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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에 뒤주가 몇 개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와 집안에서 숨바꼭질을 했는데 나는 뒤주 안에 몸을 숨겼다. 어머니는 눈치가 빠르셔서 내가 뒤주에 숨은 것을 아시고는 장난으로 경첩의 고리를 잠그셨다. 잠시 후 뒤주 안 공기가 탁해지고 숨이 가빠져서 밖으로 나오려는데 꽉 닫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려워서 엉엉 울기 시작했고 좁은 뒤주
안에서 손과 발로 벽을 차고 어머니를 불렀다. 뒤주가 소리를 먹은 탓인지 어머니는 한참 있다 내 비명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서 나를 꺼내셨다.

지금 생각하면 요즘 버전으로 완전 쌩쇼였다. 눈물 펑펑 쏟고 어머니를 탓했는데 유년기의 아련한 추억으로 삼기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시간이 지나 그때를 떠올리면 피식 웃을 만큼 성장을 했건만, 아직도 스멀스멀 떠오르는 잔상이 하나 있다.

 

뒤주가 꽉 닫히자 여리게 들어오던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며 암흑만이 남았을 때 느낀 공포감. 이전에도 빛이 하나 없는 옷장이나 공간에 들어간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밖으로 나와 다시 밝은 빛에 샤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포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는데 뒤주 안은 내 의지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세상과 단절되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어둠이 나를 감싸며 내 자신이 어둠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기묘하면서도 다시 겪고 싶지 않는 경험이었다.

 

나중에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들보다는 그 고통이 어땠을지 쉬이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이 멀어 장님이 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도 미약하게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일은 시력을 잃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보다는, 이전까지 익숙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고 낯설게 되는 현실이 아닐까.

 

어릴 적 뒤주에 갇혔던 기억을 떠올리다

 

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유년의 참혹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주제 사라마구도 나처럼 비슷한 해프닝이 있었을까. 그는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구조적이며 집단적 의식의 체험을 강조했다. 눈먼 사람들은 그들이 익숙했던 모든 것에서 배제됐다. 집과 자동차, 그리고 여러 연장들도 제대로 다룰 수 없고 문명이기들은 잘못하면 걷다 부딪히는 방해물이 되고 만다.

 

소유에 집착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과거에 한 사람이 가진 직업이나 신분은 중요치 않다. 그들도 눈이 멀자 남들과 똑같이 먹어야 되고 생리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면 예의를 차릴 수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은 따지고 보면 다 똑같다는 명제인데 부정부패 사건을 보고 '모두 똑같은 놈이야!' 라는 한국식 냉소주의로 보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사라마구는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의 본성과 계층을 가르고 소외시키는 근본적인 사회 구조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이 소설에는 고유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의사의 아내, 자동차를 훔친 사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같은 표현으로 등장인물들을 설명한다. 왜일까? 눈이 멀게 된 다음에는 정체성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으며 누구나 다 똑같은 존재라는 뜻인가. 나는 이것을 인간, 특히 현대사회의 인간 본질이 익명성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았다. 그것은 인터넷이나 가상공간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현실공간에서 인간이 외모나 신분, 직업 같은 가면을 벗고 익명의 존재로 전락(?)할 때 비로소 자신의 근원과 조우한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특히 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인간이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생겨나는 분열과 다툼을 보면 대개 계층이나 인종, 나이, 성별, 종교 같은 것들이다. 거대담론들이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지는 순간 이름이나 그 무엇도 삶과 생존에서 중요하지 않다. 원초적으로 음식과 위생, 옷, 집이 중요할 뿐이다. 말 그대로 의식주(衣食住)!

 

그런데 희한하다. 눈이 멀었음에도 눈먼 자들 사이에 다시 빼앗는 자와 뺏기는 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층이 생겨난다. 이건 인간 역사에 피할 수 없었던 지긋지긋한 레파토리였는데, 결코 인간이 이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나? 뻔한 코미디나 드라마를 보면 식상하다고 하면서 이런 저질 연속극이 몇천년간 되풀이되는 건 인간 본성으로 봐야 될까. 그렇다면 해결책은?

 

사라마구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류가 극한의 상황에 처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현실에서 아무리 돈이나 명예가 우습다고 설파한들 정작 그런 것들이 가치 없게 여겨지는 '구조적인 집단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공염불이다. 상상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바로 모두가 눈이 멀었을 때가 바로, 그토록 인류가 애지중지했던 것이 한낱 물체일 뿐임을 깨닫게 되겠지. 

 

그래도 인간은 먹고 자고 싸고 섹스를 해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최소한의 배려와 배분이 필요하다. 사라마구는 사랑과 이해로 이를 해결하고 극복해야 된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적인 설교로 비쳐 불편하긴 하다. 그러나 내 눈과 촉각을 반짝이게 만든 대목이 있었는데 의사 일행이 병원에서 깡패들을 무찌르고 익숙했던 거처를 벗어나 험난 곳으로 행군하는 장면이었다. 인간 본성을 신뢰할 수 없으니 언제 어디서나 억압하는 세력들은 먼저 제거해야 된다는 통쾌한 선동으로 오독(?)하련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풀어야지 신이라는 가상 존재에 의존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활철학 탓인지 마지막에 의사의 아내가 눈이 멀자 섬칫했다. 모든 사람이 겪었던 고통을 이제는 그녀 혼자서 짊어져야 된다는 결말. 예수의 구원 이야기와 겹쳐지지 않나. 그런데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됐을 때 눈먼 시기의 평등했던 관계가 다시 지속될지 의문이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 배우거나 학습능력이 있다면 진작에 인간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까. 인간이 '구조적인 집단 경험'을 하더라도 다시 원상복귀할 것 같다는 음산한 생각이 걷혀지지 않는다.

 

극도로 난해하지는 않지만 지하철에서 설렁설렁 읽을 책은 아니다. 예리한 감촉으로 고통스럽게 완독하기를 권하는 책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2002)


태그:#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책, #정영목, #구조적 집단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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