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도 서양 출신의 국민이 있을 수 있다? 38선을 넘어 월북한 미군이 있다?

 푸른눈의 평양시민 포스터
ⓒ 대니얼 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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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보나마다 답은 '없다'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무려 40여 년 전에 일어난 미군의 월북은 학교에서도 방송에서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몇 달 전부터 <어떤 나라>와 <천리마축구단>을 만든 감독이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 탈영병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4명이란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갑자기 궁금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24일 <푸른 눈의 평양시민>을 '동숭아트센터 하이퍼텍 나다'에서 만났다.

평양 시내 한복판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가슴에는 김일성 배지, 손에는 평양 시민증이 들려있다. '우와 진짜다'하고 놀라기는 이르다. 대동강변에 낚시를 하러 나가서는 주변 시민들과 농담까지 주고받는다. "이거(낚시) 심심풀이야, 심심풀이."

넉넉하고 자유로웠다 vs. 자식까지 스파이교육 시켰다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그는 38선의 경계근무를 서던 1962년 8월 갑자기 월북한다. 미국 하층계급에서 자란 환경과 부모의 부재, 결혼생활의 파탄 등이 항상 자신을 괴롭혔다고 그는 회상했다. 또 월북 전날의 무단 외출에 따른 군사재판도 두려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평양에서 '찰스 로버트 젠킨슨', '래리 알랜 앱셔', '제리 웨인 패리쉬' 등 3명의 미국인을 만난다.

월북 이후 4명의 미국인들은 환대를 받으며 선전용으로 활용된다. 미군에 대한 대남방송을 녹음하고, 선전영화에 나쁜 미국인으로 등장해 스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들은 소련으로 망명을 신청하지만 거부당한다. 이후 북한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기 시작한 그들은 각자의 뜻대로 북한 사회에 적응해나간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우리가 항상 접해왔던 대로 북한이 주민들에게 폐쇄성을 주입시키고, 배급이 부족하며, 자유를 억압시키고, 외국인을 납치해 언어를 가르치도록 하고, 그 자녀를 스파이로 이용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과연 사실일까?

영화 속에서 젠킨스는 '그렇다'고, 드레스녹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젠킨스는 철저한 감시 속에서 생활하며 납치된 일본여성과 결혼하고, 아이들은 스파이 교육을 받았으며, 체제 비판 시 드레스녹에게 맞기까지 했다고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반면 드레스녹은 영화로 스타도 되어보고,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때도 하루에 800g의 쌀을 정상적으로 공급받았으며, 충분한 의료혜택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평양에서의 젠킨스(왼쪽)와 드레스녹(오른쪽). 영화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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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으로 망명한 젠킨슨. 그는 탈영, 혹은 반란죄로 인한 형량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북한에 대한 체제비판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나이가 고려되어 30일 실형만을 언도받는다. 하지만 만약 그가 드레스녹이 말한 것처럼 넉넉하게 살았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환영받지는 못했으리라.

반면 현재 북한에 부인과 이들 셋을 두고 있는 드레스녹. 그가 북한의 간부들도 보게 될 이 영화에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으니 탈출하고 싶다'고 진술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도 완벽한 진실만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감독은 곤란하게도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은 드레스녹의 평양 생활과 건강,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대동강변에서 낚시를 하며 주민들과 술 한 잔 걸치고, 두 아들·아들의 여자친구들과 볼링을 치고,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는 등 그가 평범한 시민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들을 꼭 정치적 색으로 바라봐야 할까?

이외에도 어느새 그의 삶 전부를 차지해버린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이기 때문에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들이 자랑스럽다는 아버지로서의 뿌듯함, '중요한건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삶의 신조를 이야기하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선전물 앞에서의 드레스녹. 영화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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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대니얼 고든 감독의 신작이고 워낙 언론에 많이 다루어진 덕분인지 <어떤 나라>보다 3배 정도 더 많은 관객이 찾은 듯하다. 관람객 중에는 노인들이 많았지만 간간이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영화가 끝난 뒤 싱가포르 방송국에서 왔다는 취재진들과 한 노인과의 인터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감정이 격해진 듯 격양된 목소리로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있었다.

꼭 그래야만 할까 싶었다. 감독도 드레스녹과 젠킨스, 어느 한편도 들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북한 사회를, 북한 시민들을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텐데 6·25를 몸으로 겪은 노인들에게 인정을 갖고 북한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까.

북한으로 월북해 선전에 동원되고, 영화배우가 되고, 납치된 여인과 결혼을 하고, 평범한 시민의 일부로 살아가는 그들의 지난 40여년의 이야기.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정치적으로도, 그리 불쌍하게도, 또 증오하면서도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북으로 인한 결과가 어떻든 그건 그들이 선택한 인생이었고, 드레스녹에 말처럼 '중요한건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디 진정으로 그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푸른눈의 평양시민은 <천리마 축구단> <어떤 나라>와 함께 동숭아트센터 하이퍼텍 나다에서 교차상영되고 있습니다. 평일 세 영화를 모두 관람할 경우 12000원의 패키지 이용권을 구입하시면 저렴하게 영화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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