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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家訓)을 보면 그 집안의 가풍을 짐작할 수 있다. 가훈에는 가장의 취향과 스케일(?) 그리고 품격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흔히 액자에 담아 걸어둠직한 무난한 가훈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일 것이다. 스케일 큰 가장이 여기서 한발 더 나간 것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이다.

영화 속에서는 '차카게 살자!'는 조폭 가장의 가훈도 등장하고, '웰빙 트렌드'를 반영해 '잘 먹고 잘 살자!' 같은 파격적인 가훈이 등장하는 이즈음이다.

마찬가지로 '당훈'(黨訓)을 보면 당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정치권에서 당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정당의 당헌당규를 압축한 것쯤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요즘은 특정 정치인과의 친소관계를 당명으로 내세울 만큼 당명도 당헌도 다 파격이다.

박근혜 전 대표를 앞세운 친박연대 홍보물(자료사진)
 박근혜 전 대표를 앞세운 친박연대 홍보물(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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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과 당훈을 보면 가풍과 당의 정체성이 보인다

당훈은 그 정당이 지켜야 할 핵심 가치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출사표를 던진 정당들이 내세운 당훈은 그 정당들의 이합집산만큼이나 천태만상이다.

이번 총선에 후보를 낸 정당은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을 필두로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친박연대, 구국참사람연합, 국민실향안보당, 기독당, 직능연합당, 진보신당, 통일당, 평화통일가정당 등 13개나 된다. 그러나 25개 정당이 후보를 낸 17대 총선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었다.

그중에서 일단 핵심 가치의 스케일(?)로 보면 '박근혜 지킴이'를 자처하는 '친박연대'가 압권이다. 정당에서 지켜야 할 가치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친박연대'라는 해괴한 이름을 가진 이 당의 슬로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근혜를 지켜내겠습니다'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박근혜를 위한,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의 당'이다.

텔레비전 광고건 신문광고건 박근혜 일색이다. 신문광고는 "저도 속았습니다.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그 옆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박근혜 전 대표와 역시 눈물을 닦는 서청원 공동대표의 얼굴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박근혜를 지키고 대한민국을 살리겠습니다."

박근혜는 엄연히 한나라당 전 대표이고 현재도 한나라당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대표와 원내총무를 지낸 서청원․이규택 친박연대 공동대표와 홍사덕 전 국회 부의장까지 '엄마 박근혜'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모습이 안쓰럽기조차 하다. 이는 상도의를 벗어난 일종의 '인물 브랜드 도용'이다.

'박근혜 지키기 인간띠당'...'가정 지킴이' 평화통일가정당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선거 승리의 공식에 따르면, 가장 앞선 선거 캠페인일 수 있다. 대중은 단순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친박연대'의 정치광고를 '박근혜의 영혼을 파는 불법 상행위'로 몰아붙이는 것도 박근혜를 앞세운 단순반복 메시지의 파괴력을 알기 때문이다.

'친박연대'는 수도권과 영남을 중심으로 51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

평화통일가정당(총재 곽정환)은 '가정 지킴이'를 내세운다. 요즘처럼 하루가 멀다고 유괴와 납치 같은 강력범죄가 판치는 상황에서는 "범죄로부터 가정을 지키겠다"는 이들의 호소가 차라리 '박근혜 지키기 인간띠당'인 '친박연대'보다 더 인간적이다.

3월 4일 잠실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가정당 '전진대회'
 3월 4일 잠실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가정당 '전진대회'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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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가정당은 탄탄한 조직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국 245개 선거구 모두에 후보를 냈다. 전국 선거구에 후보를 낸 정당은 한나라당과 가정당뿐이다. 제1당인 통합민주당도 197개 선거구에서만 후보를 냈다. 따라서 가정당이 전국 3% 이상 득표로 비례대표 의석을 낼 수 있을지가 이번 총선의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가정당이 비례대표를 내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몫은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두 당은 공통으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도시 빈민 지킴이'를 표방하지만 '가정 지킴이'를 표방한 가정당과 힘겨운 승부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원래 한 몸이었지만 갈라선 두 당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각각 2~4%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103곳에, 진보신당은 34곳에 후보를 냈다.

'대한민국 지킴이' 자처한 선진당...상대적으로 정체성 모호한 한나라당

자유선진당은 우국충정의 열정에 불타는 '보수우익당'답게 스케일이 크다. 선진당은 '대한민국 지킴이'를 표방한다. 이회창 총재가 대선후보로 나설 때부터 그랬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 기자회견의 캐치프레이즈도 "대한민국을 지켜내겠습니다"였다.

선진당은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94곳에 후보를 냈다. 선진당은 이번 총선에서 20석(비례대표 포함)을 얻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이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31일 오후 서울 인현동 풍전호텔 앞에서 서울 중구에 출마하는 신은경 후보의 선거유세에 참석해 지역주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31일 오후 서울 인현동 풍전호텔 앞에서 서울 중구에 출마하는 신은경 후보의 선거유세에 참석해 지역주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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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오히려 일찌감치 과반 의석을 예약해 놓은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모호한 편이다. 한나라당의 대선공약이었던 대운하 공약도 총선공약에서는 슬그머니 숨기는 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일종의 '부자 몸조심'이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대운하 건설 추진단을 만들었으니 일종의 '사기 마케팅'이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내건 가치를 단순화하면 '경제 지킴이' 정도인데, 국민들이 보기에는 당장 경제를 지켜주지도 않을 것 같다. 정당 지지도는 여전히 고공 행진이지만 '이명박 직계' 후보들이 당 지지도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은 이번 공천 물갈이를 통해 '이명박 직계' 위주로 재편되었다. 한나라당은 '친박계' 후보를 제외한 공천자만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이다. 현재로서는 비관적이다. 그러면 박근혜 전 대표가 정국 운영의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다. 이 때문에 총선 이후 보수세력 중심의 정계개편 이야기도 솔솔 나온다.

대구 지역 지원유세에 나선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2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구지역 출마자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대구 지역 지원유세에 나선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2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구지역 출마자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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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서민) 앞세운 DJ, '중산층'으로 지지층 확대해 집권

정당은 존립 근거는 정권을 잡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을 잡으려면 국민 대중의 지지를 받는 다수파가 되어야 한다. 다수파가 되는 '쉬운 길'은 다수 국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정작 그 '쉬운 길'을 택한 대중 정당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진보당의 당수가 백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판국에, '노동자'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중 정당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정당 정치의 전통이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당 총재가 곧 당의 정체성이었다. 계급정당은 아니지만 '도시 빈민과 서민'을 내세운 정당은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이 처음이다. 정식 명칭은 평화민주당이지만, 오히려 평민당이라는 약칭에서 정체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DJ는 92년 선거에서도 '평민'을 앞세워 집권하는 데는 실패했다.

독재권력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오랜 야당생활로 한번 건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걷는 주도면밀함이 몸에 밴 DJ는 '국민회의' 창당과 함께 '중산층'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의 계층적 포지셔닝을 '평민'에서 '중산층'으로 확대한 것이다. DJ는 그런 후에 비로소 97년 대선에서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을 끝으로 이른바 '3김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당정분리'를 표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정당의 '총재 오너십(ownership)'은 사라졌다.

18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가 동묘역 앞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18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가 동묘역 앞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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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정체성은 '장미꽃'과 기회·책임·배려?

모든 국민이 열망하는 새롭고 깨끗한 정치 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 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 건설, 한반도 평화통일 지향을 강령으로 내건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당의 오너가 아닌 당원들이 만든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정치개혁은 한나라당의 당헌당규 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을 거쳐 통합민주당으로 이어진 당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일단,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은 국민회의 때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다.

'정치 문외한'임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나름대로 정치인 뺨치는 내공을 쌓은 박재승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은 민주당의 정체성에 맞는 후보를 공천하겠다며 이를 '민주․평화․개혁'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그러나 공천심사위원장이 당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손학규 대표가 밝힌 민주당 정체성의 '버전'은 다르다. 손 대표가 지난 2월 10일 당 대표 취임 1달 기자회견을 맞이해 당과 국민에게 전한 메시지는 '장미꽃'과 기회·책임·배려라는 '가치'였다.

손 대표는 이날 당사에 빨간 장미꽃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나 기자와 당직자들에게 장미를 한 송이씩 나눠줬다. 그리고 이날 손 대표는 새로운 진보의 3대 가치로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책임 ▲더 넓은 배려를 천명했다. 당의 노선과 정체성을 새로 정립하고 그것으로 총선에서 선택 받겠다는 의지를 장미꽃 한 송이를 통해 드러낸 셈이다.

'저항의 색' 노란색이 20년만에 사라진 선거

손 대표는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교수 출신이다. 손 대표가 '오너'는 아니지만, 그의 새로운 진보노선은 DJ 이후 당 대표가 당의 정체성을 정한 두 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또한 이번 선거는 '노란색'이 20여년만에 사라진 선거다. 노란색은 88년 총선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킨 평민당 시절부터 구민주당까지 면면히 사용되어온 '저항의 색'이다. 그런데 구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노란색을 사용하는 정당이 사라진 것이다. 손 대표가 의도한 것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색깔 지우기'이자 '홀로서기'의 의미를 갖는다.

통합민주당은 197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 이 가운데 85석 정도를 얻어 비례대표를 포함해 개헌 저지선 100석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정치학자 손학규'가 만든 새로운 진보노선의 정체성은 4월 9일 밤 그가 얼마나 많은 민주당 후보들에게 장미꽃을 달아줄 수 있느냐에 따라 비로소 이론이 아닌 현실정치에도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태그:#박근혜, #당훈,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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