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멕시코 국립궁 안의 벽들은 그림으로 빼곡히 채워져있다
 멕시코 국립궁 안의 벽들은 그림으로 빼곡히 채워져있다
ⓒ http://events.nytimes.com

관련사진보기


너무나 거대하다. 그리고 쉽다. 돈을 내지 않고도, 언제든지 보고싶은 순간에 볼 수 있다. 굳이 미술관이라는 '엄숙한 곳'에 가지 않아도,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볼 수 있다.

현재 멕시코의 정부청사로 사용되는 국립궁(Palacio Nacional). 이곳의 계단을 오르내리다보면 칼 마르크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칼 마르크스는 산업 발달의 미래를 가리키며 꼭대기에 서있다. 그 아래 상징적으로 그려진 공장 내부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하수인이 음모를 꾸미고 매수하는 타락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미국경제의 중심지인 월 스트리트의 부정부패를 부각 시키면서 외국자본의 위험성과 국가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교회의 파국 역시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마르크스가 제안하는 비전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분기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의 반대편에서 마르크스가 약속한 밝은 미래의 입구에 도달하고 있다. 농민과 손을 굳게 맞잡고 말이다.

멕시코 혁명이 선택한 예술가, 디에고 리베라

이 그림은 1933년에 그려졌다. 당시 서양에서는 후기 인상주의를 거쳐서 20세기 초의 표현주의 사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도덕적이나 사회적으로 더 이상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나 교육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퇴폐 미술'로까지 분류되던 예술 사조였다. 즉 극도로 예술가 개인의 세계에 집착하면서, 필연적으로 대중들의 소외를 가져온 '그들끼리의 예술'이 판치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다르다. 일단 캔버스부터 벗어났다. 거대한 벽에, '무지랭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표현된 '돌연변이 예술'. 1920~30년대 멕시코에서는 이처럼 서양 예술 사조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던, 특수한 공공예술이 꽃피고 있었다. 이름하여 '멕시코 벽화운동'이 그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회가 만들어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변하기를 종용하는 예술이 아닌,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 이 벽화운동의 탄생은 1910년에 발발한 멕시코 혁명에 크게 기대고 있다.

모든 혁명은 자신의 예술가를 갖는다. 혁명은 자신의 과정을 역사로 기술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한 예술가들은 혁명의 이상을 포스터와 혁명적 그래피티 등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소개해 왔다. 멕시코 혁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멕시코 혁명은 디에고 리베라(1886~1957)를 자신의 예술가로 선택했다.

국립궁(Palacio Nacional)에 그려진 <멕시코의 역사> 부분
▲ 계급투쟁-현재 그리고 미래 국립궁(Palacio Nacional)에 그려진 <멕시코의 역사> 부분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1932년에 찍은 디에고 리베라의 사진(자료사진)
 1932년에 찍은 디에고 리베라의 사진(자료사진)

1886년 유망한 전문 직업인 가문에서 태어난 리베라는 12살 때 멕시코의 주요 미술학교인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 입학을 허락받았다. 그는 그 곳에서 유럽의 고전회화를 노예적으로 답습하는 아카데미의 완고한 체제를 발견했다.

그 때 멕시코 미술은 유럽에서 흘러들어온 낡은 양식을 답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특히 프랑스의 아카데미즘을 추종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장기간에 걸친 식민통치는 많은 미술가들에게 유럽의 추종을 가장 진보적이고 정통적인 것으로 믿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멕시코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예술은 저열하고 돌아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조장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베라는 장학금을 받아 1908년 '아카데미즘의 중심' 프랑스에 가서 미술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엘리트 코스'를 차근히 밟는 대신 불온한 사상이었던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조국의 농부들이 겪고 있던 고통스런 삶에 대해 항상 동정을 느껴왔던 리베라로 하여금 혁명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14년간 피카소의 추상적 모더니즘을 공부했던 그는 191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더이상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쟁과 러시아 혁명과…(중략)…그리고 대중예술과 사회화된 예술의 필요성을 위하여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예술기법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겠다. 예술은 세상과 그리고 모든 시대와 소통해야 하며 대중이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입체주의 예술은 여러가지 면에서 적합하지 않다."

"예술은 더 나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멕시코 혁명이 무엇이었던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 백인 지배자들에 대항하여 인디오와 메스티소(에스파냐계 백인과 인디오와의 혼혈인종)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일어난 저항의 움직임이었다.

이 '멕시코 혁명'은 인디오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부흥시켜야 한다는 인디오 전통부흥운동(Indigenism)'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전통적인 원주민 문화에 기초한 새로운 민중예술을 구현해야 한다는 바람으로 나타났다. 예술도 민중의 것, 민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리베라가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조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혁명이 가라앉자, 멕시코의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민중 교육계획'에 이바지하고자 힘을 합쳤다.

이 계획은 혁명군에 직접 참여했던 헤르라도 무리요와 국립미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아틀 박사의 반아카데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틀 박사는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전통적인 회화로서는 미술의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화가·건축가·조각가는 전시장에서나 다른 어떤 볼거리를 위해 작업할 것이 아니라 건물의 벽을 장식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스페인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고대 마야문명과 아스텍 문명에 의해 설립됐던 멕시코의 고대 도시들은 많은 벽화들로 장식돼 있었는데 그는 이런 사실을 주목했던 것이다. 이같은 계획은 당시 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던 오브레곤 대통령과 호세 바스콘셀로스 교육부장관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사회개혁을 추진하던 오브레곤 대통령은 바스콘셀로스로 하여금 혁명의 에너지를 계속 충전시킬 수 있는 내적 성숙의 기틀을 다지게 만들라고 지시했고, 바스콘셀로스는 그 해답으로 '벽화' 카드를 뽑아들었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에 의해 오랫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는 바람에, 유럽계 백인들의 국가인가 아니면 원주민의 국가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의 건물들 역시 식민시대에 건설돼 교회·궁정·관청·학교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유럽풍이었다.

'벽화운동'은 이 유럽풍 건물의 벽면에 인디오들의 문화를 그려내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은폐되거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무시와 착취 속에 방치된 원주민의 역사와 삶에 대해 주목하고, 두개의 멕시코가 아니라 하나의 멕시코 속에 원주민 문화를 끌어 안으려는 논의가 이 '벽화운동'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정부청사를 내줄테니, 민중의 캔버스로 쓰시오"

디에고 리베라의 자화상
 디에고 리베라의 자화상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오브레곤 정부는 건물의 벽을 "캔버스 대신으로 쓰라"며 기꺼이 화가들에게 내주었다. 예술가들은 기존의 공식미술로서는 멕시코혁명으로 생산된 변혁의 에너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좁고 폐쇄적인 작업실과 일정한 규격에 맞추어진 화폭을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생동하고 있는 사회 그 자체를 작업실로 생각했다.

1921년 귀국한 디에고 리베라도 이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는 나중에 자신과 함께 세 거장(Los Tres Grandes)으로 일컬어지게 될 오로스코·시케이로스와 함께 <화가·조각가 연맹>에 가입했다.

벽화운동을 주도했던 <화가·조각가 연맹>의 선언문을 보면, 이들 '혁명적인' 화가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기본적인 미학은 예술표현에 있어 부르주아 성향에서 탈피하여 사회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귀족적인 그리고 이젤화와 같은 개인적인 예술을 버리고,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예술을 지향해야 한다."

벽화제작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자신을 창조자가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노동자와 같은 조건 아래 노동자와 함께 어울려 작업함으로써 벽화가 한 개인의 창조적 천재성이 만들어낸 사적 소유물로서 몇몇 제한된 전문인에 의해서만 읽혀지거나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속에서 살아있으며 그들이 함께 소유할 수 있는 진정한 공공미술이 되기를 원했다.

리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멕시코 혁명에서 싸워 이긴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자신의 그림을 더 쉽게 이해하기를 원한 리베라는 미술의 '전문적인 언어'가 가지는 폐쇄성을 뿌리치고 '보통의 언어' 즉 이야기가 담긴, 전달하기에 용이한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벽화란 한 개인의 천재적 능력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모든 멕시코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자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로 수만제곱미터에 이르는 긴 벽면을 수많은 인물과 역사적 사건들로 넘쳐나는 벽화로 장식했으며 그것은 대부분 '진보'와 '풍요'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채워졌다.

아스테카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양식화된 강렬한 형식을 활용하면서도 독창적인 구도와 색채를 구현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리베라의 벽화는 선전 선동적 의도가 강한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관학적(官學的)인 현실미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앞에서 보았던 국립궁에 그려진 벽화를 다시 상기해 보자. 짐작했다시피 그 벽화는 리베라의 그림 '멕시코의 역사' 중 일부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멕시코 민중의 삶과 역사를 서사시적으로 표현해냈다. 아스텍 신화 시대로부터 식민지 시대와 독립과 혁명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그의 벽화에는 멕시코인의 꿈과 좌절이 서려 있다.

마야, 아스텍의 신인 케찰코아틀을 중심으로 멕시코 고대문화를 묘사했다. 매 52년마다 열리는 불의 춤을 통해 그들의 예술, 천문학, 전쟁 등을 표현했다.
▲ 케찰코아틀의 전설- 멕시코 고대 인디오 문명 마야, 아스텍의 신인 케찰코아틀을 중심으로 멕시코 고대문화를 묘사했다. 매 52년마다 열리는 불의 춤을 통해 그들의 예술, 천문학, 전쟁 등을 표현했다.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스페인의 식민통치시대의 압정과 1852~57년에 걸쳐 프랑스가 침략했던 상황을 그렸다. 독립이후 멕시코는 혼란한 내정과 재정결핍으로 외세의 침략이 잇따랐는데, 이 그림은 그중 외채지불 불능의 멕시코에 프랑스가 침략한 상황을 그렸다.
▲ 식민지 시대- 프랑스 침략 스페인의 식민통치시대의 압정과 1852~57년에 걸쳐 프랑스가 침략했던 상황을 그렸다. 독립이후 멕시코는 혼란한 내정과 재정결핍으로 외세의 침략이 잇따랐는데, 이 그림은 그중 외채지불 불능의 멕시코에 프랑스가 침략한 상황을 그렸다.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멕시코 민중, 벽화에서 역사를 보다

이 벽화에는 멕시코의 고대문명과 스페인의 침략, 멕시코의 독립 등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과 수많은 실제인물이 등장한다.

가운데 다섯 개의 벽면에 구획된 멕시코의 역사에 대한 부분은 각각 '식민지 시대­-프랑스 침략', '멕시코 혁명', '선인장 위의 독수리­-정복당하는 테노치티틀란-­멕시코 독립', '헌법 제정', '미국의 침략'의 주제로 이어진다.

즉, 처음에는 스페인 통치시대의 압정과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섭정 아래에서 무력해진 멕시코인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 다음 면에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성직자와 고관대작이 마데로·사파타와 까란사·바스콘셀로스 등 혁명의 주요인물들이 대치하는 모습이 민중의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중앙 상단부에 땅, 자유, 그리고 빵이라는 세글자가 쓰여진 붉은 기가 있고, 인물로는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독재가 포르피리오 디아스 장군이 그려져있다.
▲ 멕시코 혁명(La Revolucion Mexicana) 중앙 상단부에 땅, 자유, 그리고 빵이라는 세글자가 쓰여진 붉은 기가 있고, 인물로는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독재가 포르피리오 디아스 장군이 그려져있다.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1325년의 테노치티틀란 지방과 멕시코의 문장이기도 한 선인장과 독수리를 거대한 벽화의 정면 중심에 배치하여 멕시코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고자 했다. 1810년 이달고의 돌로레스 선언 즉 독립선언장면과 그 옆에 모렐리아 지방의 독립영웅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1821년 독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독립투쟁과정이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 선인장 위의 독수리- 정복당하는 테노치티틀란- 멕시코 독립 1325년의 테노치티틀란 지방과 멕시코의 문장이기도 한 선인장과 독수리를 거대한 벽화의 정면 중심에 배치하여 멕시코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고자 했다. 1810년 이달고의 돌로레스 선언 즉 독립선언장면과 그 옆에 모렐리아 지방의 독립영웅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1821년 독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독립투쟁과정이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그 밑에 그려진 긴 벽화의 중앙 벽면에는 뱀을 문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있는 멕시코 문장(紋章)을 중심으로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정복할 당시 그에 저항했던 아스텍 왕 쿠아우테목과 전사들의 모습과 독립선언을 한 돌로레스의 신부와 모렐로스 등의 독립영웅들의 투쟁이 그려져 있다.

그 다음에는 첫 번째 인디오 출신의 진보적 대통령인 베니토 후아레스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 개혁적 법안을 다룬 헌법을 제정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1847년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하여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텍사스, 플로리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지방 등을 빼앗기게 되는데,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아스텍 상공을 나는 모습을 통해 미국의 제국주의 침탈을 고발하고 있다.

맨 왼쪽 벽면에는 앞서 보았던, 마르크스가 등장했던 그 그림. '계급투쟁­현재 그리고 미래'가 자리잡고 있다.

1856~57년 베니토 후아레스가 당시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내란으로부터의 탈출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의 독립,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상존해 오던 교회의 권력에서 벗어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헌법을 제정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 헌법 제정(Las Leyes de Reforma) 1856~57년 베니토 후아레스가 당시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내란으로부터의 탈출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의 독립,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상존해 오던 교회의 권력에서 벗어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헌법을 제정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1847년 멕시코는 미국의 침략을 당하여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지방을 빼앗겼다. 이 그림은 미국이 침략할 당시의 모습을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아스텍 하늘을 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 미국의 침략(La Invasion Estadounidense) 1847년 멕시코는 미국의 침략을 당하여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지방을 빼앗겼다. 이 그림은 미국이 침략할 당시의 모습을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아스텍 하늘을 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 디에고 리베라

관련사진보기


멕시코인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땅에서 숨죽이며 살아가야만 했다. 스페인이 아스텍 문명을 짓밟으며 멕시코를 점령한 이래 300년간, 멕시코는 철저히 착취당했다. 스페인과 경쟁이 되는 모든 산물들은 생산 금지되었고 멕시코의 풍부한 금과 은은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멕시코의 큰 도시들은 스페인식의 도시계획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재정리되었고 스페인어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모든 책과 사상이 통제되었다. 스페인의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순수한 인디오들의 혈통은 거의 없어져 버렸고 대부분 혼혈이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백인들만을 관직에 등용했고 멕시코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인 끄리오요(Criollo)마저 차별대우했으며 인디오 계통의 멕시코인들은 노예 상태였다.

멕시코는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지만, 리베라가 벽화에서도 그렸듯이 이번엔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받았고 특히 미국에게는 당시 멕시코 국토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영토를 내주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 이후 경제적으로도 미국에 예속돼 멕시코는 최근까지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미국의 제국주의 독점자본에게 수탈당하고 있다.

그림을 왜 돈주고 사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되돌아 보기 싫은, 잊고만 싶은 역사이다. 하지만 벽화운동은 이를 '민족적 자긍심'으로 승화시켰다. 멕시코의 민족주의와 역사적 사건을 부각시켜 그들의 뿌리를 찾고 오랜세월 식민치하에 시달린 국민들에게 국가의 의미와 자존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멕시코에서 벽화운동이 한창일 당시, 바스콘셀로스가 했던 말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인종과 국경의 벽을 넘어선 사랑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메스티소는 '우주적 인종'"이라며 "메스티소는 앞선 인종들의 장점을 고루 흡수했기 때문에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지금과는 다른 아름답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앞장서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뿐이랴.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했던 그 '우주적 인종'들에게, 벽화는 막힌 입을 대변해주는 도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멕시코 곳곳에서 빛나고 있는 벽화들은 잘 길들여진 아틀리에 미술만이, 얌전히 전시장에 안치돼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미술만이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소리없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듯 하다. '자본주의적 삶'에 체화돼 미술을 감상할 시간조차 돈으로 사야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잊고만 있었던 바로 그 진리! 미술은 공동체가 나눠가질 수 있는 재산이며 공동체의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라는 것 말이다.


태그:#디에고 리베라, #벽화운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