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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거기 가도 되는 거야?'

 

토요일(5월 31일) 저녁, 아내와 함께 촛불문화제에 다녀왔습니다. 아내 혼자 두고 집을 나서기가 미안해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가도 괜찮은 거야?"


아내는 교사인 제 신분이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미친 소, 미친 교육 추방'이라는 일종의 반정부 슬로건을 내걸고 십대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신분상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겠지요. 저는 아내를 안심시킬 목적으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걱정되면 당신도 같이 가든지. 나 거기까지 걸어갈 건데."


집회 장소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80분 정도 걸립니다. 평소 아내와 함께 자주 걷곤 했던 동천을 따라 40분쯤 걷다가 신도심으로 향하는 길로 꺾어서 다시 40분 가량 걸어가면 목적지에 당도합니다. 아내는 걸어간다는 말에 혹해서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돌아올 때도 걸어서 돌아오기로 약속을 했지요.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샛강 동천을 따라 걸으면서 저는 한 시인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단의 일원으로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과 새만금, 그리고 금강을 거쳐 다시 한강으로 되돌아오는 무려 103일 동안의 한반도 대운하 저지 걷기 순례를 마치고 문학강연 차 잠시 순천에 들른 박남준 시인의 말입니다.

   

"우리 강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강이 아름다운 것은 모래톱이 있고 여울이 있기 때문인데 강바닥을 다 파헤치고 시멘트로 둑을 쌓는다니 이거 가슴 터질 일 아닙니까?"


그 말이 실감으로 다가온 것은 그의 인간됨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아픈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아픈 법이니까요. 그는 순례 도중에 젊은 신혼부부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포기하고 순례단을 따라나선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반도 대운하 저지를 위해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지요. 그 두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던 박 시인의 여린 눈빛이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두 젊은 부부를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보았지요. 나중에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갖게 되고, 그 자녀들이 장성해서 순례단과 함께 걸었던 그곳으로 가족여행이라도 오게 되면 그때의 일을 자녀들에게 말해주겠지요. 우리가 이 아름다운 강을 지키기 위해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이곳을 걸어갔노라고 말이죠.


그런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 있다가 또 이런 생각이 문득 드는 거예요. 만약에 정말 한반도 대운하가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그래서 강이 다 파헤쳐져 예전의 아름다움을 다 잃어버린 볼품없고 생명 없는 강이 된다면, 정말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면?"


시인은 거기까지 말을 하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더욱 끔찍한 일은 그렇게 강의 아름다움을 다 망가뜨리고 대신 시멘트 구조물로 된 운하를 만들어 그 위에 배를 띄워 관광 사업을 하겠다는 저들의 발상입니다.

 

물론 대운하 관광이라는 것이 나라의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CEO 출신 대통령의 제 1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실상 그럴 만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뒤에 이를 만회하기 위한 후속책으로 거론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소심한 내가 촛불집회 배후세력이라고? 

 

행사장에 도착하자 귀에 익은 노랫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노랫말로 해서 만든 노래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헌법을 준수해야할 의무는 물론 대통령에게도 있습니다. 아니, 대통령이기에 더욱 헌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취임식 때 국민들 앞에서 엄숙히 선서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 노릇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국민의 명령으로 알고 잘 따르면 될 일입니다.


행사장을 둘러보니 다행히도(?) 우리 학교 아이들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수업시간에도 아이들 입에서 촛불집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교과서에 소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어서 더욱 조바심이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못나고 소심한 저를 두고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사실만으로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이라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입니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무슨 이야기 끝에 우리 나라가 참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자 한 아이가 광우병으로 다 죽게 되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대꾸가 우습기도 하고, 좀 과장된 것 같기도 해서 이렇게 말을 해주었지요.  


"녀석아 다 죽다니? 미국 쇠고기가 수입된다고 해도 광우병 걸린 쇠고기를 먹고 죽을 확률은 그렇게 많지 않아."


엉겁결에 말을 해놓고 생각해보니 방송 토론 때마다 정부쪽 패널들이 한 말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그런 말을 했지 하고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드디어 아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확률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니, 내 말은 광우병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안이한 태도가 더 문제라는 거지." 

"금방 광우병 걸릴 확률이 낮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럼 선생님은 확률이 낮으니까 광우병 걸린 수입 쇠고기 드실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선생님, 이명박 찍었지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서 진땀을 빼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새 다 커 버린 장성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 같았다고나 할까요? 촛불집회 배후세력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지요. 


 

실수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겠네

 

행사장에 자리를 깔고 앉기 전에 아내 몫까지 촛불 두 개를 받아왔습니다. 문득 저 많은 초를 준비하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궁금증은 쉽게 풀렸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한참 진행되다가 모금함이 돌면서 이에 대한 사회자의 친절한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촛불문화제를 진행하려면 초도 사야 하고 약간의 돈이 필요합니다. 많은 돈은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털어서 내셔도 좋고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사회자의 말대로 천 원짜리 한 장을 지갑에서 꺼내어 모금함에 집어넣었습니다. 잠시 후 사회자가 구호를 하나 외치자고 했습니다. 사회자가 목청껏 구호를 외치자 수백 명의 참석자들도 목이 터져라 함께 따라 외쳤습니다.


"재협상을 철회하라."

"재협상을 철회하라."


그렇게 구호를 따라하다가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회자가 실수를 한 것을 뒤늦게 알고 이렇게 넉살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재협상을 철회하면 안 되지요. 재협상을 실시해야 하지요. 제가 실수했지만 여러분은 왜 또 저를 따라하십니까? 자 다시 하겠습니다." 


"재협상을 실시하라."

"재협상을 실시하라."


넉살좋은 사회자 덕에 한참 배꼽을 잡고 웃다가 문득 전광석화처럼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재협상을 철회하라고 한 것이 실수였다면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시 재협상을 실시하면 되겠네. 국민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도, 이름만 그럴듯한 학교 자율화조치도 깨끗이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겠네. 그러면 모두들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세상이 되겠네.'


태그:# 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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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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