가지고 나왔다. 그간 후배가 입고 일하던 작업복과 안전모 그리고 그 동안 용돈을 받아 모은 것으로 보이는 20여만 원의 구겨진 지폐들은 유족과 동료들의 마음을 더욱 울렸다. 이후 후배는 화장을 하였고 그의 육신은 한줌의 재를 남기고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후 후배의 죽음으로 사내 다이빙 동호회는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비록 공식행사가 아닌 개인적으로 당한 사고이긴 하지만 회원들은 실의에 빠졌다. 이후 동호회에서는 다이빙 동호회를 해체했다. 또한 3개월이 지난 12월 중순쯤 함께 다이빙을 다녔던 회원들이 후배의 넋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후배가 발버둥 치다 떠난 그의 고향 앞바다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동료 다이버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었고 회사로부터 약간의 지원도 받아 추모비를 제작했다.

동료다이버! 수중속 명당에 추모비 세우다

12월이라 날씨가 쌀쌀하지만 드라이슈트를 입은 다이버들은 추모비를 배에다 싣고 마침내 현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육지에서 약 30미터가 떨어진 곳으로 수심은 6~7미터의 깊이였다. 추모비를 줄로 묶어 바닷속에 가라 앉히고 바닷속에 들어가서 태풍이 몰아쳐도 쓸려 떠내려가지 않게끔 좋은 포인트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가 자리한 곳은 수중여가 즐비해 있어 고기들도 많이 노는 명당자리였다. 추모비 설치 작업이 마무리 되고 동료들은 배에 올라타 육지로 향했다.

 바닷속에서 많은 고기들이 지나가는 사이에 다이버들이 뭔가를 찾고 있다.
바닷속에서 많은 고기들이 지나가는 사이에 다이버들이 뭔가를 찾고 있다. ⓒ 심명남

 다이빙중 다이버들이 수중에서 뭔가를 찾기위해 설명을 듣고 있다.
다이빙중 다이버들이 수중에서 뭔가를 찾기위해 설명을 듣고 있다. ⓒ 심명남

나는 그곳에서 뭍까지 다이빙을 하기로 맘먹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찍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설치된 추모비를 다시 보니 맘이 놓였다. 후배의 넋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얼마쯤 왔을까. 수심 2~3미터 지점에서 후배의 다이버 칼이 발견되었다. 또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수중랜턴도 주웠다. 순간 섬뜩한 생각도 들었다. 후배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그물과 사투를 벌이다 칼도 놓치고 랜턴도 놓쳐 결국 패닉상태에 빠져 죽음에 대한 공포속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고인의 마지막 유품을 주워다 함께 온 후배의 처에게 전해주니 그녀는 유품을 안고 또 한번 오열했다. 추모비를 통해 위로를 받은 후배의 아내는 준비해온 유품을 모두 다 태워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에 그가 사용하던 유품이 태워질 때 펑 소리를 내며 굉음과 함께 다시 그의 추모비가 세워진 바다 속으로 날아갔다. 마치 우리와 마지막 이별을 하는 후배의 영혼이 이승을 떠나가기라도 하듯이…….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직도 커다란 의문으로 남는다. 베테랑 급의 다이빙 실력을 가진 후배가 2~3m의 수심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과 그의 장비에 아직도 많은 양의 공기가 남아 있었던 점 등 그물에 걸렸는데 왜 장비를 벗어 버리고 탈출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등등. 분명 그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난제가 그의 운명이 교차되어 피치 못한 사정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을 것이라는 예단뿐이다.

서른넷의 짧은 생을 살다간 후배는 세상의 모든 짐을 털고 이승과 이별한지 이제 3년을 맞이했다. 그 동안 가졌던 후배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은 이제 잊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후배에게 나의 맘을 전하면서 진정으로 용서를 빌어 본다.

"C.S 미안하다. 너 때문에 맘 고생 많았는데 이제 내 기억 속에 너를 영원히 보낼게!"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



#다이버#죽음#삶과 죽음#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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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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