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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쉬모어산 큰바위얼굴
 러쉬모어산 큰바위얼굴

미국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지역의 최대 관광명소는 어디일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에게 '큰 바위 얼굴'로 잘 알려진 러시모어산(Mount Rushmore)이 꼽힐 것이다. 블랙힐스 산악군의 한 자락인 러시모어 산 꼭대기에 조각된, 역대 미국 대통령 4명의 '큰바위 얼굴'은 각각의 코 길이만 하더라도 무려 6미터가 넘는 등 그 거대함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마치 "미국은 조각마저도 스케일이 다르다"라는 것처럼 우람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큰바위얼굴은 미국인들의 자랑거리로 충분하다.

조각가 코자크의 사진
 조각가 코자크의 사진
그래서였을 것이다. 조각가 코자크 지올코브스키(Korczak Ziokowski, 1908∼82)가 이 '러시모어 대통령 조각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것은.

보스턴에서 태어난 코자크는 뉴욕에서 열린 세계조각전시회에서 최고상을 받을 정도로 유능한 조각가였다. 그는 '큰바위 얼굴'을 조각한 보글럼의 조수로 잠시 일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는 조각작품을 작업하며 굉장히 뿌듯해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가 만들어낸 것은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제퍼슨, 남북전쟁를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제를 혁파한 링컨, 파나마 운하 구축 등으로 미국의 지위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루스벨트의 얼굴이었다. 미국의 역사, 미국의 정신을 새겨넣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1939년 인디언 수우(Sioux)족의  추장 헨리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 서 있는 곰)의 편지를 받은 후, 이같은 마음을 접은 것 같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추장들은 백인에 대한 소망이 있다. 우리 홍인(紅人, red man)도 백인처럼 위대한 영웅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백인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가 말하는 위대한 영웅은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성난말)'였다. 추장은 코자크의 경력을 잘 알고 있었다. '성난말'이 죽은 날짜와 코자크가 태어난 날짜가 같다는 것을 안 추장은 이를 계시와 같은 인연으로 여긴 것이다. 코자크는 그후 '성난말'의 삶을 연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성난말'의 서사시 같은 삶을 재현하는데 남은 인생을 걸겠다고!  편지를 받은 지 8년 만이었다.

1947년 5월 그는 성난말을 조각하기 위해 러시모어산에서 27㎞ 떨어진  '검은 언덕(Black Hills)'에 왔다. 그의 조각 구상은 러시모어 큰바위 얼굴의 차원을 뛰어넘었다. 꼭대기 암벽에서 아래까지 산 전체를 깨고 깎는 것이었다. 드디어 1948년, 그는 순전히 자기 재산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휴대용 착암기 하나로, 검은언덕의 돌산을 깎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가진 돈은 고작 174달러였다.

"나는 미국 영웅들의 얼굴을 조각했다.
그리고 한 인디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자신들에게도 영웅이 있음을 알아달라고.
1948년, 나의 첫 망치질이 시작됐다.
나는 인디언 후원자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전하는 돌 속의 이야기꾼일 뿐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1천만원을 지원해 주겠다는 연방정부의 제안도 거절했다. 성난말의 모습을 조각하는데 백인들의 돈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후원금과 관광수입만으로 버티며 35년 동안 750만t의 돌을 깬 뒤, 1982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도대체 인디언 '성난말'은 누구였기에? '잘나가던 조각가' 코자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조각을 만들도록 붙잡아놓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인디언 성난말이 누구기에

성난말의 초상화
 성난말의 초상화
성난말, 크레이지 호스. 인디언 식 이름 '타슈카 위트코'. 그의 삶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디언의 비극적인 역사부터 알아봐야 한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병들고 지친 탐험가들을 호의적으로 맞이해준 원주민들을 도륙한, 침략역사의 시작이었다. 자연을 정복하여 문명을 일군 유럽인들이 15세기에 새로운 땅을 찾아 아메리카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자연과 한몸으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인디언'이라는 잘못된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부터 그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이 이방인들을 손님으로 대접하여 담배와 칠면조를 선물로 주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옥수수 씨앗을 나눠주며 심고 가꾸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칠면조와 옥수수 빵같은 인디언의 음식을 차려놓고 이것을 기념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평화롭고 유순한 그들을 나태하고 미개한 종족이라며 백인의 '우월한' 생활방식을 강요했고, 나중에는 그들의 땅까지 요구했다.

서부 개척사는 어떻게 보면 '땅뺏기의 역사'다.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금전으로 매수하고 사기와 협박으로 도장을 찍게 만들고 총칼로 수많은 부족을 짓밟으면서까지 땅을 빼앗은 강점의 역사! 서부개척사를 뒤집으면 인디언 멸망사가 나타난다.

백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막강한 화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디언 부족을 학살했으며, 사기와 뇌물로 그들을 분열시키고, 수많은 조약을 체결했다가 파기하면서 인디언의 비옥한 땅을 먹어치웠다.

미국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개척정신, 즉 프런티어 정신이라는 것도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프런티어 정신은 백인 입장에서는 모험과 용기, 그리고 인내를 의미하는 진취적인 이념이었지만, 당하는 인디언의 입장에서는 땅과 목숨을 빼앗아가는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정신이었다.

신천지를 찾아 유럽에서 속속 이주해오는 백인들로 인해 미국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구 증가에 따라 영토확장의 필요성에 절감한 백인들은 북아메리카 전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몰아내며 서진(西進)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백인들과 인디언 사이에는 무수한 전투가 있었다. 서부로 가는 백인들의 안전문제가 대두되자, 미국정부는 1868년 일종의 타협책으로, 검은 언덕을 인디언 땅으로 하기로 조약에 명기해주었다.

백인들은 '검은 언덕'을 쓸모없는 곳으로 여겼지만 인디언들에게 이곳은 세계의 중심지이자 신(神)과 영산(靈山)이 모여있는 곳이며, 전사들이 위대한 정령과 만나 영감을 얻는 성지(聖地)였기 때문이다. 이 조약을 통해 성스러운 땅 검은 언덕은 '인디언의 허락 없이는 백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곳'으로 규정되었으며, 대신 인디언들도 서부로 가는 백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검은 언덕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그 조약을 순식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1872년 황금에 눈먼 백인광부들이 검은언덕에 침입했다. 이어 이들 광부를 보호하기 위해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제7기병대도 검은언덕으로 들어왔다.

인디언들에게 이같은 일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성난말도 그랬다. 그는 성스러운 땅에 충격적으로 침입한 백인들에게 분노했고, 또 저항했다. 백인들이 신성한 땅 검은 언덕을 팔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땅은 우리의 어머니인데 어찌 어머니를 팔 수 있느냐."
"자기가 걸어다니는 땅을 팔아먹는 사람은 없다."

그는 1866~1868년 보즈먼 트레일전쟁, 1866년 페터먼 싸움, 1867년 웨건박스 싸움 등 백인들과의 전투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던 용맹한 전사였다. 성난말이 검은언덕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76년, 검은언덕을 놓고 백인과 인디언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6월 17일 로즈버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데 이어 같은달 25일 인디언의 최대 승리를 대표하는 전쟁 '리틀빅혼 전투'에서도 현장 지휘자로 나서서 승전보를 올렸다. 이날, 인디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악명이 높았던 성난말의 적수 커스터 장군도 사망했다.

하지만 환희의 시간은 짧았다. 미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인디언은 뿔뿔히 흩어졌다. 성난말도 부족민을 데리고 로즈버드로 피신했다. 끈질기게 검은 언덕으로 꾸역꾸역 들어온 백인들은 마침내 1877년 '평화적 인디언'들에게 '검은 언덕을 양도한다'는 조약문에 강제로 서명하게 한다.

로빈슨 요새에서 그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아모스 배드 하트 불(Bad Heart Bull)이 그린 석판화
▲ 성난말의 최후 로빈슨 요새에서 그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아모스 배드 하트 불(Bad Heart Bull)이 그린 석판화

어찌하겠는가. 이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각 모든 식량 공급을 중단하고 남쪽의 인디언령으로 이주시킬 것이며 군이 총과 말을 모두 거두어갈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을. 인디언들은 이제 미국정부가 주는 식량이 없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백인들의 마구잡이 버팔로(들소) 사냥은 인디언의 생활 기반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버팔로는 인디언들의 경제적 토대였다. 그 가죽으로 옷·담요·티피(tepee)텐트를 만들었고 고기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버팔로는 백인들의 '사냥놀이'로 인해 씨가 말랐다. 게다가 남쪽 멀리 낯선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인들의 추격을 피해 동족들을 이끌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던 성난말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추위와 아사직전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동족들이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으리라. 결국 "성난말이 항복한다면, 그의 부족민은 파우더강 지역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갖게 될 것"이라는 백인들의 말에 성난말은 투항하게 된다.

1877년 5월 5일이었다. 성난말은 추종자 900여 명과 함께 네브래스카 주 북서부 레드 클로우드의 주재소가 있는 로빈슨 요새로 들어가 백인에게 항복했으나 정확히 4개월뒤인 9월 5일 로빈슨 요새의 미군 병사가 찌른 총검에 숨졌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그리고 그 후 성난말의 동족들은 가슴을 찢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수우족은 네브래스카를 떠나 미주리 강의 새 주거지역으로 이주해야 한다."

역시나 백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높이는 563피트이고, 길이는 641피트의 성난말 조각상

성난말, 그는 갔지만 '자기땅을 지키고자 했던, 꺾이지 않는 투지를 보여준 그의 삶'은 두고두고 인디언들의 정신에 남았다. 코자크 지올코브스키가 평생에 걸쳐 그의 얼굴을 조각했던 것, 현재까지 코자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내와 10명의 자녀들이 크레이지 호스 기념재단과 함께 프로젝트를 계승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성난말의 얼굴은 1998년에 제작이 완료되어 제막되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의 이 조형물은 높이는 563피트이고, 길이는 641피트이며 내어 뻗은 팔 길이만 263피트이다. 말의 얼굴 크기만 해도 22층 높이의 빌딩크기이라니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이다. 성난말의 조각상은 완성되기까지 앞으로 100여년이 더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것이 완성되면 높이가 자유의 여신상 두 배이며 손가락 한 개가 버스만한 세계 최대의 조각품이 될 것이다. 아무런 지원 없이 계속되고 있는 이 일은 처음엔 한 조각가에 의하여 시작 되었지만 이제는 인디언의 역사를 남기는 거대한 꿈이 된 것이다.

성난말 조각 변천사
 성난말 조각 변천사
ⓒ 크레이지 호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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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말의 조각 모형 아래에는 백인들의 조롱섞인 질문 '네 땅이 어디 있느냐'에 대답한 성난말의 말이 새겨져 있다.

"나의 땅은 내가 죽어 묻힌 곳이다(My lands are where my dead lie buried)."

하지만 현재 성난말의 후예들인 인디언들에겐 더 이상 땅이 없다. 죽어묻힐 땅조차 빼앗겼다.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 미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목숨을 내놓고 고생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 그들에게는 이 두가지 선택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잃은 것이 어디 땅뿐일까

인디언들은 현재까지 '인디언 레저베이션(Indian Reservation)'에 산다. 세상에,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니. 인디언은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다. 백인들은 광활한 평원과 삼림을 빼앗고 이들을 늪지대나 풀이 자라지 않는 불모지에 몰아넣었다. 이것이 레저베이션이다. 인디언들은 여기서 차례차례 병들어 죽어갔으며 도망치다 붙잡히면 무조건 사살당했다.

레저베이션은 인디언의 생존을 위해 만든 보호구역이라기보다는 멸족을 촉진시킨 '유폐지역'이었다. 보호구역에서 배식을 받으면서 굴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교회에 다니며 백인들의 문화에 동화되야한다고 요구당했던 그들은 이제 미국땅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결국 100년이나 지나 미국 대법원이 불법적인 토지강탈에 대해 보상판결을 내렸지만, 땅을 돌려주길 거부한 대신 금전적 보상을 명령했고, 배상액 중 현재가치로 6억 달러 이상이 집행되지 않고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디언이 잃은 것이 어디 땅뿐일까.

인디언들의 신성한 땅, 자신들의 종족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인디언들이 피를 흘린 그곳 검은 언덕에 하필이면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을 새겼다는 것. 인디언 한 사람의 목에 수백 달러의 포상금을 내걸었던 링컨의 얼굴을 검은 언덕에 새겨 넣은 것을 보면서 인디언들은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다.

말을 타고 한팔로 지평선을 가리키며 뻗고 있는 성난말 조각. 앞의 하얀조각은 실제조각의 34분의 1크기의 축소판 모형도. 뒤에 한창 조형중인 실제조각이 보인다
▲ 성난말 조각 말을 타고 한팔로 지평선을 가리키며 뻗고 있는 성난말 조각. 앞의 하얀조각은 실제조각의 34분의 1크기의 축소판 모형도. 뒤에 한창 조형중인 실제조각이 보인다
ⓒ 크레이지 호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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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 아래 마을 이름은 성난말의 적수였던 '커스터'다. 이뿐만 아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장거리 미사일에 '토마호크(Tomahawk)'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마호크는 성난말이 죽는 날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손도끼의 이름이었다.

인디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처 입었을지 우리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통해서만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역시 1910년에 일본에 의한 토지사업으로 많은 땅을 잃게 되었음을 상기해보자. 그 지배가 계속되었다면? 그리고 북한산에 일본 천황들의 얼굴이 새겨진 것을 보게 되었다면?

그래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성난말의 조각'이 중요하다. 인디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위엄을 갖추고 있는 성난말의 모습에 많은 위로를 얻을 것이고 자부심도 되찾을 것이다.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 회원인 조지프 커리의 말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디언의 비참한 역사는 미국의 영광 속에 숨어 있었다. 서부 개척 시대의 정의에는 위선의 그림자가 넘실댔다. 코자크는 그런 뒤틀린 이면사를 성난말 조각을 통해 미국인 전체에게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던졌다.."


태그:#성난말, #크레이지 호스, #러쉬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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