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에서 구이린(계림) 가는 길이었다. 세계여행을 떠난 지 2주일, 아내와 내게도 나그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삐끼에게 슬쩍 웃어줄 줄도 알고, 서투른 필담으로 숙박요금을 에누리했으며, 식당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손가락으로 찍어 주문할 만큼 얼굴도 두꺼워졌다. 조금씩 낯선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기차가 왔다. 내 손에 쥐어진 표를 내려보았다. '잉쭤'였다.
중국 기차는 다섯 가지 종류의 승객표가 있었다. 딱딱한 의자 '잉쭤', 부드러운 의자 '란쭤', 딱딱한 침대 '잉워', 부드러운 침대 '란워', 그리고 입석이다. 내가 가진 표는 결국 삼등칸 기차의 90도로 꺾인 딱딱한 의자에 앉아 스물한 시간 동안 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설렘이 가득했다. 이처럼 긴 시간 동안 기차를 타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차오스(슈퍼마켓)에서 사둔 컵라면과 과자 등의 식량을 양손 가득 들고 씩씩하게 올라탔다. 그런데….
자리 빼앗아 놓고 화내는 중국인들
"으악! 자기야~!"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통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수풀을 헤치듯이 인간 장애물을 뚫고 자리를 찾아갔다. 이마에서는 진땀이 흘러내렸다.
'어! 그런데 어찌 된 일이지?' 좌석에는 이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번호표를 확인했다. 틀림없이 아내와 내 몫의 자리였다. 비켜달라는 뜻으로 표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람! 두 사람이 막 화를 냈다.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더니 팔짱을 턱 하니 끼고서 그대로 앉아버렸다. 아내와 나는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지?"
"가만…. 이제 보니 이 사람들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우습게 보는 것 아냐?"
그들에게 표를 보자고 했다. 입석이었다. 기가 막혀서. 할 수 없이 나도 째진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썼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거 한국말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당신들 뭐야? 왜 당신들이 화를 내! 화를! 말 못하는 외국인이라고 깔보는 거야? 먼저 앉은 놈이 장땡이라는 거 아냐, 지금!"
그제야 그들은 마지못한 듯이 일어났다. 황당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몽땅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얼굴들이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겨 먹었다.
"야, 큰일났다! 스물한 시간 동안 잠은 다 잤다. 잘못하다간 짐이 홀라당 없어지게 생겼어!"
"그래, 번갈아 가며 자야겠어. 바싹 긴장하고!"
아내와 난 속삭이듯 말을 주고받았다.
저녁 식사시간이 왔다. 컵라면에 온수를 받으려고 연결 칸으로 나갔다. 또 다른 전쟁이었다. 밀고 당기고 새치기하고 소리 지르고…. 휴∼,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조금 뜸해지면 먹기로 하고 돌아왔다.
어느새 기차 바닥은 해바라기씨 껍질과 과자 봉지와 컵라면 쓰레기로 시장 바닥이나 다름없었다. 식사를 마친 남자들이 자리에 앉은 채로 담배까지 피워댔다. 아내가 신음하듯 말했다.
"으∼, 기차여행의 낭만은 사라지고 인고의 시간만 남았도다!"
"내가 맡은 자리야, 당신이 뭔데 비키라는 거야?"
그 때였다. 뒤쪽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싸움이 난 모양이었다. 동서고금을 떠나 제일 재미난 구경거리가 싸움이라 했던가. 모두들 일어섰다. 기차표를 들고 소리를 질러대는 걸로 보아 좌석과 연관된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 다 30분이 넘도록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승무원이 나타났다.
싸움의 원인은 간단했다. 처음엔 좌석표가 중복되었나 보다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해설을 종합해보자면, 상황은 이랬다.
입석표를 가진 한 사람이 난징(남경)에서부터 주욱 앉아왔다. 어느 역에서 좌석 주인이 뒤늦게 탔다. 당연히 비켜달라고 했겠지. 그런데 그가 당당하게 거부한 것이다.
"10시간 가까이 내가 맡아놓은 자린데, 당신이 뭔데 이제 나타나서 비키라는 거냐!"
입석표를 가진 그 사람의 주장이었다. 마침내 승무원이 힘으로 끌어내려고 팔을 잡아당겼다. 그 사람도 막무가내로 버텼다. 어찌 이런 일이! 그런데 황당해하는 사람은 아내와 나뿐, 구경하는 이들 모두가 그러려니 하는 표정들이었다.
'참 재밌는 나라네. 우리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잖아.' …풋, 웃음이 났다.
그제야 여유가 생겨 다시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들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모두 맑은 눈을 가진 순박한 얼굴이었다. 내가 미소를 보내면 금방 수줍은 얼굴로 웃어주었다. 앞자리에 마주앉은 인상이 좀 더러운(?) 아저씨들도 알고 보니 공안(경찰)이었다.
건너편 옆자리에 앉아있던 황비홍 머리를 한 꼬맹이가 뒤뚱뒤뚱 걸어왔다. 아내가 손에 초콜릿을 쥐여주었다. 다시 할머니가 해바라기씨 한 줌을 아이의 손에 쥐어주며 우리에게 가져다주라고 시켰다.
이번에는 공안이라던 친구가 필담으로 말을 걸어왔다. 종이에 '韓國'과 '朝鮮'를 적고는 볼펜을 내게 건넸다. 난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휘 내젓고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한마디했다.
"워 쓰 한꿔우(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와! 와하하!"
모두들 포복절도(抱腹絶倒), 손뼉치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내 안에 있던 편견의 벽이 사라지다
순박한 사람들.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했던 마음은 점점 미안함으로 바뀌어 갔다. 처음 우리 자리에 앉아 화를 냈던 부부도 서른 시간이 넘게 입석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들의 고단한 땀내음이 기차 안을 데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삼등칸 기차 안의 일상이었다. 겨우 며칠 전에 보았던 상하이의 마천루나 도발적인 밤거리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따뜻했다.
어느새 밤이 수북수북 쌓였다. 한 사람 두 사람 잠이 들었다. 좀 전에 좌석을 두고 싸웠던 두 사람도 엉덩이를 나란히 붙이고 졸고 있었다. 한참 긴장했을 때는 "난 잠에 강하잖아, 걱정하지 마!" 하고 큰소리치던 아내도 편안한 얼굴로 내 어깨에 머리를 떨구었다.
'덜커덩덜커덩' 기차 소리가 '푸우' '쌔∼액' 사람들의 지친 숨소리를 덮어주었고, 가끔씩 역에 정차할 때마다 승무원이 맨 목소리로 내릴 사람들을 깨웠을 뿐 기차는 변함없이 달려갔다. 마침내 혼자서 말똥말똥 앉아있던 꼬마 황비홍의 예쁜 눈꺼풀도 흘러내렸다.
그리고 내 눈도, 내 안에 있던 편견의 벽도, 고단하지만 정겨운 삶의 냄새 앞에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아내인 김향미씨와 결혼 10년째이던 해에 길을 떠나 2년 8개월 동안(2003년 10월 16일~2006년 6월 4일) 아시아·유럽·북미·중남미·아프리카·중동 등 세계 47개국을 여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