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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리를 지르면 일제히 창칼을 앞으로 내어질러라!”

군관 하나가 무슨 생각인지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앞 뒤 따질 것도 없이 군관의 말을 염두에 두고 창칼을 굳게 부여잡았다. 왜군은 자루 긴 칼과 커다란 칼을 든 보병을 먼저 앞세워 조선군을 덮쳐왔다.

“쳐라!”

조선군을 얕보고 높이 칼을 치켜들고 달려오던 왜군들은 앞으로 내어질린 창과 칼에 몸이 꿰여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의 반격은 그것이 다였다. 뒤이어 달려온 왜군들은 사정없이 조선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비켜라! 비켜라!”

왜군의 한 구석이 어지러워지며 틈이 생겼다. 공격을 나갔던 조선 기병의 일부가 악전고투 끝에 겨우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되돌아 온 것이었다. 박산흥도 그 가운데에 끼어 왜군에게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유만아! 유만아!”

조유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박산흥이 말을 몰고 달려와 손을 끌어 말에 태우고 자신은 말에서 내렸다.

“싸움은 틀렸네! 자네라도 반드시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게!”

“이보게 자넨......”

“꽉 잡게!”

박산흥은 말 엉덩이를 힘껏 때려 내달리게 한 후 자신은 환도를 부여잡고 왜군들에게 달려들었다. 조유만은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러 온 몸을 말 등에 바싹 붙인 채 눈을 감았다.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조유만의 귓가에 아련히 들려왔다.

‘이대로 난 살 수 있을까?’

조유만이 탄 말은 얼마 달리지 못해 흰 거품을 내물며 지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지만 조유만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워! 워!”

누군가 비틀거리며 달리는 말의 고삐를 힘껏 잡아 말을 멈춰 세웠다. 조유만이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 다름 아닌 강창억이 만신창이가 된 채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다행이도 그들은 격전이 벌어지는 곳과는 다른 방향에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겐가?”

조유만은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엄연히 말해서 조유만은 전장에서 도주하는 셈이었다.

“이 말이 좋은 건지 자네 운이 좋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대단하더군. 왜군이 사면팔방으로 포위를 했는데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니 말일세.”

강창억은 배를 움켜잡고 인상을 쓴 뒤 조유만에게 말에서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조유만은 범상치 않은 강창억의 태도에 쉽게 말에서 내리지 못했다.

“말에서 내려 저 샛길을 통해 숨어가게. 말을 타고 가면 왜놈들의 눈에 띌 걸세.”

조유만이 돌아보니 정말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이 나 있었다. 조유만은 말에서 매달리다시피 하여 엉거주춤 말에서 내렸다. 순간 조유만은 강창억의 발밑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별거 아니야. 칼에 맞았는데 깊게 베인 건 아니야.”

별거 아니라는 말과는 달리 강창억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핏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어서 이곳을 떠나게. 신립장군, 김여물 장군은 패배를 분통해하며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어리석게 싸우다 죽은 자는 없고 그렇게 죽었다고 전해지기를 원하는 자도 없을 걸세. 자네는 돌아가 이곳의 얘기가 헛되이 전해지지 않도록 해주게. 그게 여기서 목숨을 살려 가는 의미가 아니겠나.”

강창억은 말에 올라타려다가 다시 한번 조유만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가 내 앞으로 말을 타고 왔을 때 자네를 끌어내리고 말을 타고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네. 하지만 난 어차피 상처가 깊어 살지 못할 것 같으이. 저 샛길은 도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니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왜군이 물러가면 고향으로 내려가게.”

강창억은 배를 움켜쥐고 말에 올라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조유만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샛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제 언제 뵈올지 기약할 수 없나이다.’

쉼 없이 걸어 올라가는 그 길은 조유만에게 속죄의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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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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