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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파리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고 적혀있는 악보 사본 표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베토벤은 2년 뒤인 1806년에 문제의 곡, 교향곡 3번 '영웅'을 출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1805년 4월 7일 비엔나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대중들에게 공개된 이 곡은 음악사적으로도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당시에는 4악장의 교향곡이라고 해도 대체적으로 전체 연주시간이 30분을 넘지 않는 규모였던데 반해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은 연주시간이 50분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곡이었다. 게다가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바순 2, 호른 3,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라는 오케스트라 편성은 당시로서는 찾기 힘든 대규모였다.

 

또한 2악장은 전대미문의 '장송행진곡'을 배치했으니 첫 공연을 들은 청중들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귀족들이 즐기던 음악이라는 것이 심각한 내용보다는 여가를 즐기고 사교를 나누는 데에 보조역할을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교향곡 3번 '영웅'이 들려주는 심각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사운드는 귀족들에게 매우 불편하게 들렸을 것이다.

 

사실 베토벤은 당시에 음악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매우 '급진적'인 사람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해서 귀족들이 주인행세하던 신분제 사회에서는 입에 담기도 무서운 '공화주의'를 꿈꾸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급진적 사회주의자'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 베토벤에게 자유, 평등의 가치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의 총아 나폴레옹은 교향곡 3번의 표제 그대로 '영웅'이었다. 썩어빠진 귀족세상을 갈아엎고 민중들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공화주의' 세상을 건설할 초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베토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해 '나폴레옹'에게 바칠 걸작을 작곡해 나갔다. 그리고 표지에는 자신의 이름 위에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적으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폴레옹이 귀족들의 우두머리쯤 되는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이 느꼈을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화주의 꿈꾸던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던 '영웅'

 

 

이러한 베토벤의 정치적 성향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의 일화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언젠가 괴테와 베토벤이 함께 길을 거닐다가 맞은편에서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귀족이 다가왔다고 한다. 괴테는 즉시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예의를 표했는데 반해, 베토벤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지나갔다. 이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베토벤과 괴테는 서로에 대해 많이 실망을 하고 소원해졌다. 괴테는 베토벤이 매우 거칠고 예의가 없어서 거부감이 든 반면, 베토벤은 괴테가 귀족적 취향이라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베토벤은 어릴 적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 궁정악단의 테너가수였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모짜르트같은 신동으로 만들어 돈벌이를 해 볼 요량으로 매우 가혹하게 다뤘다. 게다가 10대 시절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자 아버지 요한은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고 집안의 살림과 두 어린 동생의 인생이 모두 베토벤의 두 어깨에 지워졌다. 어렵사리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면서부터 갑작스럽게 찾아온 귓병은 그를 자살시도에까지 몰아붙였다. 1802년 10월 6일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자살을 기도하며 쓴 유서에는 이러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오! 너희들, 나를 지독한 고집불통으로 여기면서 염세적인 인간으로 치부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아! 나에 대한 너희의 그런 잘못된 생각의 숨겨진 진짜 원인을 너희는 모르고 있다. 오늘날까지 나는 마음과 정신에서 우러나는 선행을 매우 좋아했다. 심지어 선행을 성취하는 것을 내 의무로까지 여겨왔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아라. 6년 동안 비참했던 내 상황에 대하여! 무능한 의사들 때문에 증상이 자꾸만 나빠져 가는 것도 모른 채 머지않아 회복되리라는 헛된 희망에 2년을 속았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병이 '만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설령 어느 정도의 회복은 가능했을지라도 완쾌하기까지의 시간은 장담할 수 없었다.

 

사교의 즐거움에도 쉽게 끌릴 만큼 열정적이고 활발한 성질을 타고난 내가 아니었더냐! 그런데 이토록 이른 나이에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혼자 외롭게 살아야만 할 형편이다. 이 모든 장애를 마음에서 밀쳐내려는 행동도 해보았지만 곧 내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만 몇 배나 더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얼마나 가혹한 삶이냐! 사람들에게 "더 큰소리로 말해 주시오, 소리쳐 달라구요. 나는 귀가 안 들린단 말이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후략)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껴지는 치열함과 투쟁의지, 숭고함과 장엄함은 이 모든 삶의 무게를 한꺼번에 짊어진 고독한 천재 예술가의 절규이리라. 그는 빵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작곡해야 한다는 사실에 매우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존심을 파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서양 음악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위 프리랜서 작곡가이기도 하다. 당시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귀족들의 후원이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궁정이나 교회 같은 곳에 종속되어서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써주는 굴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출판해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러한 삶이 안정적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안정보다는 자유를 택한 것이다.

 

안정보다 자유택한, '급진적 공화주의자' 베토벤

 

베토벤의 이와 같이 치열한 삶은 그를 자연스럽게 '급진적 공화주의자'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공화주의'를 기치를 내걸은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으며,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던 교향곡 3번 '영웅'도 결국에는 혁명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표현한 것이다.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진 교향곡 5번에서도 프랑스 혁명 때의 노래나 행진곡들이 사용됐다고 한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아니 인류 음악사에 걸쳐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교향곡 9번 '합창'에서도 '불온한' 공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가 있다.

 

교향곡 9번 '합창'은 제목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4악장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합창을 삽입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하기 이전에는 교향곡에 합창이 들어가는 시도는 그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베토벤은 당시 기악곡 양식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교향곡에 성악을 도입하는 '급진적'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베토벤은 음악 양식에서의 '급진성'에 머물지 않고 4악장의 성악과 합창단이 부를 노래의 가사를 독일 시인 쉴러 '환희에 부침'에서 인용한다. 당시 쉴러는 계몽사상과 공화주의를 부르짖는 소위 '불온한' 시인이었다. 쉴러가 1785년에 쓴 이 시는 인류애와 인간해방, 평등을 노래하는 급진적인 저항시였다. 원래 쉴러가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달려고 했지만 당국의 검열 때문에 '자유'를 '환희'로 바꿨다고 한다. 베토벤은 이러한 저항시의 일부를 발췌해서 자신의 교향곡 4악장에 삽입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일부를 발췌해서 교향곡 4악장의 가사로 삼았다고나 할까.

 

 

음악사에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자 낭만파 음악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악성' 베토벤의 '급진적' 음악은 이제 200년 가까이의 시간이 지난 지금 어느덧 고리타분한 '클래식' 음악이 되었다. 전 세계의 학교에서 베토벤이 지은 곡들을 감상하고 연주하고 있다. 연말에는 불온한 저항시를 가사로 사용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세계 곳곳에서 천연덕스럽게 연주된다. 클래식 음악애호가들도 대부분 베토벤이 '반체제인사'였다는 사실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에서 얘기하던 가치들이 지금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불온했던' 음악들은 더 이상 불온하지 않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토벤이 지금 이 사회에 다시 태어난다면 자신이 꿈꾸던 사회라며 만족하고 더 이상 '불온한' 작곡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많은 모순이 있다. '돈'이 사람 잡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베토벤은 아마도 평등과 인간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급진적 성향이라면 충분히 그러할만 하다. 그리고 지금, 급진적이었던 프랑스 혁명의 가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듯이 언젠가는 '사회주의자' 베토벤의 가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태그:#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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