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진짜 기자인 줄 알아? 당신은 공무원이야! 당신 일이나 똑바로 해."2006년 2월 13일. 퇴근해서 집에 들어간 순간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아내는 평소와는 달리 단단히 화난 표정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저는 아무 대꾸를 하지 못하다 서재에 켜있는 컴퓨터를 보고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컴퓨터엔 <오마이뉴스> 초기 화면이 열려 있었고, 위쪽에는 '김용국 기자'라는 이름과 함께 제가 쓴 인터뷰가 오름기사로 '버젓이' 실려 있었습니다. 국선전담변호사로 의욕 넘치게 새 출발하는 이영미 변호사를 인터뷰한 기사,
"돈없는 피고인들의 입 될래요"였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야근한다"던 남편, 신촌 찻집에서 인터뷰?
그렇잖아도 제 글쓰기를 탐탁찮게 생각하던 아내는 그 기사를 남편이 썼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고, 인터뷰 날짜와 시간, 장소를 보고 또 한 번 경악했던 것입니다. 인터뷰를 한 시각은 평일 오후. 저는 분명 사무실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신촌의 찻집에서 여자 변호사를 만나고 있었으니….
사실 저는 그날 아내 몰래 휴가를 내고 인터뷰를 '감행'했습니다. 게다가 당일 오전 피곤한(듯한) 목소리로 아내에 전화를 걸어 "사무실에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밑밥'도 깔아놓았습니다. 출근도 하지 않고선 말입니다.
그 뒤부터 제 시민기자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한동안 취재 시간 제한과 컴퓨터 사용 제한 조치도 뒤따랐습니다. 이때부터 아내에게 <오마이뉴스>는 부부 사이의 믿음을 앗아간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 때문에 제가 욕을 먹은 건지, 저 때문에 <오마이뉴스>가 욕을 먹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다시 꿈틀댄 젊은 날 기자의 꿈
사실 제가 시민기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가족의 이야기를 제대로 써보고 싶어서였습니다. 2005년, 몇 년간 직장에서 복잡한 일을 맡았다가 정리하고 이제는 소원했던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글로써 진솔하게 가족 사랑을 털어놓고 싶었던 겁니다.
초기 기사는 당연히 '사는이야기'가 중심이었습니다. 첫 번째 기사랄 수 있는 둘째 아들 준서의 얘기,
"어이구 내 새끼" "아빠. 욕하지마!"는 포털 초기화면에 사진기사로 뜨면서 수많은 네티즌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며칠 후 컴퓨터 게임에 빠진 큰아들 준호의 사연을 담은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날린 30만원'은 첫톱을 장식했습니다. 아내도 이때까지는 호기심 반 관심 반으로 유심히 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의 관심사는 세상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가 되고 싶었던 꿈, 20대 젊은 나이에 품었으나 한동안 접고 살아왔던 그 꿈이 <오마이뉴스>라는 창을 통해 다시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법원 사건을 다루는 전문기자가 되고 싶었다문득 가장 이상적인 시민기자는 자기가 일하는 분야의 기사를 제대로 쓰는 기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업기자보다 더 나은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철저한 준비만 있다면 그야말로 전문기자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제가 근무하는 법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언론 보도는 많지만, 제대로, 깊이있게 다루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던 터라 제가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정법원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가정법원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언론에서 유사 성교행위를 처벌한 판결에 대해 선정적으로 다루는 것을 보고, 판결문을 분석하고 담당 판사를 인터뷰하여
'대딸방 무죄 … 법은 최소한의 도덕'(2005년 12월 1일)이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한 여성단체 소속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음지의 얘기를 양지로 꺼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저에겐 정말로 소중한 격려가 되었습니다.
2006년부터는 '판사, 법원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판사 인터뷰 기사를 실었습니다. 사법개혁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정진경 부장판사, 지천명에 평판사로 돌아온
임희동 판사, 친일재산 되찾기에 쐐기를 박은
이종광 판사,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판결로 유명한
이정렬 판사 등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기사가 '사는이야기'에서 '사회' 기사로 변해가자 아내의 관심은 점점 무관심과 냉소로 변해 갔습니다. 게다가 취재와 인터뷰로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기사쓰기로 밤새는 날이 늘어가자 아내의 불만도 덩달아 늘어만 갔습니다.
조직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 공무원의 본분?그러고 보니 저의 시민기자 활동을 싫어하는 사람은 법원에도 있습니다. 법원에 쓴소리를 하는 기사도 쓰기 때문입니다.
2006년 이른바 '법조비리 사건'들로 법원이 비판을 받고 있을 때
'잇따른 법조비리, 법원 내부는 부글부글'(7월 20일),
'조관행 구속... 법원만 상처받게 됐다'(8월 10일)라는 기사를 썼으니, 안에서 보면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지요.
또한 시군법원의 부적절한 관행을 지적한
"일부 시군법원 판사, 부적절한 처신"(2007년 10월 31일), 현직 대법관의 감사원장 수락을 비판한
'심판보다 말고 정권 구원투수로 뛰겠다니...'(2008년 6월 23일), 대법원의 조서작성 용역 추진 사실을 공개한 기사
"법원 증인조서를 외부 용역에 맡긴다고?"(2008년 11월 26일) 등도 높으신 분들은 껄끄럽게 느낄 겁니다. 어쩌면 저를 '요주의 인물'로 꼽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에게 "공무원이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따진다면 내부 비판이 늘어나야 조직이 살고 사회가 희망이 있다고 답변해주고 싶습니다. 특히나 인권의 최후보루라는 법원이 제 역할을 하려면 앞으로 쓴소리는 더 늘어나야 합니다. 조직의 지시에 순응하며 그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공무원의 본분이라면 저는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저를 <오마이뉴스> 기자로 인정하고, 응원해주는 법원 사람들도 많기에 저는 큰 힘을 얻습니다.
기사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시민기자 활동을 하면서 기사가 사람을 바꿀 수도,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두 분만 꼽아 본다면 앞서 소개한 이영미 변호사와 피우진 중령입니다.
먼저, 이 변호사는 3년 전 약속대로 국선 변호사로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변론하고 있답니다. 돈 없는 피고인들에겐 보배같은 존재입니다. 저와 만날 때마다 그는 "<오마이뉴스>에서 나를 너무 미화해 놓은 바람에 지금까지 '딴짓' 못하고 착한 변호사로 살고 있다"고 너스레를 놓았습니다.
2006년 12월 만난 피우진 중령은 시대에 뒤떨어진 군 인사법 때문에 강제전역되어 외로운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방암 전력=당연퇴직'이라는 법조항이 군복을 벗게 한 탓이었습니다. 피 중령은 여론의 힘과 행정소송을 통해 2008년 복직되었습니다. 저는 인터뷰 기사 제목을
"나는 날마다 군대로 돌아갈 꿈을 꾼다"로 달았는데, 피 중령의 꿈은 현실이 된 셈입니다.
저는 이제 겨우 100개 남짓한 기사를 썼을 뿐입니다. 많은 글을 쓰진 못하더라도 결코 허투루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게 저만의 고집이라면 고집입니다. 어떤 기사는 1주일이 넘게 공을 들여 쓴 글도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직업기자라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이게 다 시민기자의 장점이자 숙명 아닐까 싶습니다. 올해도 공무원이면서 시민기자, 아니 공무원 '시민'기자로서 저만의 독특한 기사를 써볼 계획입니다.
기자활동에 불만 많던 아내, 비판적 지지로 돌아서다 그나저나 요즘도 아내의 불만은 여전하냐고요? 글쎄요, 아내는 비판적 지지로 돌아선 것 같습니다. "지가 좋아서 하는 일을 어떻게 말리겠느냐"는 거지요.
가끔은 기사에 조언도 해주고, 가끔은 구박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도 예전처럼 아내를 속이고 인터뷰를 하는 식으로 무모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는 새벽, 아내가 슬그머니 서재문을 열어보더니 한 마디 합니다.
"또 기사 써? 그렇게 좋아? 아침에 빌빌대지 말고 조-온 말할 때 일찍 자라, 잉?"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