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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전.  경덕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곳이다. 경덕궁은 오늘날의 경희궁이다.
자정전. 경덕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곳이다. 경덕궁은 오늘날의 경희궁이다. ⓒ 이정근

조선팔도에 금혼령이 내려졌다. 세자의 혼사는 단순한 혼인이 아니다. 차기를 담보로 한 세력재편이다. 세자를 잡는 것은 장래가 보장된다. 정치지형이 달라진다. 정파간에 각축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한성판윤 이서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윤의립의 딸을 추천했다. 인조는 정사공신 이서의 천거에 마음이 쏠렸다. 암중모색 중이던 김자점이 반대하고 나섰다. 모두가 혁명동기들이다.

“윤의립의 딸은 바로 윤인발의 4촌 누이입니다. 또한 양사(兩司가 있고 공론이 있는데 판윤 이서가 단자를 올리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윤인발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 세자빈으로 천거한 인물도 부당하고 일개 지방장관이 세자빈 간택에 끼어든 것은 가당치 않다는 얘기다. 김자점에 이어 사간 이상급이 가세했다.

“동궁의 정비(正妃)에 어찌 감히 의립의 딸을 간택에 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느 시대인들 역적이 없었겠습니까만 윤인발과 같은 흉역은 없었습니다. 결코 윤의립의 딸을 국혼에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한성부의 관원을 중벌로 추고하고 의립의 딸은 곧바로 허혼(許婚)하게 하소서.”

역적의 딸은 세자빈으로 불가합니다

“내 뜻은 이미 정혼하려 하였는데 공들이 어찌 감히 이같이 말한단 말인가? 그리고 판윤은 대간을 지휘할 사람이 아니다.”

“임금도 대간을 지휘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신하이겠습니까? 혼인은 인륜의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라 여깁니다. 조종조로부터 역적 집 자식과 혼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역적 집의 자식과 혼인을 정한단 말입니까?”

“혼인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서 보통 사람이라도 반드시 그 부모가 주관하고 여러 사람이 어지럽게 논쟁할 일이 아니다.”

시독관 이경용이 끼어들었다.

“성상의 분부에 ‘무릇 혼인은 반드시 부모가 주관한다’ 하였으나 국혼은 예로부터 반드시 대신에게 물어본 뒤에 정하였습니다.”

윤방과 이정구가 합사(合辭)하여 거들었다.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언관입니다. 상께서 ‘남의 지휘를 받았다’ 하시니 성덕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한 후일의 폐단이 없지 않을 듯싶습니다.”

“내가 말한 지휘란 것은 외부에 있으면서 지휘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 발언할 때에 대간에게 언급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휘한 것이다.”

김자점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의 망령된 말로 인하여 대간이 곤혹스럽게 되었으니 황공하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소회가 있으면 아무리 중한 형벌을 내리더라도 감히 피하지 못합니다. 윤인발은 이괄과 역란을 일으킨 중죄인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혼인할 의사를 둔단 말입니까?”

“국가의 일은 사람마다 각각 말한 뒤에야 정론(正論)이라 할 수 있다. 두세 사람의 소견을 어찌 공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논쟁은 싫다. “금혼령을 거두어 들여라”

“우리 국조(國朝)의 규문(閨門)의 바름과 곤범(壼範)의 성대함은 전대에도 이에 미치는 예가 드물었습니다. 훌륭한 덕을 계승한 현숙한 사람을 간택함으로써 위로는 조종의 법을 떨어뜨리지 말고 아래로는 인심을 크게 위로하여야 합니다. 대신에게 자문하고 여론을 참증 하여 일호도 미진함이 없게 한 뒤에야 만세의 복이 될 것입니다.”

김상헌이 국혼의 당위성을 논거 했다. 인조는 머리가 아팠다. 세자비 간택이 논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인조는 세자비 간택을 거두어들이고 금혼령을 해제했다. 인조는 단초를 제공한 김자점을 징계했다. 세자비 간택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하지만 차세대를 겨냥한 각축전은 수면 하에서도 불꽃을 튀겼다. 냉각기가 흐른 뒤 예조에서 상언했다.

“금혼(禁婚)했던 처녀들에게 혼인을 허락하는 명이 계셨습니다. 지금 세자의 가례(嘉禮)가 하루가 급하게 되었으니 한성부와 팔도에 다시 처녀단자를 봉납하게 하여 속히 간택할 수 있게 하소서.”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

“세자의 가례는 국가의 대사입니다. 처자단자(處子單子)를 속히 올리게 하여 간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지사 김상용이 주청했다.

“국혼을 승지 강석기의 집과 정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삼가 성교를 받들건대 진실로 신민들의 소망에 흡족하니 실로 종묘와 사직에 무궁한 복입니다.”

숭정전.  경덕궁의 정전이다. 경덕궁은 오늘날의 경희궁이다.
숭정전. 경덕궁의 정전이다. 경덕궁은 오늘날의 경희궁이다. ⓒ 이정근


편전에 부복한 대소신료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국혼은 급물살을 탔다.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고 숭정전에서 왕세자빈의 납징례(納徵禮)가 거행되었다. 왕실에서 세자빈의 사가에 꽃무늬를 새긴 은 50냥. 홍색과 초록색 명주 각 16필. 목화 10근. 당주홍칠을 한 함(函) 1부. 당주홍칠을 한 상(床) 1좌가 함에 담겨 예물로 보내졌다. 혼인에 대한 약조다. 납징예물에 이어 별궁예물, 정찬예물, 본방예물이 순화방 강석기의 집에 도착했다.

숭전전에서 세자빈을 책봉하는 예를 행하였다. 택일도 잡혔다. 해를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섣달 스무 이레 날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숙옹주의 예장과 날자가 겹쳤다. 정숙옹주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로서 인조의 고모가 된다.

“정숙옹주의 예장(禮葬)이 이달 27일로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그날 가례를 행하는 것은 미안하니 해조로 하여금 택일을 다시 하도록 하라.”

“세자의 가례는 나라의 큰 일입니다. 정숙옹주가 비록 정으로는 지친이지만 사가(私家)의 상례 때문에 대례(大禮)를 옮길 수는 없습니다. 또 상가(喪家)에서 장례를 28일로 연기했다 하니 더욱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정한 날에 거행하소서.”

“그리 하도록 하라.”

“별궁에 이미 세자빈이 드실 처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세자의 친영례(親迎禮)를 별궁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태평관에서 친영한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예이기는 하지만 이미 이러한 규례가 있었으니 어찌 처리해야 합니까?”

“별궁이 좁을 뿐만 아니라 태평관에서 친영하는 것이 바로 이전 규례이니 전례에 따라 시행하라.”

강석기의 딸은 사가를 떠나 태평관으로 거소를 옮겼다. 댕기머리 소녀는 뭐가 뭔지 모른다.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드디어 친영 날이 다가왔다. 소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랑이 잘 생겼을까? 못생겼을까?” 신부는 신랑이 세자라는 것뿐. 신랑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전통혼례.  전통혼례식. 국립민속박물관.
전통혼례. 전통혼례식. 국립민속박물관. ⓒ 이정근

기러기 한 마리를 싼 보자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든 나인을 앞세우고 왕자 신랑이 친영을 나왔다. 것도 평범한 왕자가 아니라 대통을 이을 세자다. 자리를 깔고 마련한 대례청에 마주선 신랑과 신부는 시선을 내리깔고 마주섰다. 신부보다도 신랑이 더 떨었다. 신랑에게 말동무 친구라도 있었으면 “나 지금 떨고 있니?” 라고 물었을 것이다.

전안위(奠雁衛)에 기러기를 올려놓고 어린 신랑이 두 번 절을 했다. 전안례(奠雁禮)다. 승지댁 할멈이 기러기 보자기를 치마로 감싸듯이 받아들고 안방으로 들어가 시루로 엎어 놓았다. 치마로 감싸는 것은 다산을 기원하며 떡 시루는 장수를 바라는 축원이다.

신랑신부 교배례가 이루어졌다. 왕과 왕비의 경우에는 동뢰연(同牢宴)이라 하여 술잔을 주고받지만 이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술잔을 받는 시늉만 했다. 이어 합근례(合巹禮)차례다. 신랑은 무릎을 꿇고 신부는 다소곶이 앉았다.

하님이 청실·홍실을 드리운 술잔에 술을 따르고 신부가 허리를 굽혀 읍(揖)했다. 하님이 술잔을 1번은 대례상 왼쪽으로, 1번은 오른쪽으로, 또 1번은 대례상 위로 신랑에게 보냈다. 신랑은 입에 대었다가 다시 신부 쪽으로 보내고 술잔을 받은 신부는 잔에 입술을 대었다 퇴주했다. 이때의 술을 합환주(合歡酒)라 한다.

합근례를 치른 신랑신부가 신방으로 들어갔다. 열다섯 살 신랑과 한살 위 연상의 신부가 맞이하는 첫날밤이다.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신부지만 신랑이 오히려 떨고 있다. 어린 신랑이기 때문이다.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신부를 살짝 보았다. 장난기다. 색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쁘다. 그리고 밤은 깊어갔다.


#경희궁#전통혼례#가례도감#처녀단자#합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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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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