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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서의 나딤 모습
 쉼터에서의 나딤 모습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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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주노동자를 만나면서 늘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영어가 만국 공통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몇 가지 단어 혹은 표현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쉼터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대할 때 서툴든 유창하든 대개 영어로 다가가려 한다. 그러면 수줍음을 잘 타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고 움츠리게 마련이다. 그럴 때 서로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행동이다.

큰 여행용 가방 두 개를 들고 쉼터에 들어선 파키스탄인 나딤은 첫눈에도 숫기가 없어 보였고, 큰 눈만 말똥말똥하며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한국에 온 지 고작 나흘밖에 되지 않은 그는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사람이었다. 입국 후 국내적응 훈련을 마치고, 자신을 고용하기로 한 업체 사장을 만날 것을 기대했지만, 고용하기로 했던 회사 측에서 고용해지를 하면서 갑자기 갈 곳이 없어져 쉼터 신세를 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나딤을 위해 파키스탄어인 우르드어를 할 줄 아는 후배에게 전화로 통역을 부탁했다. 전화 통역을 통해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자, 나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없이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잠시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더니 재생용지로 만든 듯한 거친 종이로 만든 공책을 들이밀었다. 손으로 촘촘히 쓴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딤은 그 중 하나의 전화번호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화를 해 달라는 말이었다. 전화를 걸어주자, 그는 심각하게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 그는 다시 전화번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역시 전화를 걸자, 이번에는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로 몇 마디를 이어가더니 금방 전화를 끊었다.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한 이가 수다스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 그가 식사를 했는지 궁금해졌다. 별 생각 없이 영어로 식사했느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나딤은 예의 그 표정 그대로 눈만 말똥말똥하며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딤을 데려왔던 연수기관 사람으로부터 그가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 몰랐던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른손가락을 모아 입에 갖다 댔다가 떼기를 두세 번 반복하자, 그 역시 자신의 배를 몇 번 두드리며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그제야 뭔가 통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서로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국내적응교육이라고 받고, 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쉼터를 이용하게 된 그가 피곤할 것 같아, 그를 혼자 있게 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퇴근하기 앞서 나딤에게 잘 지내라고 인사를 하려고 그가 쉬고 있는 방을 두드렸다. 방바닥에 등을 대고 있던 그는 일어서더니,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우르드어였다.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명치를 가리키며 천천히 "워크, 피싱, 팩또리" 세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이었다.

말인즉, "제가 어업에서 일하게 됩니까? 제조업에서 일하게 됩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입국할 때와 국내적응 훈련 때 자신들이 어떤 분야에서 일하게 되는지 교육받게 마련인데, 어업 분야로 입국한 나딤으로서는 제조업체로 변경이 가능한지를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나딤에게 나는 알고 있는 대로 간단히 "피싱"이라고 답해줬다. 역시 나딤은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27일) 아침, 쉼터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딤의 얼굴엔 수염이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피부색이 검은 그의 얼굴이 더욱 검고 수척하게 보였다. 나딤은 하룻밤이었지만, 답답한 게 있었던지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북, 코리안, 우르드"라고 역시 두 번을 반복했다.

대충 짐작하기를 한국어와 우르드어로 된 책이나 사전이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사전이라도 찾아가면서 뭔가 전달하고 싶은데,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쉼터엔 그런 책이 없었다.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의 표정에서 실망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밥 먹었냐고.

그러자 그는 어제와 같은 식의 대답을 하며 살짝 웃음을 던졌다. 나딤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인도네시아인 샴토와 네팔인 나간이 옆에서 함께 웃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소통했을 것이다. 만국공통어인 몸짓 언어 중에서도 밥 먹었냐는 말은 으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태그:#우르드어,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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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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